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47:27-31
제목: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말라
서론)
오늘은 2022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펜데믹 3년 기간 동안, 제대로 된 추수감사주일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함께 모여 공동체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고사하고 교회 문을 닫아야 하는 감사절기도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그렇게 3년을 인내하여 온 오늘 2022년, 비록 완전체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면하여 함께 예배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을 점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 드립니다.
오늘은 히브리서 강해를 한 주 멈추고 정말 오랜만에 제목 설교를 통해 절기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금요일 저녁 시간에 직전 교회를 섬길 때 관리집사로 사역하던 집사님의 둘째 아들에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떨리는 음성으로 전화를 건 둘째의 소리를 듣는 순간, 그 동안 파킨슨 진단을 받고 서서히 육체가 쇠약해진 관리 집사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짐작하고 전화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아버지께서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시던 목사님이 생각이 나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위해 중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둘째의 목소리가 울음으로 가득 차 있어 일단 위로를 전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옛 추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참 쉽지 않았던 교회에서 그래도 뚝심을 갖고 언제나 乙의 위치에 있었기에 당해야 했던 고통을 잘 감내해 주었던 관리 집사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습니다.
아직 60대 중반이기에 충분히 더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 땅에서의 수고를 끝내야 하는 집사님의 영혼을 위해 화살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인생은 존 번연의 말대로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행 중인 게 분명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인생은 천상병 시인의 말대로 소풍중인 게 분명합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천로역정을, 소풍 기간을 잘 보내야 한다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당위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저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들에게 주어진 신앙인으로 걸어야 하는 삶의 당위를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살피고 그 노정에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최고의 감사 내용임을 교우들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본론)
요셉이 애굽의 제 2인자로 등극하여 7년 풍년을 맞이합니다.
요셉은 이 시기에 수확한 일체의 곡물들을 잘 저장하여 앞으로 임할 7년 대 흉년을 준비했습니다.
요셉의 이런 준비는 실제적인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문제는 가나안에 거주하는 요셉의 부모와 형제들이었습니다.
전혀 이런 시대의 내용을 분별할 능력이 없었던 요셉의 형제들은 속수무책으로 흉년 7년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은 버틸 여력이 없었던 야곱은 아들들을 독려하여 애굽에 가서 양식을 구해 오라는 명령을 내렸고, 형들은 살기 위해 애굽 행을 결심합니다.
양식을 구하려 내려간 애굽에서 야곱의 아들들은 본인들이 팔아넘겼던 요셉을 우여곡절 끝에 만나는 드라마와 같은 일을 경험합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형들에게 요셉은 이 모든 일의 행하심은 하나님이 바로 오늘 우리 가족들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작품임을 고지하며 불편한 관계를 떨쳐냅니다.
이후, 아직도 흉년이 끝나려면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을 안 요셉은 아버지와 형제들이 애굽으로 내려와야 함을 역설했고, 드디어 야곱은 죽은 줄만 알았던 11번째 아들 요셉을 애굽 땅에서 만나는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창세기 47장은 애굽으로 내려온 자기의 형제와 아버지를 직속상관인 바로에게 소개하는 장면이고, 소개 이후 바로가 애굽에서 좋은 땅이라고 할 수 있는 고센이 포함되어 있는 라암셋을 요셉의 가족에게 주어 거류하게 했다는 기사입니다.
이런 줄거리를 담고 있는 창세기 47장에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원리들이 기록되어 있기에 저는 오늘 교우들과 그 원리들을 추적해 보려 합니다.
47:1-3절에서 요셉은 5명의 형들을 선발하여 바로에게 소개를 합니다.
그리고 이미 형들과 약속한 시나리오대로 바로가 무슨 일을 하던 자들인가를 묻자 가나안에서 농사를 짓고 동물들을 치는 목자들임을 고합니다.
바로는 요셉의 형들에게 자기의 가축들을 돌보는 일을 하명합니다.
이윽고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에게 예우 차원으로 나이를 묻자 야곱이 이렇게 바로에게 대답합니다.
창세기 47:9절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의 답변을 떠올리면 왠지 모를 숙연함이 느껴집니다.
왜 아니 그러겠습니까?
