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11:1-4
제목: 아벨의 믿음
서론)
어느 식당에서 본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100m에서 이기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승리하고 싶은 것은 10,000m 달리기입니다.”
제가 이 문장을 본 식당은 지금도 사람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고객들에게 단기간에 승부를 거는 얄팍한 식당이 아니라 꾸준히 사랑받는 식당을 만들어가겠다는 식당 주인의 철학이 보입니다.
현대인들이 열광하는 것은 진정성입니다.
동네 식당을 경영하는 주인도 이렇게 진정성이 있는 음식을 만들어낼 때 고객들이 잊지 않습니다.
이 식당은 충주에 있지만 제가 충주에 갈 일이 있으면 이 식당을 찾는 것은 문장에 담긴 철학이 음식 맛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모 정당의 국회의원이 하지 말아야 할 망언을 했습니다.
이번 폭우로 반 지하에 살고 있는 한 가족이 익사했는데, 그들이 내는 세금으로 편안한 삶을 영위하는 국회의원이 그 수해 현장에서 도무지 인간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망언을 내 뱉었습니다.
그가 여론이 극도로 나빠진 것을 보고 개인 사죄 발표를 했습니다.
그의 사죄 발표를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붙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더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진정성의 부재 때문입니다.
그동안 정치인들이 보여주었던 내용들은 일반국민들을 설득하거나, 지지받도록 한 내용이 거의 전무하기에 이번에 수해 현장에서 있었던 망언의 당사자가 사죄를 한 것도 여론의 악화로 인해 마지못해 행한 사죄 기자회견이었기에 더 큰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반응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제 시선을 우리에게 돌려 보십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속해 있는 크리스티아노스들입니다.
적어도 2022년 작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보여줄 수 있는 영적 진정성은 무엇일까?
오늘 설교를 통해 이 점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저는 지난 주일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한 것임을 믿었고, 주님이 주신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반응을 하며 살아갔던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가 11장을 통해 소개할 것임을 미리 밝혔습니다.
이 믿음의 선진적인 대표 주자로 첫 번째 소개된 인물이 바로 아벨입니다.
본문 4절을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아벨을 믿음의 선진으로 소개합니다.
이렇게 소개한 이유는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적시했습니다.
더불어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증거로 그가 드린 예물을 인용했습니다.
그럴 것 같다고 학습되어 있는 본문 4절을 자신 있게 말하려면 히브리서 저자의 이 기록에 대해 심층 분석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오늘 이 여행을 떠나보십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가인과 아벨의 담론은 어떤 그림으로 정형화되어 있습니까?
성경이 내증하는 가인과 아벨의 기사를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창세기 4:3-5절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이 구절을 접할 때마다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을까? 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습관적인 반응입니다.
소개한 본문 정황만 놓고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왜 외면했는지에 대한 선명한 내용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부터 몇 가지 학설들을 설명하는 이유는 가인과 아벨 제사에 대해 이미 학습되어 있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그릇된 이해를 버리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대체적으로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에 대한 학계의 설명은 4가지 정도로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① 독일 쾨팅엔 대학교의 헤르만 궁켈 교수의 입장입니다.
이 해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농업보다 유목민의 삶을 더 선호했다는 해석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농산물로 드리는 제사를 거절하시고, 양을 바쳐 드리는 제사를 흠향하셨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시키신 뒤에 명령하셨던 것이 땅을 경작하라는 것이었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명령에 순종하는 방법은 당시의 삶의 환경에서 두 가지로 나누어 진 것입니다. 하나는 농업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목축업입니다. 두 가지의 생활 방식은 인간의 생존 방법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호하신 분야가 목축업이라는 고정된 해석은 억지 춘향입니다. 하나님이 농업에 종사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목축업자로 살았던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이유가 하나님의 직업의 선호도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전혀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② 캠브리지 대학교의 J, Skinner(스키너) 교수의 입장입니다.
아벨이 가인에 비해 구약의 제사법에 훨씬 더 적합한 제사를 드렸다는 이론입니다. 하나님은 곡식 제사보다는 동물의 희생 제사를 더 선호하시는 분이시기에 피 있는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셨고, 피가 없는 제사를 드린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도 전혀 성서 신학적이지 않습니다. 본문 4,5절에 기록된 ‘제물’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민하’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의미하는 것이 ‘소제’ 즉 피 없는 제사인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아벨이 드린 제사도 ‘민하’입니다. 하나님께서 피 흘리는 제물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짜 맞추기식이라는 냄새가 납니다.
