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12:14-17
제목: 대강절 살아내기 (1)
서론)
예레미야 36장으로 교우들을 초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들려주었던 신탁을 예레미야가 서기관 바룩을 불러 말해주며 두루마리에 빠짐없이 받아 적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바룩은 두루마리에 예레미야가 들려준 신탁을 빠짐없이 적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던 예레미야는 자신이 자유롭지 못한 이유로 불러준 신탁을 성전에 모인 자들에게 들려주라고 명하자 바룩은 기록한 신탁을 들고 성전으로 가서 성전 지도자들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마침 그 자리에서 예레미야의 신탁을 들었던 미가야가 왕궁으로 내려가 왕궁 예언자들에게 신탁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자, 왕정에 녹을 먹고 있었던 고관들은 바룩에게 두루마리 신탁을 직접 갖고 와서 읽으라고 압박합니다.
바룩이 그들의 요구대로 신탁을 읽자 신탁을 다 듣고 난 왕궁 고관들은 예레미야와 바룩을 별도로 피신하라고 말한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 것을 강요합니다.
고관들이 왕궁으로 들어가 여호야김에게 예레미야의 신탁의 이야기를 하자 왕은 여후디에게 두루마리를 갖고 오게 하고 그것을 읽게 합니다.
가뜩이나 주변 정세로 인해 민감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여호야김은 두루마리에 적힌 예레미야의 신탁을 듣자마자 그 두루마리를 소도(小刀)로 잘라 화롯불에 태워버립니다.
소도는 서기관들이 글을 쓸 때 쓰는 갈대 촉을 날카롭게 하거나 파피루스 판을 자를 때 쓰는 작은 칼을 의미하는데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는 용도로 쓰인 칼을 이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르는 도구로 사용하는 악을 자행합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여호야김은 잘라진 두루마리 하나님 말씀을 화롯불에 태우기까지 합니다.
여호야김이 왜 이토록 하나님의 신탁을 능멸했을까요?
예레미야 36:30-31절이 그 답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여호야김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에게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가 없게 될 것이요 그의 시체는 버림을 당하여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 또 내가 그와 그의 자손과 신하들을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할 것이라 내가 일찍이 그들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 그 모든 재난을 내리리라 선포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신탁에는 다윗왕조의 멸망과 심판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본인에게는 凶 예언이었기 때문입니다.
한희철 목사는 예레미야 36장의 이 텍스트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글로 주석했는데 의미가 있어 소개합니다.
“말씀을 들으며 찢어야 했던 것은 여호야김의 옷과 마음이었다. 하지만 여호야김은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기록하기 위해 사용했던 칼로 말씀을 난도질하며 찢었다. 정작 말씀을 들으며 불태워야 할 것은 말씀 듣는 이의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여호야김은 말씀을 불태웠다.” (한희철,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248)
새겨야할 금언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최대의 약점 중에 하나는 누군가가 이야기를 할 때 쓴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저나, 듣고 있는 여러분이나 이 일에 대해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다만 신앙적 영성이나, 학문적인 지성을 갖고 있는 자들은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지 이 부분에 있어서 초월을 하거나, 완전한 사람은 단언하건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런데 참 곤란하고 힘든 것은 우리가 듣고 믿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대단히 단호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울질의 대상이 아니라, 듣고 지켜야 하는 원리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대강절 첫 주인 오늘 주일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생각으로 도려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태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다시 예레미야를 불러 불 태워진 말씀을 두루마리에 쓰라고 하명하십니다.
예레미야 36:27-28절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왕이 두루마리와 바룩이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기록한 말씀을 불사른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다시 다른 두루마리를 가지고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기록하고”
나는 오늘 레마를 여러분의 심령에 있는 두루마리에 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저는 오늘 본문을 14-17절까지로 제한했지만, 본문의 교훈은 히브리서 마지막 장 마지막 절까지 그 맥이 이어지는 내용임을 전제합니다.
전체적인 주제는 히브리서 저자가 수신자들에게 경고하는 멘트의 성격이 강한 내용들로서 1:1-12:13절까지의 권면을 길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권고의 말씀을 거절하고 배교하려는 자들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선포하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 내용은 우리가 대강절 4주 동안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지켜가야 할 신앙의 행동강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대강절 기간 동안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평화를 만들어내는 삶입니다.
본문 14절을 읽겠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제일 먼저 주목할 것은 ‘화평함’이라는 단어입니다.
‘화평함’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에이레네’는 문자적인 의미만을 적용한다면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저자가 왜 화평함을 따르라고 했을까요?
본문 배경을 추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작성된 시기는 주후 60년대이고, 지역적 배경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근교일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세계사적인 해석으로 볼 때, 주전 27년부터 주후 180년까지 약 2세기 동안, 로마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였다고 자평합니다.
