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0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35) 본문: 히브리서 10:19-22 제목: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서론) 오늘 주일도 시 한편 읽으며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너, 너무 잘 하려고 애쓰지 마라 오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했다 조금쯤 모자라거나 비뚤어진 구석이 있다면 내일 다시 하거나 내일 다시 고쳐서 하면 된다 조그만 성공도 성공이다 그만큼에서 그치거나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고 작은 성공을 슬퍼하거나 그것을 빌미 삼아 스스로를 나무라거나 힘들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많은 일들과 만났고 견딜 수 없는 일들까지 견뎠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오히려 칭찬해 주고 보듬어 껴안아줄 일이다 오늘을 믿고 기대한 것처럼 내일도 믿고 기대해라 오늘의 일은 오늘의 일로 충분했다 너, 너무도 잘 하려고 애쓰지 마라 (나태주, “너무 잘 하려고 애쓰지 마라”, 열림원, 80-81.) 언젠가 친한 친구 목사가 정색을 하며 제게 이렇게 충고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 내가 정말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말라. 우리 나이에 너처럼 하다가 조기 사망한다. 명심해라.” 누님이 근래,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주일이면 제가 꼭 누님께 안부 전화를 넣는데, 요 근래 제게 이렇게 말하는 빈도가 많아졌습니다. “요한 아빠야, 이제는 나이를 생각하고 목회해라. 누나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사역 내용을 보면 마음이 조인다. 건강 생각해야 돼.”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차준희 교수가 환갑 기념 노숙자 섬김을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제게 말했습니다. “이 목사, 우리 나이가 육십을 넘었다고 주눅들 필요가 없어. 나는 지금이 목사로서 사역의 전성기라고 생각해. 가장 성숙한 때이잖아!” 어디에 장단을 맞추어야 하는지 아주 가끔 헷갈립니다. 지역 교회를 목회하면서 잘 하고 싶지 않은 목사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목회를 잘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정상적인 목사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생각이자, 조금 거창하게 이야기를 하면 거룩한 욕심입니다. 소개한 나태주 시인의 시를 읽다가 스스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목회를 너무 잘하려고 욕심을 낸 목사인가? 그리고 자답했습니다. 적어도 젊은 목사 시절에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잘하려고 하는 마음은 오십보백보입니다. 하지만 엄격한 잣대로 말씀드린다면 지금의 저를 보면 잘 하려고 하는 방향성이 젊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지금 제가 정말로 더 잘하려고 하는 것은 목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목사,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더 잘 하려는 목사, 말씀을 통해 주님의 뜻을 더 정확하게 알려고 몸부림침을 더 잘 하려고 하는 목사라는 것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주님과의 관계를 더 잘 가지려고 하는 삶은 아마도 신앙의 연륜이 그렇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향성으로의 진입에 대하여 호도하거나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고자 해서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면그것은 호도이며 착각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잘 갖도록 이끄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길로 진입할 수 있도록 먼저 그 길을 내어주신 분도 주님이십니다. 본론) 오늘 읽어드린 본문은 히브리서 총 13장의 구절 중에 히브리서의 주제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구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구절입니다. 본문 19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10:19절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친구 여러분, 이제 우리는 주저함이 없이 곧바로 하나님께로, 성소 안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으로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는 마음 놓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만 더 다른 성경버전을 소개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번역입니다. “형제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떳떳하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거한 성경 번역의 부사들에게 주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저함 없이, 마음 놓고, 떳떳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보고들이 오늘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감동을 줍니다. 이미 살폈지만,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7월(이스라엘 월력으로 7월은 새해) 1-10일까지 속죄기간을 보냈습니다. 공동체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한 기간이었습니다. 특별히 7월 10일은 ‘욤 키푸르’(대속죄일)이었기에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이 날, 집단적인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죄 사함의 은총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집중해야 했습니다. 7월 10일, 대제사장이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 때에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레위기 16장에 기록된 대로 자기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해 더 좋은 제물(숫염소 두 마리, 숫양 한 마리, 속죄제를 위해서는 수송아지)을 잡아야 했고, 규율도 엄격했습니다. 레위기 16:12-14절입니다.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이런 규칙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대제사장은 목숨을 잃게 되는 엄중한 미션이 욤 키푸르의 미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칠고, 번거롭고, 비장한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욤 키푸르의 사역이 어떻게 변화되었다고 히브리서 저자가 본문에서 역설하고 있습니까? 주저함 없이, 마음 놓고, 떳떳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보고합니다. 누가 이 혜택의 주인공들입니까?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다시 본문 19-20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휘장이라고 역설합니다. 더불어 휘장으로 가려져 있기에 자유롭지 못했고 볼 수 없었던 지성소, 그래서 1년 딱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던 바로 그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자리인 지성소를 우리는 오늘 주저함 없이, 마음 놓고, 떳떳하게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휘장 그 자체이셨던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 즉 휘장을 찢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엄청난 은혜를 베푸신 주님으로 인해 저와 여러분이 받게 된 복이 있음을 저자는 말합니다. 담력입니다. 헬라어 ‘팔레시아’의 번역인 ‘담력’을 문자적인 의미로 적용한다면 ‘자신감’(confidence) 혹은 ‘견고함’(boldness)입니다. 우리가 자신감과 견고한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지성소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본문 21절입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이처럼 주께서 계시는 지성소를 막아놓았던 휘장이 열려졌기에 이제 우리들은 한 가지만 행하면 됩니다. 