③ 튀빙겐 대학교의 Von Rad (폰 라드) 교수의 주장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것을 받지 않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자유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제사를 드린 자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기에 두 사람의 제사를 받고 받지 않으시고는 인간이 논할 바가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예정론적인 차원의 해석입니다. 하지만 제가 예정론에 대하여 대단히 강하게 반대하는 목사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경우를 인정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다는 것을 수용하라는 것처럼 들리기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제 세 학자들의 주장에 비해 제가 동의하는 4번째의 학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⓸ 제물을 드린 자의 제물을 인격적인 삶과 연결시켜 보는 해석입니다.
창세기 4:4-5절을 다시 봅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세기 기자는 아주 의도적으로 본문을 기록한 느낌이 농후 합니다.
통상 하나님의 주목하심은 제물일 것이라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합니다.
하지만 목원대학교 신학과 교수인 이희학 교수의 글을 읽다가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이 교수의 해석은 제물이 아니라 제물을 드린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본문이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자’를 분리시키지 않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중략) 하나님은 단순히 제물만을 받으시고, 거절하신 것이 아니다. 제물에 선행하는 것은 제물을 드린 자의 이름이다.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을 동시에 거절하신 것이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동시에 받으신 것이다. 제물보다 중요한 것은 제물을 드린 자의 인격적 생활이었다.” (이희학, “인간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대한기독교서회,p,154.)
이희학 교수의 글을 읽고 나니 창세기 4:6-7절 기록이 크게 들어 왔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은 제물이 열납 되지 않자 보인 태도는 분함과 안색의 변함이었다고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제사를 드리기 이전부터의 가인의 성품과 삶의 질이 어떠했을까를 추측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4:7절 전반절은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이미 가인의 성품이 거칠고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8절을 봅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개역개정판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70인의 역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들판으로 나가자.”
무슨 말입니까?
가인의 살인은 매우 고의적으로 계획된 계획 살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뒷받침해 줍니까?
가인의 폭력적 인격을 고발합니다.
그렇다면 제물을 드렸던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의도를 이렇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전혀 신앙적 인격이 전제되지 않은 삶을 산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실 리 만무라는 교훈 말입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아벨의 제물이 열납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이 담보된 삶의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본문 4절 전반절의 표현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린 ‘더 나은 제사’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삶의 예배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는 진정성은 삶의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자가 어찌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 믿는 자라는 레테르를 갖고 사는 자의 삶에서 말씀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는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교우들과 나누고 있는 본문 4절 후반절은 계속해서 복기해야 하는 영적 지침입니다.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죽었지만 그가 드렸던 예물이 그를 증언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래서 대단히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가 삶으로 드렸던 예물은 바로 그의 믿음이었다고 정의한 것입니다.
창세기가 편집 된 이후 아주 오랜 뒤에 기록된 요한일서 3:12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저는 요한의 이 후대 보고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서 주저하지 않습니다.
“‘가인의 행위는 악하고’는 삶의 뒤따르지 않는 것에 대한 고발이다. 하지만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는 보고는 아벨은 그의 삶이 언제나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이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예배로 드리는 행위입니다.
내가 만에 하나, 지금 내 삶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고, 봉사를 감당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갖고 활동한다고 하더라도 내 스스로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삶이라면 나는 믿음 없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아직 선지자로 활동하기 이전 가나안 초기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피폐해 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 가계도는 타락할 대로 타락했고, 말씀은 희귀할 정도로 무뎌져 이상이 보이지 않던 시대였습니다.
소개하는 두 구절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사무엘상 2:12절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사무엘상 3:1절을 봅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이런 영적 상태를 하나님이 그대로 묵과할 리 없습니다.
블레셋을 들어 이스라엘 공동체를 치게 하셨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아벡 전투를 이끌었지만 4,000명이 죽는 대패를 당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충격적인 대패를 경험한 뒤에 나름의 패배 이유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출해낸 결과물은 법궤가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전열을 정비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2차 전투를 앞두고 그들이 광야 40년 동안 앞세워 매번 승리했던 법궤를 이스라엘 진영으로 옮겨와 전쟁에서 이기려고 꾀를 냅니다.
하지만 법궤를 앞세우고 싸운 이스라엘은 또 다시 대패합니다.
