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자.2024-03-07 16:52
작성자 Level 10

2022 7 17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36)

 

본문히브리서 10:23-25

제목이것도 행하고저것도 행하자

 

서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학위 과정을 할 때복음서 해석이라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마가복음에 기록된 한 기사를 해석하던 담당 교수의 해석을 들으면서 대단히 혼란스러웠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게 뭐지라고 질문하며 깊은 고민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 옛날의 추억담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마가복음 1:21-28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제가 교우들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신약성경 안에 들어와 있는 4개의 복음서 중에 가장 권위가 있는 복음서는 가장 먼저 문서로 기록된 마가복음입니다.

그러니 지금 읽어드린 가버나움에서 귀신들린 자를 축귀하신 예수님의 사역도 여타 다른 복음서가 살을 붙인 것임을 감안할 때이 본문이 가장 권위 있는 본문일 것은 자명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이 기사를 설명 드린다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행하셨던 주요 사역인 병든 자를 고치는 치유 기사 중에 초창기 사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통상 베드로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마침 그 회당에 머물고 있었던 귀신들린 자를 당신의 권위로 치유하신 기사입니다.

이 기사의 꼬리를 잇고 있는 담화를 보면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신 이후가버나움의 영적 기상도가 통째로 흔들렸음을 마가복음 저자는 보고합니다.

이 기사를 소개한 담당 교수는 이 담론에 대해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의 귀신 축출 기사는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종교적 기득권 세력에게 핍박을 받아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하던 정신병적인 질병에 걸려 시달리고 있던 갈릴리 지역에 살고 있었던 한 민중의 고통을 예수님께서 해방시켜준 쾌거를 보고하는 기사다.”

담당 교수는 결국 착취를 당하는 그룹(갈릴리지역)에서 겪는 엄청난 정신적인 고통을 정신병리 현상으로 이해했고그 정신병적인 고통 중에 하나인 귀신들림 현상에 허덕이는 그 지역의 민중을 해방시켜준 자가 바로 해방자 예수라는 해석이었습니다.

제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뭐 당연한 하나의 신학적인 해석 방법이고이 해석은 기존의 해석보다는 대단히 진보적인 해석이라고 이해하는 것으로 그쳤을 텐데당시 진보적인 해석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교수의 해석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던 자유주의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했기에 이 대학원에 잘못 입학했구나하는 멘붕에 빠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제가 알고 있었고정답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이 본문에 대한 이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들을 쫓아냈다는 것 말고는 다른 해석의 여백을 용인하지 않는 촌스러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기에 신약 교수의 해석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추억담을 들려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울어져 있다는 사고가 얼마나 무지하고 위험한가에 대하여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젊은 시절편두통으로 너무 고통을 받았을 때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던 적이 있었음을 일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제 편두통을 치료하던 신경과 주치의 원장이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목사님머리가 아프시면 약을 두려워하지 말고 드셔서 그냥 통증을 완화하는 게 상책입니다다른 방법이 없습니다왜냐하면 두통의 요인이 지금까지 알려진 보고에 의하면 약 10,000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두통의 원인이 바로 이것 때문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 없다는 것을 에두른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도 매일반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성경해석은 없습니다.

어느 구절은 성경 중심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또 어떤 구절은 상황 중심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무시하고 한 가지 성경 해석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주의적인 발상이요축자적인 고집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도 균형이 중요합니다.

본문 해석도 이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본론)

 

우리는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직접 들어가셔서 당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 인해 다시 제사를 드릴 것이 없는 은혜를 받은 자임을 나누었습니다.

재 강조하지만 이 은혜의 수혜자들은 히브리서 수신자들뿐만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은혜를 받은 자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하며 실천해야 할 성도로서의 의무를 본문에서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⓵ 사회적인 책임 감당입니다.

본문 23-2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 선언은 매우 놀라운 선언입니다.

왜 그럴까요?

약속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직접 당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약속을 주신 것뿐만이 아니라미쁘시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미쁘다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피스토스는 믿을 만하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신뢰가 간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신뢰해도 되는 분이십니다.

믿을 만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한 믿음의 주체이신 분입니다.

