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13일 수요 예배 설교 (욥기 79번째 강해) 본문: 욥기 36:17-33 제목: 엘리후의 신학 서론) 월요일에 나사렛 신문사에서 우리 교회 탐방을 나왔습니다. 6월호 나사렛 성결 신문에 우리 교회를 기사화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온 관계자들이 저에게 몇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목사님의 목회 방향성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지면에 제한이 있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요약해서 전했습니다. ① 사도행전적인 역동이 오늘도 나타나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그 나라에 맞는 삶을 살아내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③ 캐리그마(십자가의 도) 신학을 사수하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말씀을 통해 교우들과 이미 나눈 메시지를 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지역 교회마다 그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성은 담임목회자가 어떤 신학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너무 당연한 일이고 처사입니다. 그러기에 한 교회를 목회하는 목회자가 얼마나 정상적인 환경에서 자라났고, 얼마나 정상적인 신학을 공부했으며, 얼마나 정상적이고 지속적인 영성 훈련을 받으며 성장했느냐는 그 교회가 어떤 색깔을 갖고 질적, 양적 성장을 하는가에 지침이 되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학의 기초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어떠한 외장적인 변화를 가미한다고 하더라도 내구성이 강한 구조물이 되기 어렵다.”(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공저, “20세기 신학”,IVP,p,14.) 캐나다 리젠트 칼리지의 조직신학 교수인 스탠리 그렌즈 교수의 말을 그래서 참 적절합니다. 그렇습니다. 신학이라는 것은 한 개인이나 목회자가 정상적인 신앙을 갖고 강한 구조물과 같은 교회를 만들도록 만들어주는 결정적인 관건입니다. 이게 어디 목사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모든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도, 그렇지 않은 평신도도 신학의 기초 위에 서야 하는 것이 대동소이합니다. 평신도 역시 목회를 통해 배운 신학의 기초에 따라 신앙의 형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신학은 본인의 신앙적 토대가 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엘리후도 그만이 갖고 있는 신학이 있었습니다. 오늘 수요 설교는 엘리후만이 갖고 있었던 그의 신학이라는 메시지를 함께 공유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적어도 엘리후는 초반에 욥에게 임한 벌은 인과응보의 성격보다는 연단의 내용이 더 많다는 쪽으로 접근했지만 후반에 가서 다시 세 친구들이 말했던 인과응보 쪽으로 기울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본문 17절을 나누어 봅니다. “이제는 악인의 받을 벌이 그대에게 가득하였고 심판과 정의가 그대를 잡았나니” 분명 인과응보라는 내용으로 엘리후도 결론을 맺는 듯합니다. 물론 저는 이들이 몰고 가는 형태를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인과응보의 결과물로 욥에게 임한 심판을 해석한 엘리후는 몇 가지 주목할 내용의 본인이 갖고 있는 신학적인 주장을 내놓습니다. 1) 죄성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18-21절 본문을 읽겠습니다. “그대는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많은 뇌물이 그대를 그릇된 길로 가게 할까 조심하라 그대의 부르짖음이나 그대의 능력이 어찌 능히 그대가 곤고한 가운데에서 그대를 유익하게 하겠느냐 그대는 밤을 사모하지 말라 인생들이 밤에 그들이 있는 곳에서 끌려가리라 삼가 악으로 치우치지 말라 그대가 환난보다 이것을 택하였느니라” 엘리후가 외친 이 말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정리한다면 내가 죄인의 자리에 언제나 있으려는 죄성이 있음을 인정하라는 말이 됩니다. 분노하는 내 모습이 그렇습니다. 무언가 유익을 위해서 뇌물을 바치는 행위가 그렇습니다. 어둠(밤)을 좋아하는 경향이 그렇습니다. 악의 자리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죄성에 사로잡힌바 된 존재이기에 언제나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의 이런 죄성에 대한 성향이 자기를 괴롭혔다는 고백을 합니다. 로마서 7:18-21절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누구도 바울의 이 고백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죄성입니다. 어떤 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들이 이런 죄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차라리 이 죄성에 순응하며 사는 게 더 지혜롭다고. 물론입니다. 무신론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차라리 속편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무지를 안고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죄성은 내가 어찌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그리스도인들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과 같이 그렇다고 막 살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다. 그 죄성을 통제하는 것이 내가 아니고 성령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임을 알기에 말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으면 언제나 우리는 죄성을 이길 수 있습니다. 로마서 8:1-2절이 이것을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죄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성령께 내 삶을 의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내 맘 대로, 의지대로 죄성일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솔직히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성령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죄성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방법입니다. 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또 다른 죄의 자리에 앉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러지 마십시다. 죄성을 인정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인정해야 성령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되며 주님이 그때부터 일하십니다. 지금 코로나 19의 재 확산의 온상지인 게이 바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은 일을 자행하는 집단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일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숨기고 숨으려고 합니다. 코로나 19로 질병을 앓는 것이 본인이 게이라는 정체가 알려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숨고 있습니다. 죄성이라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원죄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감춘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받은 자들은 이 죄성에서 놓임을 받는데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성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성은 내가 인위적으로 어떻게 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성령의 힘으로 죄악의 성향으로 인해 얼마든지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죄의 내용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이 슬퍼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후가 가지고 있었던 신학을 오늘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죄성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연약성을 고백하는 것이 은혜를 받게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죄성을 인정하는 자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셔서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렇게 주님께 서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만이 나의 절대적인 주군이심을 분명히 인식합니다. 본문 22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높이 계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과 견줄 존재가 없다는 단호한 선언입니다. 