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11:7
제목: 노아의 믿음
서론)
“오늘 우리들이 겪는 최고의 비극은 신, 구약 성서의 메시지와 교회와 신학을 그것들의 진리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기능’으로 여기는 일이다.” (자크 엘륄, “비틀어진 기독교, 대장간, 95.)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엘륄의 이 말은 적어도 제게는 폭탄이었습니다.
20세기에 매스 미디어의 위력은 신 바벨탑을 능가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21세기에 AI는 신 바벨탑 위에 더 높은 바벨탑을 쌓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교회는 이런 바람에 휩쓸려 출렁이다 못해 그 현기증으로 인해 구토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교회가 택한 방법은 엘륄의 말대로 교회를 기능적 기구로, 교리는 그 기능을 위한 시녀로 전락시킨 어처구니없는 반응이었습니다.
이런 시도는 결국 교회에서 강력하게 추구하고 견인해야 할 영적 동력을 상실하게 했는데 그것은 교회 안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무용론을 낳았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 발 빠르게 대처해서 만들어낸 교회 부흥의 방법론과 스킬은 전혀 성경과는 관계없는 기형적 괴물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속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속의 기류나 풍속을 따라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앞에서 소개한 쟈크 엘륄이 또 다른 책에서 말한 이 말은 정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새겨야 하는 금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세상 속에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매여서는 안 된다.” (쟈크 엘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어떻게 살 것인가?”, 대장간, 13)
세상 속에 매여서는 안 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상실하지 말아야 한다는 권고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으로 소개된 세 번째 사람은 우리에게 적절한 신앙의 선배가 됩니다.
본론)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본문 7절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세 번째 주인공은 노아입니다.
저자는 노아를 소개하면서 제일 먼저 노아의 신앙적 특성 즉 믿음의 내용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하여 경고하신 신탁을 받았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이미 이 경고의 내용이 무엇인지 선명하고 알고 있습니다.
노아에 대한 오리지널 텍스트인 창세기 6:5-7절을 대입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무섭고 떨리는 신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무섭고 떨리는 신탁을 노아는 수용합니다.
본문의 내용으로 재확인합니다.
본문 중반절입니다.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여기에 기록된 ‘경외함으로’라고 번역된 헬라어 ‘율라베오마이’는 철저히 ‘종교적인 떨림’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조재천 교수는 그의 주석서에서 단문이지만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다’는 구절을 이렇게 멋지게 주석했습니다.
“노아는 홍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다.”(조재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히브리서”, 홍성사, 185.)
기막힌 성찰입니다.
노아의 이런 믿음의 행위가 가져온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하반절은 분명히 답을 제시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이 구절을 좀 더 손쉽게 이해하기 위해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7절 전체를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메마른 땅 한복판에 배를 지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해 경고하셨을 때, 지시 받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의 집안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의 믿음의 행위가 믿지 않는 악한 세계와 믿는 올바른 세계를 예리하게 구분 지었습니다. 그 결과로 노아는 하나님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노아에게 임했다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히브리서 저자의 일갈을 유진 피터슨 목사는 대단히 선명하게 그리고 쉽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우리는 이상의 7절 해석을 통해 노아의 믿음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 노아의 믿음은 하나님이라는 본질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노아라는 인물을 무대 위로 등단시킬 때마다 마치 바늘과 실처럼 같이 연상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만들었다는 도식입니다.
틀린 말입니까?
틀린 말이 아니라 너무나 정확한 말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갖고 있었던 믿음을 이야기할 때는 방주 예비보다 더 중요한 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조재천 교수의 말입니다.
“노아는 홍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다.”
노아는 홍수가 날 것이라는 사실, 그 홍수가 일어나면 방주가 본인의 가족들을 구원하게 될 것을 믿었지만, 그것만으로 노아의 믿음을 정의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노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노아의 믿음은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주체이자 본질이신 하나님을 믿은 믿음입니다.
다시 말해 본질적인 믿음의 대상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선진이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묻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 가치가 있느냐를 묻습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가치론은 죄에 대한 평가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적용됩니다.
어떤 이의 죄를 평가할 때, 현대 사회는 가치론적으로 접근합니다.
이런 면에서 현대 사회의 우상은 가치입니다.
가치를 폄훼하거나 평가절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오늘 설교를 통해 나누고 싶은 것은 죄와 같이 믿음도 가치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조재천 교수가 노아에 대한 주석을 이렇게 표현했는데 동의했습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초월 세계를 상정한다. 그 세계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믿는 게 아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치의 총화를 넘어 인격적인 존재이심을 믿는다. 존재에 기반 하지 않는 가치는 허무하다.” (위의 책, 같은 페이지)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식상하고 상투적인 메시지로 여겨지십니까?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더 붙들어야 할 믿음의 본질입니다.
누가복음 6장을 읽다가 작지만 저를 크게 깨닫게 하는 은혜를 공급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본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1-5절입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통과하여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길을 열면서 지나가는 길목에 있었던 밀 이삭을 잘라서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밀 이삭을 잘라서 허기를 채우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을 보고 그 행위를 비난하기에 이릅니다.
