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휴 프레이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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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판미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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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9-01-30 16:4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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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프레이더의 “Notes to Myself”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판미동 간, 2015년) 지금 이 글을 쓰는 지금 서재에 쥬빈 메타의 지휘와 마찌오 뮤지칼레 피오렌티노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 ‘루치아노 파바로티’ 세 사람이 함께 로마에서 시연한 로마 카라칼라 콘서트 실황을 담은 OST가 흘러나오고 있다. 듣고 있노라니 한 마디로 소회가 이렇다.
“정말로, 끝내준다. 인간이 내는 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그렇다.”
세 명이 함께 부르는 오, 솔레미오! 필드에서는 귀가 호강하다 못해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하모니가 귀하다. 언젠가 친한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생 뭐 있냐? 하고 싶은 것 하고, 듣고 싶은 것 듣고, 원하는 것 하며 사는 거지. 뭐.”
목사인 친구가 할 수 있는 표현이라고는 적절하지 않은 가장 일차원적이고 동물적인 표현을 친구가 한 것은 그가 세속적이라서가 아니다. 친한 친구인 필자가 너무 규격화된 삶에서 허덕이는 것처럼 보여 나를 위로 차 한 표현이기에 내 속을 깊이 아는 친구만이 던질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친근한 멘트였다. 아주 가끔 난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강덕아, 너는 잘 살아왔니? 너는 지금 무엇 때문에 사니? 너는 지금 누구니? 넌 목사니? 넌 너를 정말로 잘 아니?”
뭐 이런 시시콜콜한 질문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존재론적으로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하여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다. 다만 진짜로 내가 궁금해서였다. 한 아이의 아버지로, 한 여인의 남편으로, 그리고 동기 지간에는 막내 동생으로 살아온 나, 그리고 지금은 세인교회 목사로 살고 있는 ‘나’는 ‘나’를 존중하며 살아왔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나는 어줍지 않게 움츠려진다. 이렇게 답을 할 수 밖에 없기에. ‘갑각류 이강덕’
목사이기에 성도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했고, 목사 동생이었기에 본이 되어야 했고, 목사 남편이기에 신실해야 했고, 목사 아버지였기에 가장 성실해야 했고, 목사였기에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하는 ‘나’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껍데기를 두껍게 해야 하는 사람으로 나를 치며 살아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보니 ‘나’는 ‘나’인 ‘나’가 없이 살았던 때가 인생의 여정 중에 훨씬 더 많았던 것 같다. 휴 프레이더가 이 책의 서두에서 내뱉은 말은 천둥이었다. “나는 나, 그게 기적인 것을”(참고로 이 책은 페이지가 없다. 해서 각주를 소개할 수 없음을 양해 바란다.)
‘나’는 ‘나’라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라는 그의 말에 갑자기 눈가가 뜨거워졌다. 한편으로 매질 같고, 또 한편으로는 가없는 위로의 메시지라서. 저자는 또 말한다.
“삶을 살지 않고 삶을 분석하는 것이 내 문제다.”
뭔가 소중하게 숨겨놓은 것을 적나라하게 들킨 기분이 들었다. 저자는 목사이기도 하다. 그는 목회를 어떻게 하나 궁금해졌다. 허나 이 책에서 그는 목사라는 본인의 색깔을 1⁰도 나타내지 않아 파악 불가이다. 그런데도 그가 책의 면면에 써내려간 자기에게로의 글말들은 버릴 것이 없어 보일만큼 영적이고 냉철하며 철저했다.
“인생처럼 상대적인 것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곱씹고 또 곱씹어도 기막힌 성찰이다. 나는 내 인생을 살아오며 절대적인 가치에 대하여 천착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그렇게 살아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도대체 이게 웬 아이러니인가? 그렇게도 절대적인 가치에 함몰되어 살아온 내 인생이 상대적이라니! 카운터펀치를 맞은 느낌이다. 그로기로 몰렸다. 저자는 또 한 방을 나에게 먹였다.
“개인들의 세계에서 ‘최고’ 같은 것은 없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기세가 등등하지만, 동등하다고 느낄 때야말로 드물고 복된 순간이라는 저자의 일갈에서 나는 넉 다운되었다.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그의 지론을 끝까지 관철시킨다.
“나는 내가 사랑할 때 사랑한다. 그리고 사랑할 때 나는 나답다.”
몇 년 전에 노벨 평화상 수장자인 엘리위젤이 언론인 리처드 헤프너와 가진 대담을 엮은 ‘이방인은 없다.’에서 했던 말을 읽으며 깊이 공감했던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간 이상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닐 수 있는가? 둘 다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인간의 잣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니까.”(P,143) 나는 하나님이 될 수도 없고,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에서 정직하지 않을 때, 나는 진짜로 예상되는 갑각류 이강덕이 아닌 진짜 갑각류 이강덕이라는 괴물로 내 삶을 마칠지도 모르기에 말이다. 소름끼치는 이 터널에서 벗어나야겠다. 공교롭게 이 책 역시, 섬기는 교회에 홍영임 집사가 추천한 책이다. 우연히 국민일보 신문에 실린 필자의 기사를 보게 된 남편으로 인해 우리 교회에서 신앙의 동역자로 서기로 결단해 준 지체가 소개한 책을 의무라도 읽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접했던 책들에서 난 어마 무시한 감동의 보물들을 캐내고 있다. 이게 웬 은혜인가? 그래서 다시 한 번 집사님께 꾸벅! 하며 문안한다. ‘나는 나, 그게 기적인 것을!’
2019년 1월의 막바지에 건져 올린 보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