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21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41) 본문: 히브리서 11:5-6 제목: 에녹의 믿음 서론) 우리나라의 진돗개는 천연기념물 제 5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만큼 진돗개의 우수성은 세계적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이 진돗개는 이러한 우수한 종자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견이나 경찰견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진돗개가 군견이나 경찰견으로 사용되기에 아주 적합한 종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못한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진돗개는 평생에 주인을 바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찰이나 군인은 자주 바뀝니다. 그러나 진돗개는 평생 주인을 한 번 정한 이상 바꾸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주인으로 정해지면 결코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해서 경찰견이나 군견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미물이지만 진돗개를 통하여 우리는 느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충성과 믿음입니다. 이해의 폭을 거꾸로 돌려보십시다. 진돗개를 키우고 있는 견주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듬직할 것입니다. 더불어 그 진돗개를 볼 때마다 마음이 기쁠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주군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6절에서 저자는 이렇게 그 유명한 구절을 기록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대 명제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 저는 믿음의 선진 중에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게 한 믿음의 사람으로 히브리서 저자에 의해 당당하게 오늘 본문에 이름을 올린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제 그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본문 여행을 떠나보십시다. 본론) 본문을 읽어보십시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이 구절만 놓고 볼 때, 에녹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도록 역동적으로 일하셨던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옮기셨던 단적인 이유를 분명히 하고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보와 더불어 우리가 에녹을 살핌에 있어서 조금 더 깊은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에녹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창세기의 기록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에녹을 주목하게 된 초기 자료는 창세기 5장의 한 구절입니다. 창세기 5:21-24절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겠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성경 내증 안에 기록된 인물 중에 가장 오래 산 최장수 인물인 므드셀라의 부친이 에녹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최장수 인물인 므드셀라의 아버지인 에녹은 셋의 계보 중에 가장 짧은 인생을 산 사람으로 365년을 향수하였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창세기 5:6-31절까지의 증언에 의하면 셋의 향수 나이는 930세, 에노스는 912세, 게난은 905세, 마할랄렐은 910세, 야렛은 895세, 에녹은 365세, 므두셀라는 969년, 라멕은 595년, 노아는 950세였다고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수명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이 장수를 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 계보 중에 눈에 띄는 수명의 주인공은 단연 오늘 설교의 주인공 에녹입니다. 900세를 향수하던 시대에 불과 365세라면 단명도 그냥 단명이 아니라 요절한 셈입니다. 그러나 에녹 인생에 대한 마침표는 의미심장합니다. 창세기 5:24절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십시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의 수명은 365년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은 철저히 영적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에녹을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고 표현했고, 히브리서 저자는 죽음을 보지 않았다고 표현했습니다. 에녹을 하나님이 데려가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갖고 있었던 믿음의 내용이 궁금해집니다. 본문은 분명히 적시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가실 정도로 그를 사랑하셨을까요? 1)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6절 전반절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믿음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지난 수요일 예배 시간에 창세기 19장을 나누었습니다. 특히 소돔 성의 멸망에 관한 담론을 나누었습니다. 그날, 교우들과 함께 나누었던 설교 제목이 ‘당신은 누구입니까?’였습니다. 제가 설교를 통해 의도했던 메시지의 요점은 소돔이 멸망을 할 때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롯을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설교의 단연 으뜸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임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9:29절은 그날 설교의 주제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롯은 소돔 성에서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조건이라고는 1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극적으로 소돔 성 멸망의 프로젝트에서 구원받은 은혜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가 수요일 설교 제목을 의문문으로 던진 이유는 당신은 롯과 같은 인생을 사는 자인가, 아니면 아브라함과 같은 인생을 사는 자인가를 도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소돔의 미련을 못 버려 뒤를 돌아보아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인가? 얼떨결에 아버지 따라 나와 구원 받은 롯의 두 딸인가를 곱씹는 것도 설교의 목적이었습니다. 수요 설교 이후 셀 리더들이 설교 피드백들을 제게 보냈습니다. 셀 리더 모두가 제게 보낸 설교 피드백의 공통분모들이 있었습니다. 그날에 아브라함과 같은 인생을 살아 ‘네가 옳다.’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는 성도가 되고 싶다는 피드백이었습니다. 이런 피드백의 글감 중에 한 리더가 이렇게 사족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다.” 저는 지금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에 대하여 부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내가 믿습니다. 그러면 믿어지는 것입니까? 그래도 믿어지지 않을 때가 허다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까? 