비난의 내용은 안식일에 금한 행위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인 유대인의 율법 중에 안식일에 대한 율례는 상당히 예민한 부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례 중에는 농사 중에 그 날 하지 말아야 하는 39가지의 금지조항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네 항목은 추수와 관계있는 금지조항이었습니다.
① 추수하는 일입니다. ② 키질하는 일입니다. ③ 탈곡하는 일입니다. ④ 거친 가루를 빻는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제자들은 이 네 가지의 항목 중에서 두 가지 이상의 율례를 어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제자들이 밀밭에 들어가 이삭을 자른 것은 추수하는 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6:1절에 기록된 대로 '손으로 비비며 먹은 행위'가 곡식을 탈곡하는 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행위는 행위 자체로 놓고 볼 때에 실제로 신명기 25:23절의 율례를 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5:2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바리새인들의 공격을 율법적인 예로 해석한다면 아무리 예수님이라고 하더라도 항변의 이유를 달만한 그 어떤 방어적인 내용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항거를 시작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은 갑자기 바리새인들이 마르고 닳도록 읽고 또 읽으며 익혔던 구약의 한 예를 소개합니다.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기사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놉 땅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피해 다니는 신세였기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는 물론이거니와 자신과 함께 있는 소년들까지 굶주려 있는 것을 호소하고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요청합니다.
아히멜렉은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떡이 있었는데 이것은 제사장이외의 사람들이 먹는 것을 금한 떡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 아히멜렉은 율법을 어기고 굶주려 있는 다윗과 그의 동료들에게 이 떡을 주었습니다.
이 기사의 마지막 부분이 이렇게 마감됩니다.
사무엘상 21:6절입니다.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었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진설병이라는 것은 안식일에 하나님께 드려진 떡을 말하는 떡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떡을 건네줄 때가 여호와께 새로운 떡을 드려야 했던 안식일이었기에 남아 있었던 떡 즉 갈아치워야 하는 떡을 주었지만 그것도 율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물리는 떡이었지만 그 떡은 하나님께 드려진 성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왜 이 기사를 생뚱맞게 주님이 끄집어 내셨습니까?
주님의 이 항변은 안식일에 대한 본래적인 의미를 바리새인들에게 재확인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에게 드려야 하는 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살리려는 영혼 즉 사람에게 떡을 주어 그 사람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뜻이 중요함을 역설한 것입니다.
6:5절은 대단히 중요한 본질적인 메시지입니다.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신앙인의 바른 자세는 비 본질이 아니라 본질을 붙드는 것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깊어 가면 깊어갈수록 너무도 아이러니하게 본질이 아닌 비 본질에 몰두하는 이상한 습관이 생겨납니다.
정말로 붙들어야 하는 것은 안식일에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인데, 쓸데없는 안식일이라는 도그마에 사로잡힙니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말로 적용한다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붙들어야 하는 것은 원본의 믿음인데, 자꾸만 사본의 믿음을 붙들려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적용해 보십시다.
노아가 붙든 것은 홍수 심판의 메시지가 아니라 그 심판을 선언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결국 노아의 믿음은 본질을 붙드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의 개신교회가 힘을 잃은 것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기준에 따라 자기 삶을 조율하기 때문이다.” (김기석 목사의 ‘하늘에 닿은 사랑’, 꽃자리, 453)
금년 초에 읽었던 김기석 목사가 쓴 ‘하늘에 닿은 사랑’이라는 시편 묵상 집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본질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본질로 둔갑된 비 본질입니다.
교회가 본질이 아닌 비 본질을 붙드는 순간, 교회가 아닙니다.
성도가 하나님이라는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 같은 것이라는 비 본질을 붙들 때 성도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천착해야 하는 것은 노아가 붙들었던 하나님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앞에서 소개했던 김기석 목사의 글을 읽고 제가 항상 하는 대로 북-리뷰를 한 뒤에 개인 블로그에 글을 올려놓았습니다.
제 글을 읽은 광장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댓글러가 이런 글을 붙여 놓았습니다.
“김기석 목사님의 책 서평만 읽고도 감동하게 되네요. 허망함에 빠져 있는 중에 지푸라기가 아닌 동아줄을 본 느낌입니다. 여전히 종교는 제게 멀지만 이런 목사님이 계신 교회가 있다면 맨발로 들어설 수 있을 것 같아요.”
‘plmxsw159’ 라는 아이디를 갖고 있는 분이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동시대에 아직 김기석 목사님 외에 좋은 목사님들이 계시니 살 소망을 하나님이 남겨주신 거 같습니다. 감사하고 응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인이든 비 신앙인이든 본질은 사람을 흔들어 놓습니다.
하물며 본질 중의 본질이신 하나님께서 그 본질을 붙드는 자들을 어찌 강복하시지 않겠습니까?
노아의 믿음은 본질을 붙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도 본질을 붙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
내 힘으로 안 될 때 빈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우리 모인 이곳에 주님 함께 계시네 누리네 아버지 은혜
적은 떡과 물고기 내 모든 걸 드릴 때 모두 고백해 여호와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