본문 22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 구절에 오늘 주일 설교의 레마가 담겨 있습니다. ※ 열려 있는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전에는 두려움 때문에 지성소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락된 자도 대제사장 한 사람이었습니다. 지성소는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제한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열려 있는 공간이 지성소입니다. 이 지성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한 지역인 예루살렘에 위치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는 지성소는 거룩한 성전인 우리 몸에 있습니다. 더불어 여러분이 예배하는 지역적 공간인 서부동 내토로 15길 23번지에도 있습니다. 어떤 지성소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한 가지를 해야 합니다. 그 지성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역설합니다. 두 가지를 겸비하라고 말입니다. 참 마음과 믿음입니다. 이 중에서 두 번째의 요소인 믿음은 다음 강해의 텍스트인 11장인 믿음 장에서 심도 있게 다룰 것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가져야 할 요소 ‘참 마음’에 대해 잠시 생각하려 합니다. ‘참 마음’(알레씨네스 칼디아스)이라는 이 단어를 어원적으로 해석하면 ‘힘차게 고동치는 심장’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을 설교적인 용어로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뜨거운 심장’이라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가져야하는 요소는 뜨거운 심장으로 예배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의 감동이 1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고 온 예배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은혜를 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이 1도 없습니다. 비극입니다. 우리 모두는 일주일의 삶의 정황 안에 있었기에 지난 일주일 동안 만 가지의 일을 경험하고 당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지난 시간의 쓰라림을 가슴에 담고 하나님의 지성소로 오늘 나왔습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나의 삶의 흔적을 아시고, 내 이름까지 세신 바 된 하나님께 나아왔는데 뜨거운 심장이 없다면 그건 재앙이지 않겠습니까? 지난 화요일, 소그룹 성경공부 지체들에게 제가 받은 은혜를 공유하도록 이 말을 전했습니다. ‘여기에 물이 있다’ 7월 3일 주일 묵상 노트의 내용입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이사야 66:1-14, 열왕기하 5:1-14, 갈라디아서 6:1-16, 시편 30편, 누가복음 10:1-11, 16-20 꽃물 (말씀 새기기) 열왕기하 5: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의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신앙의 자존감을 보여준 엘리사의 영적 자존감에서 전율하는 감동을 받는다.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단문이지만 살 떨리는 이 문장에서 목사인 나는 이론으로 형용하지 못하는 두려움과 용기를 겹 가지로 얻는다. 왕(세상)이 떨고 있는 일체의 상황을 뒤집어엎는 엘리사의 말 한 마디, ‘그 사람을 내게 오게 하소서’에서 세상이 절대로 엄습하지 못하는 주존심의 은혜 때문에 뭉클 한다. 두레박 (질문) 교회가 흔들리고 목사가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 말씀대로 살지 못함에서 오는 영적 권위의 추락 때문이다.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정직하게 살아 엘리사에게서 보여주신 주존감의 은혜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나비물(말씀의 실천)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아만들에게 내게로 오라고 말할 수 있는 담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또 그를 치유할 수 있는 선한 능력을 부여 받을 수 있도록 나를 쳐서 복종시키자. 하늘바라기 세속적 가치의 고집에 묶여 있는 이 땅의 나아만들을 품게 하옵소서. 저는 주일을 준비하면서 언제나 이 마음을 갖습니다. 영적 주존감(主存感)입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말씀을 준비하겠습니다. 예배 시간의 사역을 통해 교우들이 전무했던 은혜를 받게 하옵소서. 세상이 결코 알려주지 않는 그리고 엄습하지 못하는 은혜가 쏟아지는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주일 예배 준비는 버거운 일이고, 지난한 일이며, 긴장되는 사역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주존감으로 무장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줄 수 있는 것을 교회에서 준다면 도대체 신앙생활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이 훨씬 더 세련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훨씬 더 부가가치가 높은 질 좋은 서비스를 고객들에게 줍니다. 세상은 상대적으로 교회가 경쟁할 수 없는 고가의 상품 서비스를 주는 공간이자 영역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는 이 마음에서 조금도 물러설 의향이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함몰되어 있는 저들을 내게로 보내십시오.” 무슨 배짱입니까? 배짱이 아닙니다. 엘리사를 응원하셨던 하나님은 2022년 7월 10일 제천세인교회의 열려 있는 지성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이강덕 목사를 응원하실 것을 믿는 주존감 때문입니다. 목사만 이 뜨거운 심장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바랍니다. 우리 세인 지체 모두가, 이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열려 있는 지성소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필립 얀시가 달라스 윌라드에게 질문했던 말을 곱씹습니다. “목사님,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달라스 윌라드가 말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은혜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소위 세간에서 말하는 엄마부대 일당들이 독일로 넘어가서 독일에 설치되어 있는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원정 시위를 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그들이 독일에서 펼쳐 보인 플랜카드의 문구는 이것입니다. ‘Stop Comfort Women fraud.’ 번역하면 ‘위안부 여성 사기극을 중단하라’ 정도로 풀이하면 됩니다. 소위 말하는 엄마부대 일당들이 이렇게 담대한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정신병자들이든지, 아니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무식한 자들이든지. 아뿔사, 정신병자들도, 무식한 자들로 이 정도로 담대합니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담력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예수께서 열어놓으신 지성소로 더 가까이 나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나아 와서 세상은 하늘이 두 쪽이 난다하더라도 결코 줄 수 없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를 맛보는 주인공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강덕 목사는 엘리사처럼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의 마음으로 예배를 준비하고, 세인 지체들은 지성소에서 내릴 은혜를 사모하여, 우리 교회는 날마다 ‘욤 키푸르’의 감격을 맛보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연속해서 찬양을 드리고 기도합니다. 주께 가까이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간절히 주님만을 원합니다 채워주소서 주의 사랑을 진정한 찬양 드릴 수 있도록 목마른 나의 영혼 주를 부르니 나의 맘 만져 주소서 주님만을 원합니다 더 원합니다. 나의 맘 만져 주소서 주께 가오니 주께 가오니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내 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