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6일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욥기 70번째 강해) 본문: 욥기 33:1-13 제목: 그래도 묻는 자가 되자. 서론) 전무했던 재앙이 덮친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전무했던 온라인 예배로 수요 예배를 드리는 지금 이 시간, 오만가지의 상념이 스쳐지나갑니다. 그리고 기도해 봅니다. 하나님, 이 땅을 고쳐 주옵소서! 본문 13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본문 구절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마주치고 있는 무시무시한 일들을 목도하면서 어찌 보면 하나님과 맞서려던 자들이 당하고 있는 처절한 패배는 아닐까 하는 소회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게 속수무책 당하는 인간의 나약함은 결국은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과 맞서려는 교만함의 결과는 아닐까 하는 무력함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창세기 11:4절을 소개합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바벨탑 건설의 타당성의 근거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근거가 아닌 인간의 근거 말입니다. 바벨탑 건설의 주된 이유는 ‘우리의 이름을 내고’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벨탑 축성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가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 중에 주목할 단어가 ‘호모 데우스’입니다. 굳이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인간을 신으로’ 혹은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 정도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할리우드 스타인 안젤리나 졸리가 2013년 건강한 두 유방을 잘라 냈답니다. 유전자 조사 결과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7%라는 컴퓨터의 알고리즘의 조언을 받아들인 사례로, 상당한 위험을 무릅쓴 수술이었다고 하지요”(김용규, “그리스도인은 왜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IVP,p,82.) 무슨 말입니까? 인간은 자기들이 만든 컴퓨터 데이터를 하나님이 만든 인간의 신체 구조를 뛰어넘는 존재로 인식하였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만든 즉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어 버린 ‘호모 데우스’로 만들었다는 아주 적절한 실례입니다. 그런데 이런 실례가 던져주는 찝찝함이 있습니다. 왠지 개운치 못한 여운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어떤 면일까요? 오늘 설교 제목으로 적용한다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질문을 통한 존중이 아닌 맞섬의 구도로 인간의 지식이 사용된다는 우려입니다. 바벨탑 사건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우리의 이름을 내고’ 인 셈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자기의 이름을 내세우려는 자를 고발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신앙적 삶을 살아내는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 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욥기 서 안에 등장하는 제 5의 인물 엘리후의 변증이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텍스트입니다. 이미 앞선 강해에서 말씀드린 대로 엘리후는 욥과 그의 세 친구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지켜보다가 더 이상 네 사람이 맞붙은 공격과 반론에 대하여 침묵할 수 없어 나이는 어리지만 자기가 이 논쟁에 대한 종지부를 찍어야겠다는 사명의식을 나서게 되었음을 32장에서 밝혔고, 오늘 본문부터는 그 내용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 2-7절을 읽겠습니다. “내 입을 여니 내 혀가 입에서 말하는구나 내 마음의 정직함이 곧 내 말이며 내 입술이 아는 바가 진실을 말하느니라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그대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그대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는 그대를 누르지 못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엘리후는 이렇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네 사람의 논쟁에 대하여 더 이상은 침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진실을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운(네솨마)이 나에게 강하게 임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비록 욥과 친구들이 연장자이지만 이제는 내 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논쟁에 끼어드는 자로서의 비장함까지 여겨지는 대목이 보입니다. 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대가 할 수 있거든 일어서서 내게 대답하고 내 앞에 진술하라” 어떤 의미로 보면 임전무퇴의 각오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이 정도의 중무장을 하고 욥에게 맞서기를 자청한 엘리후의 첫 번째 일성을 본문 8-13절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대는 실로 내가 듣는 데서 말하였고 나는 그대의 말소리를 들었느니라 이르기를 나는 깨끗하여 악인이 아니며 순전하고 불의도 없거늘 참으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잘못을 찾으시며 나를 자기의 원수로 여기사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고 나의 모든 길을 감시하신다 하였느니라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이 구절을 오늘의 언어로 재구성하면 이렇게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죄가 없고. 죄에 대하여 결백하며, 깨끗하다고 항변했다고 술회합니다. 뿐만 아니라 욥은 이렇게 자기는 무죄한데 하나님이 자기를 감시하고, 무시해서 자신에게 죄를 덮어씌웠고 그로 인해 이런 엄청난 고난을 억울하게 자기에게 안겨준 존재라고 해석했다고 평가합니다. 아주 냉정하게 인간적인 시각을 보면 엘리후의 말이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과연 임전무퇴의 각오로 이 싸움에 들어선 자의 결기로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3-31장까지 기록된 욥과 세 친구들의 공방을 깊여 들여다보면 제 해석은 엘리후의 도발에 대하여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해석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맞습니다. 또 어느 한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 나는 억울하다고 항변하는 장면도 많이 등장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욥이 이렇게 행동한 팩트를 깊이 해석하다보면 엘리후의 주장에 손을 들어줄 수 없는 부분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욥을 두둔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엘리후가 말한 대로 욥이 하나님께 행함 맞섬에 대한 재해석으로 말입니다. 재 강조하지만 욥이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께 맞서고 대든 것은 자기가 결백하고 순전한 완전한 자임을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에게 임한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는 교제의 요청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등 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과 더 깊은 소통을 기대한다는 아주 마땅히 질문이자, 권리 행사의 영역이었다고 저는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의로운 존재라고 강변했다고 보았지만 저는 오히려 욥이 하나님께 질문했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욥의 세 친구들은 신정론적인 신학을 들고 나와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옳은 분이기에 욥은 분명히 죄를 지었다고 공격했음을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이런 공격은 욥을 빠져나갈 구석이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고 그 결과 도리어 하나님을 비정한 하나님으로 각인시키게 하는 자충수를 둔 꼴이 되었습니다. 