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가만히 서서2024-03-08 17:02
작성자 Level 10

2020년 5월 27일 수요 예배 설교 (욥기 81번째 강해)

 

본문 욥기 37:14-24

제목 가만히 서서

 

서론)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이 쓴 사막의 지혜를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한 형제가 원로에게 물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원로가 그에게 대답했다.

당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시오.”

그 형제가 다시 물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로가 대답했다.

그들한테서 멀리 떨어져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 “사막의 지혜”, 바오로딸,p,140.)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입을 다무는 일만해도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고.

1년 중에 제가 개인적으로 말을 제일 많이 줄이는 시기는 기도원에 올라가는 시기입니다.

기도하는 시간 외에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년 두 번씩 경험하는 일이지만 적어도 제게는 이 시기가 너무 소중하고 중요한 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개인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혜택은 실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언 10:19절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의 복이 임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또 하나깊이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제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은 이런 성경의 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말을 많이 한다는 역설적인 연약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하루에 내뱉는 언어 중에 약 80%는 안 해도 되는 말들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출처가 자세히 기억에 없어 말씀드리지 못해 유감스럽지만 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줄여도 될 80%, 안 해도 될 80%의 말 때문에 자신의 위신은 물론 내가 스스로 가벼운 존재임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이 아이러니를 어찌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분명히 기억할 것은 말을 줄이는 것 역시 저와 여러분이 훈련해야 할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저는 엘리후의 마지막 변론의 텍스트를 보면서 말 줄이기라는 교훈을 특별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14절을 봅니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엘리후는 본인이 32장부터 계속해서 말한 내용과 더불어 오늘 마지막으로 피력하는 내용까지를 포함하여 욥에게 다음과 같이 역설합니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가만히 서서라고 표현한 이 구절을 매우 좋아합니다.

신앙인들이 새겨들어야 하는 구절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지 기독교를 대단히 시끄러운 종교라고 정의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합해 보면 예배 중에 드리는 찬양이나기도나신앙의 반응들이 정적이지 않고 동적인데 따른 비평적인 공격이 그 주된 이유일 것입니다.

저는 가톨릭에 비해 개신교가 동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예전적인 틀에 얽매여 있는 가톨릭에 반향 하여 나타난 태생적인 동기가 있기 때문에 일정 부분 어쩔 수 없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주객이 전도된 듯한 상당수의 가볍고 천박한 반응들이 개신교 안에서 기형적으로 변질되어 기생했기에 이런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에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성기도가 은혜로우면 침묵기도도 은혜롭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뜨겁게 찬양을 하는 것이 역동적이라면조용하게 찬양하는 것도 또 다른 주님과의 만남을 갖게 만들어주는 역동의 기도라는 것을 인정해 주어야 하며방언기도가 은사 받은 자의 기도라는 것을 자랑하면 어설프지만 더듬더듬 거리며 기도하는 서투른 기도도 아름다운 기도라는 임을 인정해주어야 하며감성적인 복음성가가 은혜를 주는 동적 찬양이라는 확고부동한 신념을 갖고 있다면찬송가 역시 또 다른 정적인 감동을 주는 찬양임을 인정해 주어야 하는 데 언제부터인지 우리 교회들마다 옛 전통적인 정적인 신앙적 행위는 촌스러운 것갱신되어야 하는 옛 구습 등등으로 치부해 버리는 아주 잘못된 성향이 자리매김을 한 아픔이 있어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차제에 본문을 기초로 한 메시지를 전하면서 이런 잘못된 방향성을 올곧게 다시 설정해 보고자 합니다.

다시 14절을 주목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14절에서 이렇게 직설했습니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그렇습니다.

가만히 서서

신앙(信仰)이란 무엇인가?

즉 믿고 우러러 본다는 말이 무엇인가?

그것은 신앙의 주체에게 가만히 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출애굽기 3: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던 시내 산에서 가시떨기나무의 충격적 환상을 보고 그 떨기나무 쪽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리신 명령입니다.

주님이 급하게 명하신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가시떨기나무 근처로 가까이 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역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도리어 가까이 하지 말고 먼저 행하여야 할 것은 네 신을 벗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신앙은 신앙의 객체가 절대적인 주체와 거룩한 간극을 갖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주체와 객체는 바라보아야 한다는 영적 행위를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님과의 거리 간극이 존재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수아 3: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 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너무나 잘 아는 요단 강 도하를 위해 행군할 때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지켜야 할 행군도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입니다.

주목해서 보아야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르는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회중의 거리입니다.

2,000 규빗 즉 1KM입니다.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구약학자 트랜트 버틀러는 본인의 여호수아 주석에서 2,000 규빗을 아주 의미 있게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그 실질적인 거리가 의미심장한데 곧 목축의 거리다그러한 먼 거리는 길을 발견하려고 법궤를 따라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곧 거룩하심으로의 하나님과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WBC 주석, “7: 여호수아”,p,124.)

저는 버틀러 교수의 주석을 보다가 아주 귀한 영적 교훈에 도달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목자장 되시는 주님의 선하신 뜻을 올바로 이해하며 신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이 나를 다스릴 수 있는 목축의 거리를 띄어야 한다는 은혜 말입니다.

그 거리의 간격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목축하심에 가만히 서서’ 그 분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엘리후가 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이 강한 압박을 전제하면서 엘리후가 말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15-20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 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 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 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그대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삼켜지기를 바랄 자가 어디 있으랴

이 구절을 오늘의 용어로 바꾸어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의 통치를 가만히 서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시적인 표현이 많이 들어가 있는 표현이지만 묶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피조세계를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알려주시고 깨닫게 하는 교훈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1-24절을 연속해서 읽겠습니다.

