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6일 월요일 성서 일과 묵상 (사순절 열세 번째 날) 믿음 때문이 아니라, 은혜 때문이다. 오늘의 성서 일과 시편 105:1-11, 37-45, 창세기 22:1-19, 히브리서 11:1-19 꽃물 (말씀 새기기) 히브리서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마중물 (말씀 묵상)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 들어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었음에도 아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약속하신 분께서 말씀대로 행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서 일과인 히브리서 11:11절에 대한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이다. 통상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11장에 언급한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대단히 긍정적이다. 히브리서라는 설교문 자체가 주후 1세기 중반, 기독교 신앙공동체에 머물다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배교의 위험성을 갖고 있는 자들에 대한 경종의 메시지임을 감안할 때 기자가 이스라엘 열조들에 대한 언급을 가능한 긍정화시켰다는 점은 이해가 된다. 일부러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라에 대한 정도는 조금 심하다. 사라에 대한 평가를 믿음의 차원으로 조명한 히브리서 기자의 기록은 너무 의도적으로 과장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조금은 서글프다. 사라가 그녀의 말년에 믿음을 갖고 이삭을 낳았다는 에두름까지는 백번 양보할 수 있다. 유진 피터슨도 이것을 마지노선으로 삼았기에 위의 내용처럼 번역했을 것이다. 나 또한 유진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이 100% 동의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주의권에 있는 목사라는 동지 의식 때문에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성서 일과를 묵상하다가 아브라함의 연대에 비해 수천 년이 지난 믿음의 후배인 히브리서 기자가 사라에 대해 평가하면서 마치 처음부터 사라가 믿음이 온전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었던 자라고 이끌어 간 것은 지나친 과유불급이기에 유감스럽다. 나는 창세기에 기록된 사라에 대한 기록을 들춰 볼 때마다 이렇게 불신앙적인 여인에게서 이삭이 탄생하고 또 그를 통해 구속사의 계보를 잇게 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에 당혹스러울 때가 많았다. 물론 개인적인 성서 해석에 기인한 것이지만 적어도 나는 사라에 대한 성서적 증언들을 만날 때마다 그녀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을 더 진하게 한다. 왜? 이삭의 탄생은 사라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작품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데 사라를 믿음이 있는 여자로 둔갑시킨 히브리서 기자의 도발은 매우 유감스럽다. 사라가 갖고 있었던 믿음으로 인해 아들 이삭이 태어났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서술적 공식은 위험스럽기 천만이다. 재강조하지만 이삭의 탄생은 사라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11:1절에 기록된 첫 단어 ‘믿음으로’를 ‘하나님의 은혜’로 바뀌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내게 적용하니 빼박(!)이다. 나의 나 된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니라 은혜 때문이다. 이 감동이 절절하게 다가온 사순절 두 번째 주간 월요일 아침이다. 두레박 (질문) 믿음보다 은혜가 먼저임을 나는 확신하고 있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사순절 두 번째 주간 월요일입니다. 하나님, 은혜로 더 강하게 무장하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님을 인식하는 오늘을 살아가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에게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