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31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38) 본문: 히브리서 10:32-39 제목: 물러서지 마세요. 서론) 故 옥한흠 목사께서 총신대학교 특강에서 새까만 후배들에게 이렇게 피를 토했던 적이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과 전 인격을 사로잡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파워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없다고 할 때 십자가의 설교를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의 이야기를 안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안 보이고, 살아 있는 십자가의 피가 말라버렸다는 이야기에요.”(옥한흠, “옥한흠, 목사가 목사에게 2”, 하온출판사, 198) 이 글을 이번에 출간될 4번째 책에 담았습니다. 정곡을 찔렀던 선배의 말을 추모하며 존경한다는 의미를 담기 위해서입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예수의 이야기를 하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하더라도 내 삶의 여백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으면 그건 진짜 복음이 아니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저를 울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 중에 희석(稀釋)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드물 稀와 풀 釋의 합성어입니다. 국어사전에 기록된 뜻풀이가 이렇습니다. “용액에 물이나 다른 용매를 더하여 농도를 묽게 함” 국어사전적인 의미는 희석이라는 단어가 화학에서 사용하는 단어이기에 거기에 국한하여 설명한 단어 풀이입니다. 하지만 이 희석이라는 단어를 영적으로 해석할 때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목적을 흐리게 함’, ‘변질된 모습’ 등으로 풀이됩니다. 지난 금요일에 묵상한 성서일과는 호세아 9:13절이었습니다. “내가 보건대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이 말씀을 묵상의 메시지로 삼은 이유는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니’라는 호세아의 탄식이 제게 공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날 묵상 노트에 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왜 이 구절이 이렇게 슬프지! 최초의 문서 예언자였던 호세아가 사역했던 장소가 북쪽이었으니, 그도 그럴 만하다는 정서적 동의가 내게도 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부터 광야, 광야에서 가나안까지 이끄셨던 은혜의 복기가 절기(festival)였고, 그 축제의 장이었던 타작마당을 이방적인 제의의 난장(亂場) 장소로 만들었으니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호세아의 표현이 이해가 된다. ‘이중의 열매’ (double fruit)였던 에브라임이 재앙의 대명사인 두로라니!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나 싶다. 변화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이 변질된 종교인으로 추락할 때, 호세아 9:13절은 1인칭 객관화로 적용된다. 언젠가 지체가 한 명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은퇴하실 때까지 변질되지 않는 목회자로 서 주기를 중보합니다. 두렵고 또 두려운 경고다. 캐나다 뉴라이프 커뮤니티의 담임목사 마크 뷰캐넌이 했던 말을 오늘도 다시 새긴다. 몇 개월 동안 읽었던 책 중에서 당신에게 가장 해로웠던 책이 무엇인가? 나는 성경이었다. 성경에 기록된 ‘다바르(선포된 말씀)’가 내게 ‘레마(들려진 말씀)’로 전해지는 감동이 중단되는 날, 나는 변질된다. 100%. 그래서 나는 오늘도 호세아 9:13절 앞에서 벌벌 떤다.” 우리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에서 떠나면 말씀이 들려질 리 없습니다.(레마)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영적으로 희석되고 희석되면 100% 변질됩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 율법주의로 다시 퇴보하여 과거로 회귀하려는 배교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본문 32-3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조금 이해하기가 어려워 보여 공동번역 성경으로 이 구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여러분은 처음에 빛을 받고 나서 많은 고난의 도전을 받으면서도 견디어내던 시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는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된 사람들도 있고 그런 형편에 빠진 사람들의 친구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동정했고 또 자기 재산을 다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일을 기쁘게 당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갖게 되었던 첫 사랑의 술회입니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첫사랑의 감격을 떠올리면 이러하지 않았습니까? 거의가 대동소이합니다. 고난이 임하면 그 고난으로 인해 도리어 기뻐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동역자들이 예수 때문에 힘에 겨운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 그런 동료들을 위해 중보하고 위로하며 박수를 쳤던 시절이 바로 첫사랑의 감격을 경험했을 때였습니다. 주님을 위해 경제적인 고난을 받게 되어도 움츠리지 않았습니다. 더 큰 하나님의 위로와 영원히 놓치지 않을 하늘의 보화가 예비 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저자가 배교 직전에 있었던 수신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왜 상기시키고 있습니까? 그들이 이 첫사랑을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이 첫사랑의 감격이 희석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전수정교회에서 사모로 목회하는 후배가 얼마 전에 전화로 안부를 묻는 어간,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영원한 선생님으로, 영원한 목사님으로 옆에 계셔주세요.” 후배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남아 있어 함께 은혜를 공유한 멘토십의 대상이 주변에 없기 때문임을 제가 잘 압니다. 왜 수많은 사람들이 첫사랑의 감격을 상실했습니까? 왜 이전에 빛을 받은 사람들이 그 빛을 잃어버렸습니까? 10:26절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왜 ‘진리(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받은 자들이 짐짓 죄를 범하는 자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타락했으니 교회에 염증을 느껴 나도 신앙을 버렸다고. 혹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목회자가 너무 말과 삶이 맞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을 갖고 있기에 실망해서 나도 신앙의 근간을 버렸다고. 어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은 걸 보니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신앙을 떠났다고.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모두의 공통점은 자기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기 싫어 타자에게 그 탓을 돌리는 비겁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신앙의 첫사랑을 버리고 믿음이 희석된 이유를 두 가지로 진단합니다. 1)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그 구원의 은혜를 저버렸기 때문이다. 본문 35-3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이 구절이 시사하는 메시지는 대단히 엄중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본서를 통해 줄곧 선포했던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옛 언약의 불완전성을 극복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 되심이었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성소에 들어가셔서 단 번에 당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심으로 인해 다시는 우리가 죄를 속량 받기 위한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는 새 언약의 선언이었다고 했습니다. 왜 히브리서가 작성되었습니까? 이 새 언약의 약속을 버린 자들을 다시 깨우치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합니다.