쉽지 않은 그 일에 투쟁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을 때만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갈등과 고민이 없이 투쟁도 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믿음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쉬운 것을 선택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순응이자 타협이지. 저는 거지 바디매오를 참 좋아합니다. 바디매오가 주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은 은혜가 바디매오 기사의 압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디매오 기사의 가장 흥분되고 전율되는 장면은 바로 이 장면입니다. 마가복음 10:47-48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은 꾸짖음 때문에 물러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삶은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는 투쟁의 사람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 투쟁 모드에 있습니까? 2)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6절 하반절을 다시 읽습니다.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구절이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베드로전서의 메시지로 답해보겠습니다. 베드로전서 1:3-4절을 소개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베드로전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이 편지가 AD 63년경에 로마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기를 설정한다면 AD 64년에 있었던 네로가 저지른 로마의 대 화재로 인해 누명을 쓰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할 때임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 베드로도 함께 순교를 당했다는 것이 교회사의 보고입니다. 이 보고에 동의한다면 분명 베드로전서는 베드로의 유언과도 같은 편지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베드로가 지금 이 편지를 쓰던 시기는 천방지축 날뛰던 혈기 왕성할 때의 베드로가 아니라 적어도 십자가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 영적 성숙의 전성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남긴 이 구절의 선한 영향력은 막대합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순교적 핍박을 당하고 있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인 형제들에게 보낸 메시지의 핵심이 절절하게 들립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나누겠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분인가요!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을 모신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지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생명을 받았고,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늘에 간직된 미래까지 보장받았습니다. 그 미래가 이제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그 미래를 꼼꼼히 살피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온전하게 치유된 생명을 얻게 될 그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믿음의 결정체는 하늘에 간직된 미래를 믿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렇게 주어진 산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에게서 초점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산 소망은 히브리서 식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찾는 자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 주신다는 사실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에녹의 글말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창세기 5:24절을 영어성경 NLT로 읽어 보겠습니다. “He enjoyed a close relationship with God throughout his life.” “에녹은 자신의 전 인생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아주 긴밀한 관계를 누렸다.” 이렇게 적용하면 억지춘향일까요? 하나님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누렸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에녹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날마다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오셔서 동행하시면서 자기를 축복하신 것을 날마다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왕대일 교수가 본인의 책에서 이렇게 쓴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이 에녹을 찾아오셨다는 말로 새겨야 합니다. 쓰기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쓰고, 읽기는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였다.’라고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으십니다.” (왕대일, “창조신앙의 복음, 창조신앙의 영성”, 대한기독교서회, p,151) 기막힌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에녹은 매일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에녹을 데려가셨습니다. 그분이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그 상을 받은 자가 에녹입니다. 일일 성경인 맥기 성경 집필자로 유명한 맥기 목사의 설교 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매일 에녹과 산보를 했다. 야, 에녹아 오늘도 산보 가자하고 찾아와서 에녹을 데리고 동산으로 나갔다.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시간이 되었다 돌아가자 한 시간이 300년이나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과 에녹의 대화가 너무 깊어졌다. 한 참을 이야기하다가 가는 시간을 놓쳐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녹아, 그냥 우리 집으로 가자. 그리고 그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셨다.”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찾는 백성들을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심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이성복 시인이 쓴 ‘무한화서’에 이런 문장이 실려 있습니다. “말이 현란하면 할 얘기가 별로 없다는 표시에요!”(무한화서, 32.) 믿음이라는 것은 현란한 화법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임을 믿는 단순함입니다. 에녹이 바로 이런 믿음을 갖고 있었던 믿음의 선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세속적인 것들과 투쟁하는 믿음, 그렇게 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주시는 좋은 하나님임을 믿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새 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겸손히 내 마음을 드립니다 나의 모든 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케 씻어 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