형을 속여 장자의 권리를 빼앗았던 일, 죽음을 피해 밧단 아람으로 피신하여 살았던 20년의 세월, 살기 위해 간 그곳에서 얍삽한 외삼촌을 만나 고생했던 일, 더 이상은 밧단 아람에서 거하기가 어려워지자 탈출을 감행하다 죽을 뻔했던 위기, 얍복 강에서 자기를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에서의 살해 위기를 하나님과의 씨름으로 인해 간신히 넘겼던 일, 세겜에서 딸 디나가 욕보임을 당한 일,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의 사이에서 힘겹게 얻었던 11번째 아들의 행방불명된 일, 그리고 말년에 당한 기근의 고통까지 생각해 보면 야곱의 토로는 진정성이 있는 토로였습니다.
파란만장한 험악한 세월을 보낸 시기였습니다.
그런 시기를 경험했던 야곱에게 노년에 생각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감격이 임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만난 일도 그렇고, 그 아들이 애굽의 제 2인자가 되어 기근으로 죽을 수 있었던 자기와 모든 자녀들을 애굽으로 초청한 일들은 정말로 노년에 경험하게 된 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덧붙여 노년의 야곱에게 거할 장소가 즉 지역적 공간이 애굽의 일 인자인 바로에게 하사 받았다는 것은 실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47:11절은 그 땅의 이름을 라암셋이라고 알려줍니다.
더불어 1,4절에 의하면 그 땅이 고센이라는 땅임도 알려줍니다.
주목할 것은 고센은 요셉에 의해 미리 예비 된 땅이었음을 암시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46:34절을 읽겠습니다.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이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요셉의 이런 프로젝트에는 신학적인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애굽은 나일 강을 기초로 하여 수원이 풍부하여 비옥한 땅을 많이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농사가 주된 산업이었기에 목축은 기피하는 산업이었습니다.
자기가 자란 가나안은 목축을 중요시 여기는 생활상을 알고 있었던 요셉은 아버지와 형들을 고센이라고 하는 목축을 하기에 적합한 땅을 미리 예비 하여 그곳에 정착하게 할 요량으로 고센을 지목한 것인데,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실제적인 이유는 요셉은 가족들이 이방 문화와 혼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결국 아버지 야곱과 형들은 고센에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 마련한 고센, 그리고 그 고센을 품고 있었던 라암셋에서 야곱은 17년을 거주하고 그의 나이 147세를 향유한 뒤에 열조에게로 돌아갔음을 창세기 49장이 증언을 합니다.
바로 이 즈음에서 이제 우리는 장면을 출애굽기 1:8-14절로 이동해야 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백성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 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
셈 족이었던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에 등극했을 때, 애굽의 왕조는 ‘살리티스’라는 이름을 가진 힉소스 족속의 인물이 애굽을 정복한 이후였습니다.
힉소스 역시 셈족이었기에 요셉을 제 2인자로 세우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이 활동할 당시, 힉소스가 애굽을 점령하여 세운 왕조를 15-16왕조라고 역사가들은 진단합니다.
하지만, 힉소스 왕조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나일 강 상류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이 만든 신흥 제국에 의해 힉소스는 멸망당하고 순수한 이집트인들로 구성된 17왕조가 들어서면서 애굽의 고센에 살고 있었던 히브리 민족은 졸지에 고난의 터널로 들어서게 됩니다.
18-19왕조는 이집트인들만의 강력한 제국을 형성하였고, 고센에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을 국가 노예로 전락시켰기 때문입니다.
특히 19왕조를 이끌던 바로인 세티 1세(재위 주전 1290-1279)와 람세스 2세(주전 1279-1231)는 강력한 노예 정책을 펴서 이스라엘을 괴롭힌 왕으로 그 명성을 날리는데, 이 왕들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들’이라고 진단해도 됩니다.