로마라는 제국이 통치하던 일체의 영토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기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를 지칭하여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팍스 로마나’라고 한다면 다른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가짜 평화’입니다.
로마라는 막강한 군사력, 공권적인 물리력으로 반대 세력을 짓밟고, 대항하지 않는 자들에게만 빵과 서커스를 제공하였던 위장된 평화 혹은 가공된 평화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가 작성될 때가 이런 가공된 정치적 평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였기에 ‘평화’라는 단어에 대해 수신자들은 익숙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가짜 평화’, ‘만들어진 가공된 평화’인데도 그것이 진짜 평화인양 세뇌되던 시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렇게 인위적으로 가공된 ‘전쟁이 없는 상태’에 살고 있었던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충분히 ‘팍스 로마나’에 길들여져 있는 시대였기에 평화라는 단어를 저자가 사용한 듯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저자에 의해 언급된 평화는 가짜 평화를 말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14절 후반절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추구하고 따르고 쫓아야 하는 화평함의 주인공이 되어야 주를 볼 수 있다고 저자는 강하게 역설합니다.
환언한다면 저자가 수신자들에게 강조하는 화평함은 주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화평함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8-20절에서 이렇게 강변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무슨 말입니까?
사람에게 주어지는 화목하게 하는 화평함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할 때 만 주어지는 선물과도 같은 것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화평함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인위적으로나, 혹은 물질적인 그 무언가를 투입해서 가공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주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연히 친구 목사에게 본인이 섬기는 내년도 교회의 표어를 ‘다시 연결되는 교회’라고 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표어의 기저에는 코로나 19로 인해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 사람에게서 끊어진 관계의 줄을 다시 연결하는 교회가 되자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탁월한 의미의 교회 표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4주 동안의 대강절 시즌 동안,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면 제일 먼저 선포하실 ‘에이레네’의 화평함을 실천하기 위해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일체의 것들을 회복해 나아가는 peacemaker 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거룩함을 상실하지 않는 삶입니다.
다시 14절을 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화평함’과 함께 병행하는 단어 ‘거룩함’이라고 번역된 ‘하기아스모스’의 의미는 철저하게 영적이며, 종교적인 그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서학자가 ‘하기오스’에 도달한 성도를 ‘성화에 이른 자’라고까지 해석한 것을 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의미를 극대화시키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기아스모스’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신학적 의미는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이 단어에 담긴 신학적 의미는 ‘분리’ 혹은 ‘구별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결코 인간이 정치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거룩한 상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도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구별된 분리함을 통해 하나님이 맡겨주신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을 때 도달하는 거룩함의 상태입니다.
저는 특히 ‘구별됨’이라는 단어에 천착하고 싶습니다.
이 구별됨을 실천하는 자가 영적인 거룩함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적용하고 싶은 성경적 내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로 태어난 걸인을 일어나 걷게 하는 기적을 베풀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들썩이기 시작했음을 보고합니다.
도대체 이 사람을 일으켜 세운 자가 누구인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수소문 끝에 베드로와 요한인 것을 알아낸 산헤드린의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의 신병을 확보해 공회로 소환합니다,
더불어 이런 일을 누구의 이름으로, 무슨 권세로 행했는가를 추궁하는 궁색하기 짝이 없는 해프닝을 벌입니다.
유대 종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그들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적 권력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능력을 잠재우려는 폭력에 두 사람은 기죽지 않고 본인들이 이룬 일에 대하여 담대하게 증언합니다.
사도행전 4:8-12절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한 구별 됨입니다.
세속적 권위에 물러서지 않는 담대함입니다.
베드로의 이 어마어마한 구별된 거룩함을 보았던 종교지도자들의 독백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사도행전 4:14절입니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세속적 권위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거룩한 구별됨을 살았던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 4:19-20절은 감동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이 주는 권위를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보게 됩니다.
지난 주간, 사랑의 교회 안성 수양관에서 머물며 내년 목회 계획을 세우며 기도했습니다.
기도원에 갈 때 꼭 경유하는 곳이 고 옥한흠 목사의 묘소입니다.
이번에도 산책하며 들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 은보 옥한흠 목사 여기에 잠들다.”
묘비명을 보고 있노라니까 그 분이 남기신 촌철살인들이 또 다시 내 심장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故 옥한흠 목사의 유고집인 ‘목사가 목사에게’ 속에 담겨 있는 글들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글들을 다시 새겨보았는데 그 어느 것 하나, 부드럽고, 온화하고, 따뜻하게 다가오는 메시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역하는 대상은 성전 마당만 밟는 사람, 손에 피가 성한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들, 겉은 번지르르하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들, 바로 이들을 놓고 목회하는 것입니다.”
이 사자후는 사정이 이런데 어찌 목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조명을 받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로 들렸습니다.