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어떤 담대함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구원하심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주후 60년대에만 통했던 약속이 아닙니다. 이 약속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중입니다. 앞에서 잠시 열거했듯이 믿음의 첫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이유는 나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게 주었던 구원의 약속과 변하지 않는 은혜를 저버린다는 것이 정당화될 수 없으며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가시적 교회는 불완전한 것이기에 바람직한 교회론 대로 움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에 대한 심판은 훗날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저버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본말전도입니다. 목사가 이율배반적으로 살아 실망해서 믿음을 버렸다는 점도 일견, 아프지만 동의가 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것은 진정성이 없습니다. 그런 미련한 선택을 왜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은 목사에 대한 심판은 주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정금보다 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 36절의 한 구절이 두려움으로 오지 않습니까?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약속하신 은혜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히브리서 저자의 일설이 두렵지 않습니까? 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지켜가는 자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해 주신 구원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담대함을 버리지 않습니다. 2)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문 37-38절을 보겠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하박국 2:3-4절의 인용합니다. 하박국 2:3-4절을 소개합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가 잘 알거니와 예언자 하박국은 위기에 처해 있었던 유다를 향해서 하나님의 묵시를 선포합니다. 하박국은 왜 하나님께서 유다보다 못한 바벨론을 이용해서 유다를 압제하게 하셨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나님께 던집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께서 제시한 것이 하박국 2:3-4절입니다. 이렇게 해석이 가능합니다. 유다가 멸망을 당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종말, 즉 심판의 때도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심판의 시기에도 살아남는 자들이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 사람이 의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의인이라는 존재를 이렇게 묘사한 것은 아브라함 이후 두 번째인데 그날에 살아남을 자는 믿음이 있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그래서 하박국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합 2:4) 그렇다면 살아남을 자가 갖고 있는 믿음이 무엇이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이며, 그 심판하실 분이 오래 지체하지 않고 오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가 주후 60년대에 작성되었다고 했습니다. 지리적 배경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근동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바울의 신학적 사상을 따라갔던 히브리서 저자도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긴장감을 붙들려고 노력했음이 분명합니다. 바울도 주님 재림의 임박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고, 그를 따르던 히브리서 저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37절은 그 의미의 진정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도 하박국의 이 예언적 선언을 본문에서 그대로 인용했던 것입니다. 이유는 구약의 예언서를 믿고 있는 배교 직전에 있는 자들을 구약적인 메시지로 경성하기 위함이었고 또 하나, 세 언약을 주시면서 구원의 영원성을 약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기독교신앙의 핵심적 가치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 텍스트를 마감하는 장면에서 저자는 두 번에 걸쳐 의미 있는 문구를 남깁니다. 다시 한 번 38-3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어떤 문구가 보이십니까? 물러서지 말라는 문구입니다.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앞에서 레마로 제시한 두 가지 신앙인의 정체성을 놓치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결코 이 두 가지를 희석시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 두 가지의 신앙의 본질에 대한 믿음에서 물러서지 말라고 종용합니다. 이제 우리는 설교를 통한 은혜를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습니다. 오늘 본문 해석을 통해 두 가지를 나누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을 버리지 말 것을, 동시에 그 분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재림의 은혜 역시 버리지 말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시고, 그 분은 믿는 우리들을 위해 반드시 다시 오시는 분이라는 믿음에서 물러서지 말라는 권면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결단코 포기하거나 희석시키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과 하실 일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래 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고기 잡는 것이 직업인 한 크리스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 그의 할아버지는 바다에서 죽었습니다. 아버지도 역시 바다에서 죽었습니다. 젊은이는 장례식을 마치고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강력하게 말렸습니다. 그 젊은이는 말리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의 할아버지는 어디에서 돌아가셨니?” “침대에서 돌아가셨지.” “너의 아버지는?” “역시 침대에서 돌아가셨지.” 그러자 이 젊은이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침대가 무섭다고 다시는 침대에서 자지 않니? 우리 크리스천들은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나는 나의 사명지인 바다로 갈 거야. 그리고 그 곳에서 노래하다가 언젠가는 나도 바다에서 죽을 거야.” 그리스도인들은 운명론을 믿지 않는 자들이라는 이 젊은이의 말이 제 심비에 새겨졌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결국 그리스도인의 경주는 믿음의 경주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상황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본질적 은혜를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싸움입니다. 이것을 일찍이 알았던 바울이 그래서 이렇게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선포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2-24절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사명선언에서 물러서지 않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외롭고도 쓸쓸한 모습 말없이 홀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을 다 버린 나그네 정녕 그 분이 내 형제 구원 했나 나의 영혼도 구원하려나 의심 많은 도마처럼 물었네 내가 주를 처음 만난 날 내가 다시 주를 만났을 때 죄악으로 몹쓸 병든 몸 조용히 내 손 잡아 이끄시며 병든 자여 일어나거라 눈물 흘리며 참회 하였었네 나의 믿음이 뜨거웠었네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내가 이제 주를 만남으로 죽음의 길 벗어나려네 변찮는 은혜와 사랑 베푸신 그 분 만이 나의 구세주 주 예수 따라 항상 살리로다 십자가 지고 따라가리라 할렐루야 주를 만난 이 기쁨 영광의 찬송을 돌리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