이런 주님의 속성을 히브리서 저자가 이렇게 연이어 표현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믿음을 갖고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소망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을 이렇게 소개하면서 대단히 의미 있는 권면을 남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고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 구절은 히브리서 저자가 히브리서를 읽고 있는 신앙공동체만을 국한해서 선언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 내용은 이 설교문(히브리서)을 듣고 있는 주후 1세기 로마 주변에 있었던 신앙공동체와 더불어 그 지역에서 공존하고 있는 교회 밖의 이웃공동체 전체를 아울러서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교회 안은 물론이거니와 교회 밖의 그들까지 포함하여 서로 돌아보고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라고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칼 트르먼 교수가 했던 말을 소개합니다.

진정한 정치(그 이름에 걸 맞는 정치), 즉 내가 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고자 하는 유일한 정치는 한 마디로 주위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그것은 지역 사회를 섬기는 것이며우리를 보고 뒤따를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그 정치의 가장 깊은 뿌리들은 도덕적이어야 한다그것이 전체를 향하여전체를 위하여행동을 통하여 표현된 책임이기 때문이다.” (칼 트루먼, “진보보수 기독교인”, 지평서원, 189-190)

트루먼의 이 글을 만난 지가 오래되었는데 노트해 놓은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정치를 거론했지만결코 정치가 이런 방향성으로 가고 있지 않음을 고발한 메시지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트루먼이 말한 메시지의 정반대로 흘러가는 집단입니다.

왜냐하면 정치는 트루먼의 바람에 부합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는 이익집단들의 이기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제가 트루먼의 이 지적을 곱씹는 이유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트루먼 교수의 갈파에 이렇게 단어 하나를 바꾸면 적절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정치라는 단어를 교회라는 단어로 대체하여 읽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그 이름에 걸 맞는 교회), 즉 내가 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고자 하는 유일한 교회는 한 마디로 주위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그것은 지역 사회를 섬기는 것이며우리를 보고 뒤따를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그 정치의 가장 깊은 뿌리들은 도덕적이어야 한다그것이 전체를 향하여전체를 위하여행동을 통하여 표현된 책임이기 때문이다.” 

이런 섬김을 위해 교회는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을 저는 교회가 가져야 하는 사회적 책임의식이라고 정의합니다.

웨슬리 신학자인 김홍기 교수는 웨슬리가 말한 크리스천의 기업적 윤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음을 인용합니다.

고용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업을 운영해야 하며반드시 크리스천으로서의 기업 정신곧 고용인을 착취하지 말고함께 이익을 나누어 갖는 사랑의 정신으로 경영해야 한다.” (김홍기, “존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 대한기독교서회, 199.)

이 땅에 존재하는 많은 진보적인 교회들이 이 일들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해서 지금도 진보적 성향의 교회들은 사회적 책임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와 성도들이 놓쳐서는 안 되는 미션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귀한 교회와 성도의 역할이 사회적 책임이기는 하지만 주의할 것은 교회와 성도가 이 사역에만 매몰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 사역과 더불어 반드시 또 한 가지의 미션을 수행해야 합니다.

 

⓶ 예배하는 공동체와 그 일원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본문 25절을 나누겠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 익숙하게 알려진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 담겨 있는 모이기를 폐하다.’라는 문구를 런던 바이블 칼리지의 D, 거쓰리 교수의 말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말은 아마 예배를 가리킬 것이다비록 예배라는 단어를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모임을 의미하는 에피쉬나고게는 종교적으로 완전한 모임을 의미하기에 말이다.” (거쓰리, “틴데일 신약주석 15-히브리서”, CC, 316.)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일련의 무리들이 교회 공동체 예배의 무용론이나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예배를 방해하려는 것에 대해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왜 사수해야 하며지켜 나아가야 합니까?

저자는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그날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날이 가까이 와 있는 영적 상태에서 예배는 성도의 의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 신학적으로 정의를 말한다면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두 개의 예배 정의 문장을 소개합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신앙 안에서의 인간들의 인격적인 정성어린 응답이다.” (플랭클린 지글러)

예배란 신실한 신앙인이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존엄성을 인식하고 살아 있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엎드리는 것이다.”(로버트 레이먼)

그렇습니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배는 주군이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인격적 반응입니다.
그런데도 히브리서 저자가 이 설교문을 작성할 때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근동에 교회 공동체 안에 예배하기를 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저자는 이것을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지성소에 직접 들어가셔서 당신의 몸을 제물로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하심에 반응하는 예배를 폐하는 것에 대해 조금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히브리서 저자는 단호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모이기(예배)를 폐하는 자들과는 습관을 같이 하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제가 앞에서 예배 신학적인 정의를 말씀드렸습니다.