엘리후도 역시 이 관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본문 12-13절을 봅니다.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이 문장에 대하여 과연 반론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사람보다 크시다는 것에 반기를 들 만한 사람이 무신론자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과 논쟁해서 이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마도 이 문장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면 이단아가 되든지 아니면 신앙이 없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저 역시 12-13절에 대하여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한 가지는 집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을 불신앙의 이름으로 봉쇄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캐나다에 소재한 리디머 대학교 종교학 교수인 크레이그 바르돌로뮤 교수가 쓴 책 제목 이름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를 들라” 너무 마땅한 사이다 발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맹목이나 아니면 광신으로 몰고 가는 결정적인 통로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실수가 없으시며 언제나 정답이니까 무조건 ‘아멘’ 하라는 종용입니다. 다시 말해 질문 봉쇄입니다.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이론으로나 신앙의 차원에서 해석이 불가능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포장하여 그 사람에게 채근하기 십상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 에요. 믿음으로 이기세요. 이 일에 대하여 흔들리면 신앙이 없는 사람이 에요. 그건 사단이 노리는 속셈이 에요.” 그런데 이런 발언은 경우에 따라 강철대오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종용하는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내게 똑같은 일이 일어나면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따질 거면서, 타인에게는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그런 폭력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적어도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에 대하여 질문을 봉쇄하고, 무조건 ‘믿습니다.’를 압박하는 그런 비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질문해야 합니까? 질문하면 하나님께서 일일이 대답해 주시기 때문입니까? 제 경험상 하나님은 그렇게 일일이 내 질문에 대하여 음성으로 철저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질문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대 기독교학과 양명수 교수가 쓴 “욥이 말하다, 고난과 신비의 이야기‘를 읽다가 깊은 감동을 받은 대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요, 신비가 아니던가, 다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으며, 알아 가며, 믿어 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 믿음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믿음은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재앙과 고난에 담긴 하나님의 뜻, 다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을 그대로 안고 믿음의 순례는 계속하는 것이다. 아마도 욥은 오랜 논쟁과 물음과 명상 후에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지 모른다.”(p,200)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서 질문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징벌하려고 하는 하나님을 돌이키기 위해 질문하였습니다. 하바국은 유다를 심판하려고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려던 바벨론에 대한 사용하심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해야 하는 사역이 너무 힘들어 하나님께 더 이상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가를 물었습니다. 주님도 겟세마네에서 이 잔을 옮길 수 없겠냐고 하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절대이신 존재이시지만 인간에 대하여는 상대적인 존재이심을. 그러므로 설교자인 저는 본문 13절을 이렇게 부연하며 역발상의 은혜를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으신다 하여 어찌 하나님과 논쟁하겠느냐” 하나님께 논쟁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맞서겠다는 결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는 믿음의 행위라고. 어제 DPA 포럼을 다녀왔습니다. 이사 목사님들과 작금의 코로나 바이러스 19 사태에 대한 여러 가지 난처함을 토로하며 가장 지혜로운 지역 교회 목사로서의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돌아오는 주일 예배에 대한 나름의 공통분모에 대하여 의견을 같이 했습니다. 이원화 예배입니다. 인터넷 이용이 쉽지 않은 연로한 교우들은 오프라인 예배로, 가능한 연령층의 교우들은 온라인 예배로 이원화 예배를 드리자는 절충안이었습니다. 작금의 사태는 전무한 일이기에 교회가 갖고 있는 매뉴얼이 없어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지만 신학적인 설명을 위한 매뉴얼을 만들고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그렇게 예배를 드리자는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함께 모인 목사님들이 이렇게 논의를 마치면서 이런 사족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 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에 게으르지 말자.” 본문을 보면서 엘리후는 욥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하지만 이미 그에게 더 이상 변명하지 말라는 봉쇄 책을 내놓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하나님께 질문하는 신앙은 건강한 신앙입니다. 그 질문이 저와 여러분에게 스스로 성장하게 하는 또 다른 영적 유익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제 재의 수요일 예배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제 공중파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송을 마친 ‘낭만닥터 김사부2’의 최종회를 보면서 엔딩 멘트에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사는 지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마.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의 낭만도 끝이 나는 거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으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끝이 난다고 저도 패러디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왜 믿는지 무엇 때문에 믿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내가 지금 건강한 신앙의 노정에 있다는 증거이자 정체성입니다. 하나님께 질문하십시다. 제가 코로나 사태에 직면하면서 계속 되뇌는 말씀은 야고보서 1: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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