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령의 일하심에 민감 하자.
본문: 요한복음 14:16-17
서론)
지난 주간에 정승철 집사의 아들, 지온이의 돌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낳은 아들이라 너무 귀하고 귀한 아들인 지온이임을 알기에 최선을 다해 강복하는 돌 예배를 인도하고 돌아왔습니다.
예배 설교 시간에 사무엘상 1:21-24절을 택해 지온이를 낳은 부모들에게 권면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한나는 자식이 없어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남편 엘가나는 자식이 없는 한나를 위로했지만 그 위로는 근본적인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한나는 정면 돌파하기로 마음먹고 실로에 있는 성소에 올라가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주의 종으로 드리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 사무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한나는 남편 엘가나에게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말하자 엘가나가 허락을 합니다.
이 때 두 부부가 행한 행동을 사무엘 기자가 이렇게 기록을 남겼습니다.
사무엘상 1:23-24절입니다.
“그의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좋은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의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에 그 여자가 그의 아들을 양육하며 그가 젖떼기까지 기다리다가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이 구절을 여러분은 어떻게 읽으셨습니까?
그냥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 읽으셨습니까?
그렇다면 조금 유감스럽습니다.
저는 지온이 돌 예배 설교 시간에 부모들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지온이를 신앙인으로 만들어가는 일체의 시간을 보내면서 비신앙적인 일이 닥치면 신앙을 갖고 있는 부모로서 타협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 있어서 결코 양보하지 말 것을 말입니다.
루터란 대학교의 랄프 W. 클레인 교수는 젖을 떼었다는 시기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제 2 마카비서 7:27절로부터 판단하자면 고대 어머니들은 삼년 동안 자녀를 양육했을 것이다. 한나도 삼년의 양육이 끝났을 때 각종 제물을 가지고 사무엘을 실로로 데려갔다.” (랄프 W. 클레인, “사무엘상-WBC 주석”, p,50.)
이제 막 세 돌을 지난 아들을 나실인으로 드리기 위해 아들을 성소로 데리고 간 한나의 마음을 헤아려 보십시다.
가장 예쁜 짓을 많이 하고 부모의 돌봄이 필요한 나이인 세 살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린 엘가나와 한나가 어떻게 보입니까?
비정한 부모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성경은 세속적 관점을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영적인 시각을 선포하고 재현하는 책입니다.
마음이 변하기 전, 하나님께 드린 약속이 변질되기 전 아들 사무엘을 드린 그의 부모들은 아들이 세속적인 모드에 동화되지 않도록 결단한 것입니다.
왜 이 메시지를 돌 예배에 전했을까요?
지온이가 살아가야 하는 날에 대한 영적 기상도 때문입니다.
부모들은 지온이가 지혜가 있는 아이, 온유한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온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조금 예민한 예측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지온이와 그의 또래들이 살아내야 하는 삶의 시간들은 모르긴 몰라도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와 온유함을 갖고 살아갈 때 응원하고 박수를 쳐주는 시대가 아니라는 우울함이 예상되는 시대입니다.
호모 데우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지온이 살아가야 하는 시대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지식=성경×논리라는 공식이 지식=경험적 데이터×과학으로 이동한 시대”(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p,327.)
어떤 의미로 보면 대단히 명쾌하고 선명한 철학을 제시해 주는 것 같습니다.
대단히 우수한 현대적 감각의 이해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현대인들이 이 공식에 열광합니다.
특별히 성경을 배제하고 탈락시켰다는 점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분위기가 오늘이고 앞으로 지온이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시대입니다.
문제는 ‘데이터×과학’ 시대에는 신학적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신학적 윤리가 존재하지 않는 터널의 끝에 무엇이 존재할까 라고 질문하는 것은 상상하는 것조차 매우 두렵고 걱정스럽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비극은 ‘하지 말라’의 성경적 진리 모드가 ‘모든 것이 가하니 하라’로 변질된 괴물들이 헤게모니를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해서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 시대의 인본주의 시대의 윤리를 이렇게 짧은 단문으로 정의했습니다.