그런즉 바람이 불어 하늘이 말끔하게 되었을 때 그 밝은 빛을 아무도 볼 수 없느니라 북쪽에서는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저는 이 구절을 음미하다가 이 구절이 신약성경 로마서 1:19-20절이 생각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의 로마서 1:19-20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저와 여러 교우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는 어는 곳을 보든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죄 때문에 눈이 가려져서 그것을 보지 못하고우리들의 귀가 둔하여져서 듣지 못하는 것뿐이지 주님은 창세로부터 지금 까지 당신이 만드신 피조 세계들을 통하여 계속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 예배 시간에 읽었던 이사야 59:1-2절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아마도 엘리후는 본인의 영적 소견으로 욥이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이제라도 다시 가만히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이 뜻을 깨달아 알라는 메시지를 본문에 남기고 있습니다.

물론 엘리후의 이런 압박은 다음 장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등장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이 직접 욥에게 하시는 말씀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인 빈곤함이 여실히 나타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후 개인이 피력하고 있는 피조 세계를 통해 일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입장 대변이라는 차원에서 저는 최선의 변증이라는 데에 토를 달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 81번째 강해를 통해 교우들과 나누고 싶은 테마는 욥에 대한 엘리후의 논증이 얼마만큼 정확한가에 대한 시비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제 설교의 팩트는 이 시비를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 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듣기 위해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들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가 오늘 제 설교의 레마입니다.

 

※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려면 내 소리를 멈추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 그대로 가만히 서야 합니다.

가만히 서서라는 메시지는 내가 내지르는 말소리를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목청을 돋으며핏대를 올리는 내 소리를 죽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내 이성의 판단내 자아의 욕구내가 잡고 있는 육신의 톤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12-14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홍해 앞에 도착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아비규환을 잠재운 모세의 영적 리더십의 단면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위해 싸워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시고애굽의 군사들은 수장시키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 일하심을 볼 수 있는 전제가 있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무엇을 가만히 있어야 했습니까?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 소리는 무슨 소리였습니까?

내 소리였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이성의 소리였습니다.

내가 믿고 신뢰하는 보이는 것에 대한 아우성이자 소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전제는 이것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리를 침 튀기며 내 뱉는 한하나님이 일하시는 오묘한 은혜와 섭리를 볼 수 없습니다.

지난 토요일이었습니다.

교회 정원에서 내려다보이는 복개천(復改川노래자랑마당이 펼쳐졌습니다.

거의 하루 종일 교회 근처에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코로나 19 사태에 지쳐 있는 지역민들을 위한 위로 공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토요일 하루 종일 위로가 아니라 극한 피로를 더하는 소음에 시달렸습니다.

소리라고 다 소리가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어떤 때는 잠시 분주하게 소리치는 아우성을 접고 가만히 주님의 말씀이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내 소리를 멈추어야 합니다.

아주 오래 전백주년 기념교회를 섬기는 이재철 목사가 집필한 회복의 신앙에서 개인적으로 큰 공명을 주었던 글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 목사께서 제네바 한인교회를 섬길 때 경험했던 일화입니다.

제네바 한인교회는 100년이 넘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오비브(Eaux-vives) 교회의 예배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는데현재 그들의 교회는 이삼십 명 정도 밖에는 모이지를 않는 초라한 교회가 되었음을 보고합니다.

매주 월요일 몇 분이 모여 프랑스어로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을 알고 이 목사께서 이 성경공부를 참관하게 되었습니다.

가보니 몇 분의 노인들이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시험받으심의 장면을 나누며 공부하고 있었다그 중에 한 노인이 순서가 되어 본인의 성경 나눔을 다음과 같이 역설합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을 때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을 때나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의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했을 때예수님은 그 유혹들을 말씀으로 물리치셨다여러분도 잘 알다시피우리에게 유혹이 엄습할 때가 있다그 때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야한다말씀은 명료하다명료하지 않은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말씀 안에 빛이 있고 길이 있다.”(이재철, “회복의 신앙”,홍성사.p,96.)

저는 이 글을 제 두 번째 저서인 김기석 목사 글 톺아보기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글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책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잠시 머무는 삶은 金科玉條(금과옥조)에 견주는 성찰이다.”(이강덕, “김기석 글 톺아보기”, 동연, p,164.)

 

결론)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의 음성에서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새겨들어야 하는 교훈을 남겨놓았습니다.

최근 들어 수많은 하나님의 대변자가 하나님과 성경을 건강과 성공과 부의 보증 수표로 이용할 수 있는 길들을 제시해 왔다이로 인해 성경은 성공적 삶의 규범이자 방법론 서적으로 간주되었다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경제적으로 번창 하고암이나 심지어 감기에도 걸리지 않으며 교회가 절대로 분열되는 일도 없고성공하는 사역과 프로그램도 끊이지 않는다고 가르친다.”(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음성”,IVP,p,267.)

성경을 이렇게 싸구려 서적으로 변질시킨 시대가 오늘입니다.

이 소리 때문에 하나님의 진짜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우리가 잘 부르는 찬양 중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난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난 중에 우리의 힘과 도움이시라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영광과 세계 가운데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이 찬양의 가사가 은혜로 다가오는 이유는 후렴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가짜 소음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비극을 맛보는 시대 한 복판에 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 알지어다

오늘 본문 14절도 함께 나눕시다.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