본문 : 욥기 38:4-11
제목 : 압도하시는 하나님(1)
서론)
직전 교회에서 시무하던 어느 주일에 2부 예배를 마치자 모 장로께서 목양실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상당히 많이 격앙된 감정의 폭이 보이던 그 장로께서는 제게 와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야 말로 설교 제목처럼 많이 왜곡되어 있는 설교였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이렇게 무례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터였고, 너무 당돌한 도발이어서 순간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도대체 이 양반이 설교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들어 이렇게까지 혈기충전해서 목양실까지 찾아와 항의를 하는가를 먼저 자세히 들어보아야 했습니다.
제가 그 주일에 증언한 본문 텍스트는 마태복음 17:14-20절이었고, 설교 제목은 ‘왜곡된 믿음을 회복하라’는 제하였습니다.
그 날의 설교 원고가 제 설교 파일에 있기에 그 분이 기분에 들지 않았던 부분을 분명히 찾아낼 수 있기에 오늘 교우들에게 무려 13년 전에 설교한 그 증거를 고스란히 되새김질하여 전달할 수 있어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필리핀 단기 선교를 다녀온 우리 교회의 학생들이 요즈음에 아주 뜨겁습니다. 기도의 시간을 정해서 갖고 하나님을 향한 선교의 비전을 다시 품고, 받고 온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심야기도회가 끝나고 기도의 시간을 연장하여 기도하고,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학교에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시화 성회를 참석하고, 성회의 강사의 결단의 요청시간에 선교사로 부름 받은 자를 초청할 때 일어서고, 하나님을 위하여 어떻게 하든 잘 살아 보려고 하는 몸부림이 이번 단기선교 후의 모습 중의 하나입니다. 목사로서 학생들의 그런 모습이 한 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 염려되는 부분이 있어 교통정리를 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어서 지금 그 뜨거움의 가장 한 복판에 있는 두 아이를 토요일에 불렀습니다. 아이들의 상황을 듣고 세 가지를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① 영력만 있는 기형적인 신앙인이 되지 말고 지력, 영력, 체력이 함께 구비된 균형 잡힌 실력이 있는 신앙인 되어야 함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도록 특히 고등학교 3학년인 너희들은 야간자율학습에 빠지지 말고 학업에 전념하라고 당부했습니다. ② 은사중심주의의 신앙에 분별력을 가지라는 권면이었습니다. 받은바 은혜가 너무 뜨거워서 내일 주님이 오실 것 같아 지금의 학생 신분을 망각한 상태로 신앙적이라고 말하는 것에만 시각을 좁히는 실력이 없는 신앙인이 되지 말고, 그 뜨거움과 은사를 개발하며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지속적인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반드시 말씀과 함께 성장해야 함을 고지해 주었습니다. ③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의 스케줄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필요함을 역설해 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서워할 정도의 철저한 시간 관리와 자기관리가 필요함은 시간 관리와 자기 관리에 실패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이 쓰시지 않기 때문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뒤에 아이들을 위해 축복해주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2007년 9월 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원고 중에서】
사달은 여기에서 났습니다.
그 분의 지론은 어떻게 담임목사가 되어서 은혜 충만한 아이들을 격려는 하지 못할망정 초를 뿌릴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중에서도 그를 분노하게 만든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영력만 있는 기형적인 신앙인이 되지 말고 지력, 영력, 체력이 함께 구비된 균형 잡힌 실력이 있는 신앙인 되어야 한다.”
영력을 깔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설교가 왜곡되었다고 몰아 붙였습니다.
제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한 동안 멍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정도의 수준이면 대화 불능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준비를 위해 읽은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책을 유명세를 탄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가 쓴 ‘욥기’를 보다가 챔버스 목사의 기막힌 성찰에 눈에 띄었습니다.
“종교적인 독단은 무슨 일이 있을 때, 경험을 통해서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를 설명한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 밖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있고, 그 일들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계시 외에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판단할 권리가 없다.”(오스왈드 챔버스, “욥기”, 토기장이 간,p,185)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가 말한 ‘계시 외에 다른 것을 판단하지 말라’는 이 계시라는 단어를 이상하게 해석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여기에서 말한 ‘계시’는 신비주의에 빠져 있는 자들이 흰옷 입고 기도하는 데 하나님이 멋진 포즈를 취하고 그에게 ‘쨘’ 하고 나타나셨다는 식의 아주 단골손님으로 끄집어내는 은사중심주의적인 감정주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두 가지의 계시 즉 일반계시 (자연으로 통해 피조물들에게 알려주신 하나님의 드러내심)와 우리들이 영원히 붙들어야 하는 특별계시인 성경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그레이스교회를 담임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존 맥아더 목사는 탁월한 성경 강해 설교자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그가 쓴 ‘무질서한 은사주의’라는 탁월한 책을 25일에 있을 DPA 특강 준비 때문에 다시 손에 들고 읽고 있습니다.
옛날 맨 처음 읽었을 때의 그 감동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재 감동이 지금도 제게 있습니다.
그의 말을 하나 건져 올리겠습니다.
