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믿음은?2024-03-07 16:53
작성자 Level 10

2022 8 7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39)

 

본문히브리서 11:1-3

제목믿음은?

 

서론)

 

찬송가 445장 1절 가사를 음미하겠습니다.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2절입니다.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

나에게 밝은 빛이 되시니

길 잃어버릴 염려 없네

 

어떠십니까?

정말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이 믿음을 갖고 확신하며 살고 있습니까?

설교 시작부터 담임목사가 부담을 너무 준다고 얼굴을 찡그리는 교우가 계십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묻고 싶습니다.

정말이렇게 살고 있으며이렇게 확신하며 있습니까?

믿음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속성이다.” (챨스 킴볼, “종교가 사악해 질 때”, 현암사, 315.)

오클라호마 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강의하는 챨스 킴볼이 정의한 믿음입니다.

킴볼의 말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인간은 믿음이라는 속성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태생적 존재라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타 종교에 비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믿음을 강조하는 기독교에 속한 크리스천들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배제하고 기독교를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총 40 구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40 구절 중에 무려 24번이나 믿음이라는 단어를 소개합니다.

그래서 흔히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와 그 믿음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정말 중요한 단어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몇 주가 될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히브리서 강해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11장에 도착했으니 기독교적인 믿음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번 기회를 통해 조금은 세밀하게 나누고 공유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본론)

 

오늘 주어진 본문에서 저자는 믿음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명쾌하게 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유진 피터슨은 히브리서 11장을 시작하면서 1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삶의 근본 사실은 이것입니다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야말로삶을 가치 있게 하는 든든한 기초입니다믿음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단서입니다.” (‘메시지’, 신약 11:1-2)

유진 피터슨은 믿음을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기초라고 확신하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유진 피터슨이나 히브리서 저자는 서론에서 언급한 챨스 킴볼의 말을 마치 짜 맞춘 듯한 정의를 내리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많이 버겁고 힘든 삶이라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여행을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는 이유는 바라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고그 바라는 것들은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바람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의 동화로 유명한 어린 왕자에서 생텍쥐페리는 화자가 되어 이렇게 독백하는 장면이 기록했는데 곱씹을수록 아주 의미 있는 어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보이지 않는 법이지. (중략여기 보이는 것은 껍데기뿐이야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문예출판사, 80.)

믿음이 왜 소중할까요?

생텍쥐페리의 말이 그 답이지 않겠습니까?

본문 1절에서도 저자는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입니다.

조그만 더 나아가십시다.

본문 2절입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저자는 이미 벌써 이 믿음(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을 가지고 살았던 주인공들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선진들입니다.

헬라어 단어 프레스비테로스의 번역인 선진에 대하여 故 김달수 박사는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선진들은 구약 시대의 신앙을 증거 하는 증인들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적 전통에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김달수, “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 주석-히브리서”, 대한기독교서회, 234-235)

여기에 나오는 선진들을 히브리서 저자는 4-40절까지 소개합니다.

이 선진들이 이미 믿음을 갖고 살아온 선배들임을 저자가 수신자들에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수신자들은 배교의 위험을 갖고 있었던 유대종교에 너무 익숙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히브리서 저자의 믿음에 대한 역설은 선진들이 갖고 갔던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당부이자경고이기도 한 것입니다,

선진들은 믿음을 갖고 경주함으로 증거들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2절에서 말하고 있는 증거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증거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 답을 3절이 제시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아주 결정적인 답 제시입니다.

선진들에게 주어진 믿음의 증거들은 바로 말씀으로 지어진 세계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들이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지어진 세계가 아니라 지어진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일체의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선언하신 말씀으로 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려는 영적인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이 지어졌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가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라는 것의 정의는 조금 더 선명해 집니다.

 

1)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보이게 하는 능력입니다.

 

억설로 드리는 교훈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능력입니다.

고린도후서 4:7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보다 더 뛰어나고 우수하고 능력이 많은 자들이 주변에 수없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보잘 것이 없는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셔서 사용하셨는지 도대체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읽어드린 고린도후서 4:7절 말씀을 적용하면 이 수수께끼 같은 실타래가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나는 분명 질 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아니어떤 면으로 보면 질 그릇 보다 못한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이 고백이 정직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질 그릇 같은 존재이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용하시고 나에게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나 같은 존재도 괜찮게 쓰임 받는다는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과정이 눈에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쓰임 받은 질그릇이 바로 나요또 내 옆에 있는 구원받는 동료라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는 사건이요실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런 사실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힘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한 가지만 예를 더 들어 보십시다.

마가복음 5장을 보면 12년 동안 하혈을 하는 여인이 주님의 은혜로 혈루의 근원이 마르는 치료를 경험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구절만 나누겠습니다.