“인본주의 윤리학은 ‘좋게 느껴지면 해라’이다.” (위의 책,p,325)
가장 그럴듯한 언어유희로 인간의 랜덤을 선동하는 시대가 성큼 왔으며 어쩌면 이미 장악한 시대가 오늘일지 모릅니다.
본론)
본문 요한복음 14:1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세상’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코스모스’는 지극히 세속적인 영역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요한이 소개한 예수님의 일성이 크게 와 닿는 이유는 ‘코스모스’가 오늘 우리들이 발을 딛고 있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영역으로 더 강력하게 확장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기막히게 적용됩니다.
진리의 영을 받지 않는 세상, 진리의 영을 보지도 못하는 시대, 알지도 못하는 시대라고 주님은 강조하셨습니다.
허나 반전이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진리의 영을 안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당신과 나와 함께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특권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유일한 특권입니다.
본문 1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주님은 아버지께 간구하여 나를 대신하여 사역을 감당할 보혜사(파라클레토스)를 보내주도록 할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이 보혜사의 정체를 이어지는 요한복음 14:26절은 이렇게 밝힙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보내실 보혜사는 제 삼위의 하나님이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한다면 성령 하나님을 보게 되는 특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약속과 더불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질 또 다른 은혜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구절에서 또 하나 발견해야 하는 감동의 은혜는 이것입니다.
다시 본문 17절을 읽을 텐데 이번에는 표준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를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안다. 그것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메네이-현재 시제)는 은혜를 말씀드렸습니다.
헌데 17절 마지막 단어는 은혜를 배나 선사합니다.
‘계실 것이다.’ (에스타이-미래 시제)가 주시는 감동입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은 성경 당시의 그리스도인에게만 주어진 특권과 은혜가 아닙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클라이맥스는 2000년이라는 시간과 이스라엘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은혜입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 우리 세인 지체들이 받아야 하는 레마를 이렇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 나와 당신을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지금도 일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을 민감하게 체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사기 6:3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기드온이 우여곡절 끝에 미디안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사사로 부름 받고 출정을 합니다.
기드온이 싸워야 하는 적군은 만만치 않은 미디안, 아말렉이라는 연합군 135,000의 대군이었습니다.
이들과 맞설 기드온의 군사는 300명뿐입니다.
무려 450:1의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전쟁의 결론이 어떻게 나왔습니까?
1의 승리였습니다.
이걸 믿으라는 것이냐고 반문해도 됩니다.
이론적으로 군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이 1의 승리를 적시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앞서 소개한 6:34절이 그 해답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임하시니’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바쉬’ 의 원 뜻은 ‘옷을 입는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직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전 인격이 성령으로 옷 입게 되었다.”
이런 은혜를 경험하고 받은 자가 기드온입니다.
하지만 사사 중에 기드온과 삼손을 최악의 사사라고 역사가들이 평가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저 역시 이번에 출간하게 될 ‘신-사사시대에 사사기 읽기(가제)’에서 밝히겠지만 기드온은 정말 최악의 사람이었던 것에 동의합니다.
사사기 8:24-27절을 보면 역사가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기드온의 말년에 첨가합니다.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귀고리가 있었음이라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에 던지니 기드온이 요청한 금귀고리의 무게가 금 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초승달 장식들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또 그 외에 그들의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전쟁에서 승리한 기드온은 이후 자기 고향인 오브라로 돌아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드온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였지만 표면적으로 거부하자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기드온이 왕이 되는 것을 거절했기에 기드온이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하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은 세속적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쟁 승리의 수훈갑이었던 기드온은 백성들에게 금귀고리를 요구합니다.
나에게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압박 수준의 기드온의 요청을 거부하기 힘들었던 백성들이었기에 금귀고리를 기드온에게 바치자 기드온은 모아진 금으로 대단히 실망스런 일을 행합니다.
사사기 8:27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기드온은 백성들이 바친 금귀고리를 가지고 금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동시에 그 금 에봇을 가지고 바알산당의 근거지였던 오브라로 가지고 가서 산당에 두었는데 그것이 또 다른 우상의 대상이 되었다고 고발합니다.