“신비주의란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사실과는 별도 영적 실체를 지각하려는 신념 체계다. 신비주의는 느낌, 직관, 및 그 밖의 내적 감각을 통해 진리를 추구한다. 객관적 자료는 보통 평가 절하되고 그 결과 신비주의는 마음 안에서 근거를 도출한다. 자연발생적인 느낌이 객관적인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된다. 직관이 이성보다 중요시 된다. 내적 자각이 외적 실체를 대신한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현대의 실존주의, 인본주의, 심지어 여러 형태의 이교주의 등등 뉴에이지 철학에 핵심을 이룬다. (중략) 은사주의적인 가르침의 실제적 효과는 올바른 성경 이해보다는 개인의 경험을 더 높은 단계로 설정하는 것이다.” (존 맥아더, “무질서한 은사주의”, 부흥과 개혁사, p,40)
읽다가 얼마 전, 서울의 모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핑계로 행동주의적인 결단을 요구하며 비상식적인 일들이 자행했는지를 알려주는 신학적 해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존 맥아더의 이 갈파는 빠져 나갈 수 없는 엄청나고 너무 적확한 신학적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설교의 서두에 왜 두 선배 목회자의 글을 소개했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앞에서 제게 항의했던 그 분은 대표적인 경험적 신앙 우선주의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성경적 가르침을 무시하고 본인이 갖고 있는 주관적 체험과 경험을 신앙의 최우선적 잣대로 무장한 정말로 잘못 배운 신비주의적인 오류를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케이스의 실례임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해석은 제가 갖고 있는 또 다른 경험적인 성서 주관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살펴볼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론)
본문 4-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이 구절에 소제목을 붙인다면 이렇게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압도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권위”
본문은 그 동안 참고 기다리시며 묵묵하시던 하나님께서 욥에게 현현하셔서 드디어 말씀하시는 장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세밀히 살핀다면 38-41장에서 하나님이 반응하시면서 반문하신 내용들은 단순히 욥에게만 하심 말씀이 아니라 그의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까지 포함한 논쟁자 전부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욥을 비롯한 논쟁자 전부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창조 사역의 파노라마가 진행될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조금 더 구체화시키십시다.
①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②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느냐?
③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아느냐?
④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느냐?
⑤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이제 하나님의 질문 공세에 욥과 그의 논쟁자들이 답해야 합니다.
이렇게 먼저 궁색한 답을 내놓아 보십시다.
엘리바스는 욥기 15:7-8절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네가 제일 먼저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엘리후도 이렇게 논한 적이 있습니다.
욥 37:15-18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 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 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두 사람이 욥에게 질문했던 이 질문을 오늘 본문 4-7절에서 질문하시는 하나님의 질문과 비교해 보니 어떻습니까?
비교가 됩니까?
어리광 수준에 지나 보이지 않습니까?
이들이 말했던 내용은 그들의 느낌이었고, 경험이었지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특별한 계시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언변은 그냥 원론을 말한 것뿐이지 하나님이 행하셨던 창조 사역의 파노라마에 어디 견줄 바가 되는 해석이자 답변이 되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을 마저 보겠습니다.
8-11절입니다.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바다라는 피조물도 하나님의 압도하시는 일하심의 통제 안에 있음을 분명히 선언하신 내용입니다.
아주 단순히 이 구절을 요약하면 이런 의미가 담보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다가 대적할 때, 그 바다도 하나님의 꾸지람 한 마디로 잔잔해지는 순종을 한다고 말입니다.
이 구절이 보니 신약에 기록된 한 말씀이 절절하게 아멘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8:26-28절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어느 신학자가 이 구절에 대한 답을 이렇게 답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토기가 토기장이의 마음대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 토기는 또 다시 토기장이의 마음대로 충분히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처럼 바다도 예욀 수 없다.”
너무 기막힌 주석입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저는 오늘 우리 교우들과 이런 영적 교훈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압도하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파노라마에 이제 우리기 답해야 한다는 영적 부담감을 가져야 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답해 보십시다.
위에서 욥에게 질문하신 하나님이 이 압도하시는 질문에 답해 보십시다.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정답을 제가 제시하겠습니다.
정직한 정답입니다.
“주님, 모릅니다.”
이 답을 제시하고 동의할 때,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본문 해석을 통해 나눌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의 압도하시는 일하심 앞에서 언제나 나는 작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볼 때 또 다른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선 사람은 언제나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존재임을 각성하게 됩니다.
새벽에 우리가 읽고 있는 예언자 예레미야를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예레미야가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예레미야 1:6절입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소돔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기도하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자신을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창세기 18:27절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모세의 고백까지 함께 나누어보기를 원합니다.
시편 90:9절입니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순식간에 날아 가버리는 것이 인생임을 알게 되는 것은, 내가 티끌과도 같은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는 이유는, 내가 말할 줄 모는 작은 아이임을 고백하는 이유는 내 앞에 압도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주관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내가 꽤 잘난 사람이고, 앞서가는 똑똑한 존재이며,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실력자라고 느끼는 자는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압도하시는 그 장엄한 일하심을 인정하지 않거나 아니면 경험하지 못한 자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본문은 그냥 읽어도 충분한 은혜가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 복기한 뒤에 그렇게 마무리하겠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압도하시는 하나님이 일하심을 오늘도 강력하게 느끼고 감사하는 우리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