누가 감히 하나님과 겨눌 수 있는 권능을 갖고 있을 수 있겠는가를 엘리후는 묻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이 구절 즉 22절을 구약성경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는 맛소라 텍스트에 가장 가깝게 번역을 하면 이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권능으로 높이 계시나니 누가 그와 같은 선생일 수 있겠느냐?”(권지성, “욥기 특강”,IVP,p,258)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나를 주인으로 신뢰하던 태도를 하나님만이 내가 신뢰할 주인으로 터닝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밖에는 내가 의지한 존재가 없다는 것을 동의하였기 때문에 ‘나’라는 중심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 중심으로 내 삶을 의탁하는 결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순간 나는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것입니다. 이번 주간에 백석대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셨던 류호준 박사가 쓴 ‘교회에게 하고픈 말’을을 읽고 있습니다. 류 박사는 책의 앞부분에서 이런 아픔을 토로합니다. 한국교회가 뼈아프게 통감하고 돌이켜야 하는 신앙풍조를 ‘자기중심적 신앙’이라고 질책합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현대인들은 철저하게 ‘나는-나의-나를’(I-MY-ME)이 중심이 되는 ‘미-제너레이션’(Me-Generation)입니다.”(류호준, “교회에게 하고픈 말”,두란노,p,18) 이런 자들의 기가 막힌 신앙의 행태를 이렇게 고발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가 내게 무엇을 해 주신다는 겁니까? 교회에 나오라 하셨으니 나가는 보겠는데, 교회는 나를 위해 무엇을 제공합니까?”(같은 책, p,20) 이런 기막힘 요구를 기저에 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뼛속까지 나’라는 아주 틀려도 한참 틀린 신앙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앙이 왜 틀렸습니까? 앞서 말한 그대로입니다. 주님 외에 그 어떤 존재도 주님과 같은 권능을 갖고 있는 존재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인데 이들은 주님보다도 더 큰 권능을 가진 존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데 그 존재가 바로 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 말고는 ‘주’라 호칭할 존재가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런 고백은 엘리후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들은 절절히 이렇게 고백합니다. 대표적인 시를 하나 소개합니다. 시편 73:25-28절을 읽겠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그 유명한 아삽의 노래이자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주 외에 누가 내 옆에 있습니까?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주이시며, 나의 피난처임을 명심하고 그 분에게만 내 삶을 맡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망각이 아닌 기억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라. 본문 24-25절을 보겠습니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 그의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나니 먼 데서도 보느니라” 경배의 대상이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그 분을 기억하고 높여드려야 합니다. 결코 그 분의 일하심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 분께 경배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몫입니다. 가까이 있는 자, 멀리 있는 상관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경배해야 합니다. 왜? 그 분이 나를 위해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 경배하며 예배하지 않습니까? 배은망덕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행위가 무엇입니까? 은혜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게 이렇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각인하셨습니다. 신명기 25:17-1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기억하라’와 ‘잊지 말라’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하는 자는 잊지 않고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자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배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극과 극입니다. 그 차이는 기억하고 망각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무엇입니까? 본문 26-33절을 마저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가 물방울을 가늘게 하시며 빗방울이 증발하여 안개가 되게 하시도다 그것이 구름에서 내려 많은 사람에게 쏟아지느니라 겹겹이 쌓인 구름과 그의 장막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 보라 그가 번갯불을 자기의 사면에 펼치시며 바다 밑까지 비치시고 이런 것들로 만민을 심판하시며 음식을 풍성하게 주시느니라 그가 번갯불을 손바닥 안에 넣으시고 그가 번갯불을 명령하사 과녁을 치시도다 그의 우레가 다가오는 풍우를 알려 주니 가축들도 그 다가옴을 아느니라” 자연을 다스려 주시는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자연을 통제하는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왜 하십니까? 31절만 다시 읽습니다. “이런 것들로 만민을 심판하시며 음식을 풍성하게 주시느니라”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택한 백성들을 먹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말고 기억하여 예배를 드려야하는 이유 중에 이것 말고 더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사석에서 친구 목사가 참다 참다 못해 한 마디를 했습니다. “교회는 두 달 동안 교우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전무했던 온라인 시스템으로 예배를 드렸다. 또한 교우들을 케어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난 연휴가 이어진 주일에 교우들에게 안부를 묻기 위해 전화심방을 했다. 얼떨결에 받은 교우 한 명이 휴가지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순간, 뭔가 욱하는 것이 올라왔다.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혹시나 모를 교우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 뒤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해서 예배를 드리고 그를 위해 기도를 드렸는데 온라인 예배마저도 무시하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워 교회 근처는 한 발자국도 오지 않는 인간들이 자기들이 가고 싶은 데는 다 간다.”고.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왠지 친구의 열변에 마음이 쨘! 해졌습니다. 왜? 제가 할 말을 친구가 대변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배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망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들을 위해 아들을 주셨습니다. 친히 인간이 되시기도 했습니다. 죄에 대한 삯을 지불하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 행위와 일하심은 곧 공의와 사랑이라는 두 개의 속성을 동시에 맞추신 것입니다. 하나남께 예배하는 이유는 그 분이 창조하신 것들을 동원하여 우리를 돌보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예배를 망각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잊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자를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배은망덕한 자라고.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엘리후는 애증의 대상입니다. 전적으로 지지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엘리후가 갖고 있었던 그만의 신학은 우리가 아무리 욥을 좋아하는 태도로 학습되고 굳어져 있어도 한 번 즈음 아멘 해야 하는 신학입니다. 그래야 공평합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 지체들도 죄성을 인정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에만 서기를 바라고, 하나님만이 나의 주군임을 다시 인식하고, 더불어 그 분의 일하심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을 잊지 말고 예배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