제사장들이 입는 의복을 금으로 만들었던 기드온은 가장 추악한 말년 인생을 보내며 이스라엘에게는 올무를 남게 한 장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오늘 성령강림주일 설교를 통해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전하고 싶습니다.
가뜩이나 자격 없었던 기드온을 그런대로 만들어 쓰셨던 하나님은 그에게 성령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승리자가 되었던 자가 기드온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단히 실망스럽고 유감천만인 것은 하나님이 입혀주신 성령의 옷을 벗어버리고 세속적 영광의 모드인 금 에봇을 입어버렸다는 점입니다.
오늘의 언어로 바꾸어 해석하겠습니다.
기드온의 가장 결정적인 패착은 성령이 주신 은혜에 대해 민감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4:16-17절이 주는 민감함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최대의 은혜는 진리 안에서 이탈하지 않게 하시는 일하심입니다.
이 일하심에 대해 우리는 민감해야 합니다.
나도 민감해야 하지만 나의 자녀, 손들을 위해서도 민감해야 합니다.
어찌 보면 내 사랑하는 아들, 딸 그리고 손자 손녀들은 금 에봇의 시대에 방치되어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은 지금도 성경시대와 똑같이 유효합니다.
문제는 민감한가, 혹은 둔감한가의 치열함입니다.
재 강조하지만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진리를 깨닫고 살아간다면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에 민감한 그리스도인으로 보폭을 맞추어 걷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둔감한 그리스도인이거나 조금 더 심각하게 그런 자는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는, 결국 성령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농후한 자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주부터 2년 6개월 동안 중단했던 탁구 운동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다시 라켓을 잡고 처음 탁구대에 섰는데 얼마나 낯설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사용하는 라켓이 팬 홀더이기에 쉐이크 핸드 라켓보다 조금 더 공에 대한 반응이 예민합니다.
2년 6개월 만에 상대방과 랠리를 주고받는데 얼마나 서툴렀는지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2년 6개월 동안 구장에서 떠나 있었으니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하지만 저도 스스로 놀란 것이 있었습니다.
2년 6개월을 쉬었기에 다시 감각을 찾는데 한 참 걸릴 것 같은 경기 감각이 첫 날 운동을 하다가 돌아왔다는 점이었습니다.
동아리 회원들이 기본기가 워낙 잘 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립 서비스를 해주었지만 제 판단은 조금 달랐습니다.
다시 2년 6개월 만에 탁구대 앞에 서서 경기에 임할 때 운동 감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집중력을 배나 더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집중력은 민감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사사시대를 방불케 하는 영적 랜덤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세상은 호모-데우스의 극단적인 영적 피폐의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진리로 이끄시는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에 민감하지 않으면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는 아슬아슬한 시대입니다.
정말로 다행인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확신시켜주고 있는 것이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성령 하나님께서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지금도 당신의 백성을 위해 일하신다는 은혜가 오늘도 현재진행 중이라는 점입니다.
오늘은 2022년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나와 당신을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지금도 일하시는 성령의 일하심을 민감하게 체휼할 수 있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선포합니다.
요한복음 14:26-27절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1.
주님을 모르던 세월 방황하던 아름다운 목자음성을 거역하며
달콤한 유혹과 즐거움 나를 썩게 하여도 사망의 그늘이 지는 줄 생각지도 못했네
2.
그림 같은 나날을 욕심으로 채우고 항상 나하 만을 위하여 쓸모없이 지냈네
분토만도 소욕이 어찌 그리 중했네 오 주여 용서해 주소서 머리 조아립니다.
3.
부드런 주님의 손길 나를 어루만질 때 육신으로 살던 세상은 흔적 없이 사라져
더러웠던 나의 옛사랑 십자기에 못 박고 성령의 새 옷을 입었네 주여 나를 보소서
4.
시간과 물질과 노력 나의 생명까지도 주님께만 바치렵니다 나를 받아주소서
좁은 이길 모두 걸으며 주님 다시 뵈올 때 영광의 면류관 쓰고서 영원토록 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