마가복음 5:27-28절을 읽어드립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이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과학적으로 증명합니까?

증명 불가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접근으로 이해해 보십시다.

12년을 혈루 병으로 고통당하던 여인이 예수께서 나오게 된 이유는 나는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병든 질 그릇 같은 나 같은 존재에게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담기기만 한다면 내 질병이 고침을 받을 것이라는 그 무언가가 생겼습니다.

그 무엇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그녀가 갖게 된 이 믿음은 보이는 가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보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 후반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선언한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공동번역으로 3절 후반절을 읽어드립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이 놀라운 신학적 성찰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아마도 그의 영적 멘토였던 바울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한 네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17-18절을 묵상하겠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그렇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보이게 하는 능력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이 믿음으로 무장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믿음이란 말씀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반응입니다.

 

3절 전반절을 읽겠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이 구절은 현대인의 성경 버전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며

기독교의 기적이자 신비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1:1-5절을 소개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태초에 말씀이 존재했습니다.

존재한 그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었고그 생명은 곧 빛이라고 요한복음의 시작은 알립니다.

그 빛이신 말씀이 만물을 지었다고 요한은 적시했습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우리는 창세기 1:3절에 찬사와 박수를 보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 그 자체입니다.

이 권위보다 앞서는 것은 허상이요거짓이요가짜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 안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0:7-9절은 성경 구절 중에서 제게 가장 강력한 충격을 준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시대에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당시 최고의 실력자인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구금하고 린치 하는 폭력을 가했습니다.

조선시대 역모를 꾀하던 자들을 저작거리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참수한 머리를 걸어놓아 경종했던 것처럼 예레미야를 베냐민 문 위층에 묶어 두어 사람들에게 수모를 준 뒤에 방면한 기록을 예레미야서 기자는 기록합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위협과 공포를 경험해야만 했던 예레미야는 깊은 절망과 우울감에 빠집니다이윽고 이 고통을 경험한 뒤에 선포한 메시지가 읽어드린 예레미야 20:7-9절입니다.

특히 20:7절은 대단히 아픈 고백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김기석 목사가 끙끙 앓는 하나님에서 이렇게 이 구절을 해석했습니다.

“‘권유하셨다와 이기셨다는 표현은 지나칠 정도의 순화시킨 번역이다. ‘권유하셨다고 번역한 파타하는 성경에서 여자에게 결혼 전에 성행위를 승낙하도록 설득유도하는 것을 의미한다그리고 이기셨다고 번역된 하자크는 여자에게 혼외정사를 강요하는 것으로서그녀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뜻할 때 사용된다.”(김기석, “끙끙 앓는 하나님”, 꽃자리, 224.)

무시무시한 표현입니다.

왜요?

강간당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하나님이 강제적으로 압박해서 예언의 말씀을 전하라고 해서 전했는데 돌아온 것은 고통이요죽음의 위기였으니 예레미야의 이 고백이 왜 들리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공감됩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는 또 다시 이렇게 갈무리합니다.

예레미야 20:8절입니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정답입니다.

여기까지 충분히 예레미야에게 응원의 응원을 보내고 싶은 것이 저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최종적인 고백이 8절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0:9절에서 끝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이 구절을 연이어 김기석 목사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달콤한 시간은 지나갔고 소태처럼 쓴 시간이 다가왔다대중들의 귀에 단 말을 했더라면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 것이다. ‘파멸과 멸망을 예고하자 사람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그를 조롱하고 박해했다그래서는 그는 다시는 여호와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여호와의 말로 인해 빚어진 현실이니 그 말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으면 괴로움의 시간도 지나가지 않겠는가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이것이 말씀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이다예언자란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이다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자는 외치지 않을 수 없다.”(위의 책, 225-226)

믿음이 무엇입니까?

말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결코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호와의 말여호와의 이름으로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여호와의 말씀에 대해 침묵할 때 엄습하는 괴로움을 느끼는 자가 바로 믿음의 사람이요그것을 느끼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부터 믿음 장 강해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사역을 통해 믿음이라는 단어를 철저하게 개인화시킬 것입니다.

1인칭 객관화시킬 것입니다.

팀 켈러의 말이 정곡을 찌릅니다.

진짜 믿음 언제나 개인적이다만약 당신이 예수가 인류 전체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죽었다는 것을 믿으면서당신을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예수를 믿음으로 붙드는 것이 아니다당신은 예수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없는 것이다.” (팀 켈러, “예수를 만나다.”, 베가북스, 144.)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당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보이게 하는 능력을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당신이 말씀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일 때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선물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 여행을 통해 혹여나 흔들리는 영성이 있다면 바로 잡기를 바라며이번 기회가 믿음이라는 반석을 든든하게 세우는 절호의 기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세상 흔들리고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후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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