성서학자들은 이렇게 국가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 하에 출애굽을 하게 되는데 그 시기가 라암셋 2세가 통치하던 주전 1290-1280년 정도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역사를 다시 끄집어낸 이유는 요셉과 야곱의 이야기를 등장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격동의 시기를 경험하게 될 이스라엘의 운명을 몰랐던 요셉과 야곱은 힉소스 왕가 시대에 애굽이라는 이방 땅에 정착을 하게 되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기에 아직은 핍박이 요원하고, 어떤 측면으로 보면 애굽에 살고는 있지만 권력의 실세가 요셉인 상황에서 야곱의 일가는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때가 애굽 이주 시기였기에 인지상정으로 애굽에 정착한 야곱과 그의 자녀들은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마음으로 애굽에서의 삶을 즐기고 누리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궤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목할 팩트가 성경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야곱이 대단히 안락하게 애굽에서 14년이라는 세월을 향유한 어느 날, 아들 요셉을 부릅니다.
그리고 아들 요셉에게 아주 엄위한 명령을 유언으로 남기는 장면이 본문입니다.
47:29-31절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야곱이 요셉에게 명령 겸 유언으로 하명한 것은 내가 죽거든 나를 애굽에 묻지 말고 가나안에 있는 막벨라 굴에 묻을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묻혔고, 할머니가 묻혔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묻힌 에브론에 있는 막벨라에 묻을 것을 명령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 하명을 받은 요셉은 아버지가 열조에게로 돌아가자 유언대로 가나안으로 올라가 그곳에서 아버지를 매장하고 장례를 지냈다고 창세기 50장은 보고합니다.
오늘은 2022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저는 추수감사주일의 성경적 텍스트로 여기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부분 텍스트를 교우들에게 전했습니다.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고센은 안전한 땅이었습니다.
안전한 것뿐만이 아니라 고센은 특별하게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거주하던 히브리 백성들만의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게토 지역이었습니다.
어떤 측면으로 볼 때, 치외법권적인 특수지역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고센에 거주하던 히브리 백성들은 특별대우를 받은 셈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자기가 세상을 떠나면 자기의 시신을 애굽의 고센 땅에 매장하지 말고, 가나안의 에브론에 있는 열조가 묻혀 있는 막벨라 굴에 매장할 것을 고집했을까요?
※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놓치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고센이 아무리 좋은 땅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이 세속적 만족을 충족시키는 데에 있어서 가장 최적의 장소라고 할지라도 그곳은 가나안 땅이 아니었음을 야곱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서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창 47:29)
이렇게 단호하게 하명한 야곱은 곧바로 그가 가졌던 히브리 백성으로서의 신앙적 행위를 드렸다고 창세기 47:31절은 보고합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고센 땅에서 17년을 거주하며 살았던 야곱은 매일, 매시간 행했던 그의 일상을 유언을 남기던 그날도 지속했습니다.
“침상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이 구절이 왜 이리도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심장으로 아멘 했습니다.
저는 야곱의 영적 행위를 보면서 2022년 추수감사주일에 드릴 최고의 감사 내용을 교우들에게 선포하고자 합니다.
2022년 감사해야 하는 최고의 이유는 이것입니다.
※ 지난 3년, 무시무시한 세월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전히 서 있게 해 주신 감사입니다.
36개월이라는 시간, 전무했던 바이러스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던 곳이 교회 공동체였습니다.
지난 특새 기간 전했던 월터 브루그만의 메시지를 귀담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인 아래서 진행된 코로나 19의 공격은 매서웠습니다.
신학적인 공격 하에서 일어났던 일이기에 우리는 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전염병 확산 속에서 느끼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 숨어 있는 의도를 발견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인본주의적인 소비주의, 탐욕주의라는 신 바벨탑 쌓기와 결별하라는 메시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돌이킴이 필요하고, 그 돌이킴은 내 자아 중심으로 구부러져 있는 개인적 이기주의를 탈피하고, 타자 중심성과 사회적 영성을 함양하는 것이며 이것을 전제하여 코로나 시대라는 아픔이 있었지만 한복판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을 회복시키시고 새 일을 행하심으로 반드시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 춤추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공유했습니다.
이렇게 지난 주간에는 특별 새벽기도회로 일하셨습니다.
세인 공동체도 지난 3년이라는 시간동안에 참 만만치 않고 녹록하지 않은 힘들고 어려운 터널을 지나왔지만 그래도 말씀으로 꿈틀거렸고, 기도라는 영적 산소 호흡기를 주입함으로 인내하며 달려왔습니다.