학문적으로 정의하려면 언어를 통한 이론 정립이 절대적인 필수요소이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예배 정의를 소개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리얼하게 예배드림에 대한 의미를 표현하겠습니다.

저는 주일을 준비함에 있어서 최대의 집중력을 동원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요소가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예배입니다.

예배드림의 후담들이 제게는 대단히 민감한 사항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배가 살아 있는가죽어 있는가의 바로미터가 성도들의 후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우는 이렇게 소감을 피력합니다.

목사님아주 가끔은 격려하는 말씀이 듣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일주일성도들이 살아온 현장에서 매우 힘든 일들을 경험하고 교회에 나오기 때문입니다지친 마음으로 교회에 나왔는데 목사님이 전하는 메시지 중에 위로가 담겨 있으면 힘을 얻고 돌아갑니다위로의 메시지를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또 어떤 교우는 이렇게 전언해 줍니다.

목사님일주일을 살면서 내가 처해 있는 현장에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소리에 타협했습니다정말로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으로 주일 예배 후에 예배당을 빠져 나왔는데현실의 무게에 또 무너졌습니다이런 절박함으로 주일 예배에 참석했습니다허나 목사님이 설교를 통해 지난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수고했느냐고얼마나 고생했냐고너무 수고했다고 위로하는 메시지를 듣노라면 화가 납니다내가 실패했으니까 말씀이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이 다시 경종시키는 벼락과 천둥소리를 듣고 싶은데 성도들이 상처를 당할까봐 어르고 달래는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나를 두 번 힘들게 하는 소리로 들려 화가 납니다.”

또 익명의 성도가 이렇게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예배 시간성경봉독을 하는 순서에 자리에서 기립할 때나는 지금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 들어와 있는 임재의 감동을 받습니다.”

또 다른 지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주님의 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세상의 신을 벗고서 주 보좌 앞에 엎드리리/내 주를 향한 사랑과 그 신뢰가 사그러져 갈 때/하늘로 부터 이곳에 장막이 덮이네’ 예배에 들어와 이 임재찬양을 드릴 때얼마나 기쁘고 감사한지 모릅니다나는 이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전 존재를 느낍니다.”

또 다른 교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배 시간회중 대표기도 순서를 맡은 지체가 준비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때 너무나 큰 은혜와 감동을 받습니다.”

표현 자체가 서툴러서 그렇지교우들이 예배를 통해 느끼는 소회들이 어디 이런 것뿐이겠습니까?

아이든 토저가 이렇게 불의 사자후를 던진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동정녀에게 탄생하시고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반역자들을 예배자들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아이든 토저, “진짜 예배자”, 생명의 말씀사, 13.)

무슨 말입니까?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고우리들로 하여금 다시는 죄로 인해 제사를 드릴 것이 없도록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저와 여러분의 예배의 이유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예배를 폐하는 자들과 습관을 같이 한단 말인가를 히브리서 저자가 경고하며 선포한 것이 본문 25절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제 우리는 본문 설교를 위해 서두에 드렸던 문제제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예배를 성도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미로 가르치는 영역이 보수적 복음주의라는 영역입니다.

반면전술했듯이 성도가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미션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영역이 진보적인 영역입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의 언어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는 사회개혁적인 진보적 기독교의 가르침인 반면, ‘모이기를 폐하는 그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는 복음적인 보수적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세인교회는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사역에 더 힘을 써야 합니까?

그 답을 오늘 설교의 레마로 정했습니다.

 

※ 이것도 행하고저것도 행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기울어진 운동장의 상황을 교회가 만드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치적 영역에 있는 자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한 영역으로 들어가야 살아남습니다.

태생적으로 그렇습니다.

하지만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적어도 크리스티아노스들은 본문 24-25절중에 그 어느 것도 포기해서는 안 되며 놓쳐서도 안 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않는 삶도 살아야 합니다.

결코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하나에만 기울어지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날이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호수아 1:7-8절을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께서 특별계시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도 행하고저것도 행하는 것입니다.

그날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가진 재물 없으나/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기울어지지 않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