이번에는 30,000명이 전사하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그 전투에서 사망합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법궤도 빼앗기고 아들도 사망하게 된 것을 안 제사장 엘리는 그 충격으로 낙상하여 목이 부러져 죽고, 비느하스의 아이를 임신한 그의 아내가 해산하면서 죽는 불행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낳은 유복자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뜻을 풀이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났다.’라는 뜻으로 엘리 시대의 종말을 알려주는 교훈을 사무엘상 3,4장이 줍니다.
이스라엘의 이 역사가 우리들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은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길들여져 있는 형식적인 예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백성들의 바른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일제의 강점기 시절, 간도로 망명하여 명동학교를 세워 독립 운동의 동량들을 키워낸 규암 김약연 목사는 그의 삶으로 목사의 삶을 살아냈던 어른입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그가 가지고 있었던 전 재산과 삶을 인재 양성을 위해 투자하며 청빈하게 살았던 기독교의 어른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임종을 지켜보던 제자들과 가족들이 유언을 한 마디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김 목사가 남겼던 말은 오늘을 사는 저와 같은 목사에게 그리고 여러분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울림을 줍니다.
“내 삶이 유언이다.” (조현, “울림”, 휴, 124)
무슨 유언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목사로 사역하면서 연륜이 깊어지면서 영적인 시각을 돌리려고 더 집중하려고 몸부림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구원 그 이후의 삶입니다.
고 옥한흠 목사께서 후배 목사들에게 남긴 설교 유고집에 수록된 글 하나를 소개합니다.
“요사이 인터넷이다, 출판물과 번역물이 오죽 많아요? 설교 자료가 지금 너무 많아서 홍수에요. 그래서 적당히 짜깁기해서 들고 나가는 설교 많고, 시간이 급해서 그냥 예화 두 개 20분 때우고, 미꾸라지 잡는 이야기로 한 10분 때우고 그러면 설교 끝나잖아요. 그리고 교인들이 웃어주면 은혜 받은 설교라고 착각하지요. 그렇지 않아요. 교인들이 나가면 은혜 받았다고 악수해 주면 그것 때문에 자기 설교 잘 하는 줄 착각해요. 은혜 받았다는 사람, 상습범인 거 몰라요. 설교의 진가는 설교 듣는 시간에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설교를 들은 다음에 어떤 말씀의 능력으로 어떤 변화가 그 사람의 인격과 삶에 일어나는가가 설교를 잘 했나, 못 했나를 결정하는 거예요.” (옥한흠, “목사가 목사에게 2, 하온출판사, 210.)
선배 목사께서 저 같은 후배 목사들에게 던진 비수로 이 글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설교자인 내 스스로가 번듯한 메시지를 준비했다고 으스대는 것도 아니요, 또 그 설교를 들은 자들이 지적이고 감성적인 멋있는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다고 폼 잡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목회자는 물론 설교를 전하고 들은 자 모두가 그 말씀의 전한 대로, 그리고 받은 대로 옛 성품의 질량이 바뀌고 그 바뀐 삶을 살아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받고도 삶이 변화되지 않는데 어떻게 믿음의 사람일 수 있습니까?
이런 차원에서 아벨은 믿음의 본을 보인 선진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다.
삶이 바뀐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당신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전혀 내 삶의 내용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전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본문 4절을 다시 읽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이 드린 더 나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드린 예배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해석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제사인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아내는 예배자, 그가 믿음의 사람이라고.
언젠가 로고스서원을 지도하는 글벗 김기현 목사가 쓴 문장을 읽다가 전기에 감전된 듯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당대 교회는 포도주를 물로 만든다.” (김기현,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죠이북스, 190.)
이 문장의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주군께서는 성도의 삶을 완전한 변화로 이끄셨습니다.
얼음은 물로, 물은 수증기로 만든 변화가 아니라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완전한 변화를 일으키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변화된 포도주를 다시 물로 원상회복시키는 일을 고집하려고 합니다.
주님이 이루시는 변화를 거부하는 삶을 고집합니다.
믿음이란 물로 있었던 나의 미지근한 삶을 포도주와 같이 완전히 질이 변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더 나은 제사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나는 오늘 우리 세인 지체들이 삶으로 변화된 더 나은 제사를 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 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 까지
하늘 아버지 우릴 새롭게 하사
열방 중에서 주를 섬기게 하소서
모든 나라 일어나 찬송 부르며
영광의 주님을 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