상황과 여건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교회 공동체의 사역과 성령의 일하시는 지원으로 공급받아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달려온 교우들의 영적 자화상이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하는 은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전히, 늘, 항상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에 이탈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동역자들을 통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전히 서게 만들어준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흔들릴 수 있는 나입니다.
히브리서 수신자처럼 신앙의 길에서 이탈할 수 있는 위기의 남자와 여자가 바로 나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 있습니다.
세속적 안전과 만족을 주는 오늘의 고센에 살고 있는 나이지만, 나는 여전히 가나안의 막벨라 굴을 향하여 시선을 돌리지 않도록 하나님이 나를 견인하여 주셨습니다.
지난 3년, 고센이 좋으니 그곳에서 정착하라는 유혹이 나를 덮쳤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여 가나안의 막벨라는 본향을 향하는 마음을 잃지 않도록 나를 통제하여 주었습니다.
2022년 최고의 감사 내용은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 있다는 은혜입니다.
이 감사는 빼앗길 수 없는 최고의 감사 내용입니다.
지난 주간, 성서 일과 묵상 텍스트 중에 시편 84편에서 말한 시인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시편 84:10-11절을 낭독하겠습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이것보다 더 좋은 감사의 내용은 없습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일간지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한국에 체류한 기사를 경쟁적으로 내보냈습니다.
일간지가 보도한 내용을 요약하면 그가 한국에 20시간 체류하면서 쓰고 간 물질과 내용들을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내에서 판매 안 되는 방탄용 벤츠(시가 7억 2,000만원)를 공수해 가지고 온 것, 그가 먹은 음식인 할랄 식의 음식과 식기들, 그가 잠자고 간 침대, 소파 등등도 공수해 가지고 온 것들인데 대한민국 최고의 호텔이라는 롯데 호텔 최고급 VIP 룸에 세팅되어 있는 일체의 기구들을 사용하지 않고 본인이 공수해 온 것들을 사용했다는 내용, 그가 묵었던 룸 가격이 1박에 2,200만 원짜리 로열 룸이었다는 것, 그의 총 재산이 2조 달러 즉 2,680조원 정도라는 것을 보도했습니다.
그는 별명이 모든 것이 가능한 남자라는 뜻의 Mr, Everything이라는 것도 놓치지 않고 기사화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가능한 그에 대한 보도가 왜 이리 헛헛한지요.
그의 것이 영원합니까?
그가 끝날 하나님 앞에 설 때 이 모든 것이 그를 방어해 줄 수 있는 방탄막이가 될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다시 설교의 서두에 말씀드린 직전 교회 관리집사 아들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둘째 아들은 왜 제게 전화를 했을까요?
아마도 제게 장례식 인도를 부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본인도 지금은 신앙생활을 접었기에 아버지의 장례를 인도할 담임목사 없는 답답함에 제게 전화를 걸어 겸연쩍지만 그런 청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다른 사람이 나의 옷을 벗기는 것이다. 세상에 누가 감히 나의 옷을 벗길 수 있는가? 그러나 죽음은 일면식도 없는 장례지도사가 나의 옷을 벗기는 것이다. 겉옷을 말할 것도 없고 속옷까지 모조리 벗긴다. 아무도 그 옷 벗김을 가로막거나 제지할 수 없다. 세상의 학력도, 직책도, 재산도, 그 무엇도 소용없다. 속수무책으로 벌거숭이가 되는 것이다. 입관이란 시신의 옷을 벗기고 수의를 입힌 다음 관속에 안치하는 것이다. 나에게 너무 놀라운 것은 시상(屍床) 위에 벌거벗은 채 누워 있는 시신이 시신으로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그 시신의 모습에서 그 시신의 주인공이 살아온 전 일생이 한 컷의 영상으로 시신을 덮고 있음이 보인다.” (이재철, “내게 있는 것으로”, 235-23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벌써부터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 시신의 모습에서도 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보이게 하옵소서!”
2022년 추수감사주일,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아 있음에 최고의 감사를 드리기를 축원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감사의 내용은 없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내 주님 계신 눈물 없는 곳 저 하늘에 숨겨둔 내 소망 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많이 생각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 곳
내 아버지 넓은 품 날 맞으시는 저 하늘에 쌓아둔 내 소망 있네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