“교역자들이 사역하는 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권위주의를 대변하는 말이 아니라 목사로 사역하면서 가장 얼굴 팔리는 것은 영성의 부재로 인해, 지성의 얄팍함으로 인해 성도들로부터 깔봄을 당하는 것인데 어찌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있단 말인가로 들렸습니다.
“전문직의 약점은 자기 기술을 팔아먹는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직업적으로 설교하는 목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설교를 통해 예수를 파는 장사꾼이 되지 말고 주존감으로 무장한 사명자가 되라는 비수로 들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눈물이 없다면 목사로서 이미 변질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복기시킨 눈물의 목회만이 목회라는 천둥소리로 들었습니다.
“은혜 없이, 감격 없이 목회를 한다는 것은 1급사기나 다름없습니다. 사실 목회자만큼 위선자가 되기 쉬운 직업도 없습니다. 목회자만큼 위선자가 될 확률이 높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위선이 악습으로 몸에 배면 양심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얼마나 무서운 벼랑 끝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얼마나 치열한 영성과 거룩함을 토대로 말씀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교훈해 주는 벼락 침으로 들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과 전 인격을 사로잡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파워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없다고 할 때 십자가의 설교를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의 이야기를 안 한다는 말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안 보이고, 살아 있는 십자가의 피가 말라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선배가 전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복음의 능력이 오늘도 나를 전율하게 합니다.
그 어느 것 하나도 부드러움과 타협함이 보이는 구석은 존재하지 않는 선배의 촌철살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것은 옥 목사의 글을 되새김질할 때마다 오는 감동이 있습니다.
목사로 살아가며 무섭도록 치열한 구별된 영성을 되새김질하라는 선배의 피 토함 속에서 나오는 세속적 그 어떤 권위도 꺾을 수 없는 거룩함을 느끼는 감동입니다.
가공된 권위가 아닌 진짜 권위 말입니다.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구별됨이며 거룩함입니다.
대강절 이런 삶을 추구하시기를 바랍니다.
3) 쓴 뿌리들과 결별입니다.
본문 15절을 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히브리서 저자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쓴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16-17절에서 두 가지의 쓴 뿌리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예로 들며 이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그것들에게서 돌아설 것을 명령합니다.
⓵ 세속적 음란함입니다.
16절 전반절입니다.
“음행하는 자”
그랜트 오스본 교수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성적인 부도덕성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교회에서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말씀 속에서 발견되는 도덕성의 기준을 지속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성적인 죄가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우리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금하신다. 어느 누구도 성적인 부도덕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랜트 오스본, “적용을 도와주는 히브리서”, 344)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을 망치게 하는 원흉 중에 하나가 음란함인 것을 저자는 갈파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주후 1세기 로마라는 대도시에 살고 있었던 자들의 방탕함과 음란함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기에 저자는 강수를 둔 것 같습니다.
이 음란함은 성적인 음란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매춘 전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일체의 것들과 교접하는 것에서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⓶ 망령됨입니다.
16절 2f-17절입니다.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 망령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주어진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경솔함입니다.
지금 이 설교문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 본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배교를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받은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에 대한 경고성 발언이 여기에도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미 2:3절과 10:26-27절에서 저자가 경고한 메시지를 공부했습니다.
히브리서 2:3절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10:26-27절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구원의 은혜를 가볍게 저버리는 자들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은혜를 저버리는 것에 대해 경고한 저자는 본문에서는 이런 행위를 ‘망령된 일’이라고 못 박기까지 합니다.
영적인 이탈의 심각성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본문에 기록된 내용을 신학적인 함의를 담아 교우들에게 전했습니다.
결국 종합해 보면 이런 결론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막혀 있는 관계를 회복함으로 화평함을 누리고, 거룩한 구별됨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살아가며, 적어도 이런 성도라는 거룩함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로서 세속적인 쓴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음행하려는 마음, 받은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천박함에서 돌아설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대강절이 시작되었습니다.
2022년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찢어지고 갈라지고 전쟁의 소문을 누가 먼저 내느냐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 땅을 치유해 주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 치유함을 통해 성도들은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고, 이 땅을 좀 먹게 하는 쓴 뿌리들이 성령의 불로 소멸시키는 대강절 기간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대강절, 우리는 至難하지만 성도로서 히브리서 저자가 역설한 이러한 삶을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그리하여 화평함을 쫓으십시오.
구별된 그리스도인으로 사십시오.
그리하여 거룩함을 추구하십시오.
음란함과 은혜를 경홀히 여기는 망령됨에서 돌아서십시오.
이렇게 살아내는 여러분들을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편 보좌에서 일어서서 응원하실 것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그 때가 하나님의 때
내 힘으로 안 될 때 빈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