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의 ‘용서하다.’(이숲 간, 2019년)를 읽고 아주 오래 전, 이창동 감독이 만든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고나서 느꼈던 자괴감은 너무 컸다. 내 신앙의 언저리를 너무 강하게 타격해서인지 한동안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무력하게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들을 납치해서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해 찾아간 신애에게 납치범은 하나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 주셔서 지금은 영혼의 평안을 찾았다고 전한다. 이 말을 들었던 신애의 격노가 영화를 본지가 너무 오래되었지만 선명하게 남아 있다. 왜 나는 그 장면을 기억할까? 아마도 진정성 때문이리라! 자신의 분노를 포장된 신앙으로 극복해 보려했던 신애, 아들을 살해하고도 너무 쉽게 기독교에 귀의하여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납치범에 대한 그 회개에 대한 진정성이 목사로 살고 있는 나에게는 기쁨이 아니라 수치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너무 가벼운 용서, 그래서 얼마든지 입맛에 맞게 자기만족을 누릴 수 있는 아주 교묘하게 숨어있는 종교적 나르시시즘에 빠진 박도섭을 보면서 왠지 모를 목사로서의 치욕을 당한 꼴이라고 할까, 뭐 그런 아주 복잡한 감정에 빠져서 대단히 수치스러웠던 소회가 나름 잠식했던 터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영화 ‘밀양’을 유감스럽게도 기억한다. 위대한 선교 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이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불안한 증언(anxious witness)은 어불성설이다. 우리의 몫은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것을 신실하게 살아내는 일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성공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 “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 IVP,2011,p,107) 뉴비긴의 이 갈파를 기억하는 이유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나를 만족시키고, 나를 은밀하게 숨겨주는 불안한 증언들이 너무 값싸게 남발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용서하기’가 아닐까 싶다. 성경 말씀 중에 도무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구절을 나를 비롯한 일체의 기독교인들은 모를 리 없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21-22) 지난 달, 목사직을 내려놓은 동기가 방문했다. 언제나 그 친구는 내게 오면 책을 주고 간다. 참 책을 좋아하는 친구인데 그래서 아는 게 너무 많아 현직 목사인 나를 부끄럽게 하는 전직 목사가 주고 간 책 중에 하나가 기독교 공동체 브루더호프를 섬기는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목사가 쓴 ‘왜 용서해야 하는가’(포이에마 간)였다. 읽는 내내 느낀 감회는 은혜로운 글인데 불편했다. 왜? 도무지 용서해야 하는 대상인 아닌 자들을 향해 오직 한 가지 예수께서 행하신 말씀을 미친 듯이 살아내는 자들의 용기가 나에게는 너무 먼 그들만의 이야기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러고도 목사로 살고 있으니 진짜로 하나님의 은혜다. 읽는 내내 나를 더 많이 부끄럽게 하는 아놀드의 책을 덮었을 때, 왠지 불편했다. 금년 들어 자크 데리다를 선택해서 그가 강의한 내용을 묶은 두 권의 책을 섭렵했다. ‘거짓말의 역사’(이숲 간, 2019), 그리고 지금 북 리뷰를 하고 있는 ‘용서하다’(이숲 간, 2019)다. 거짓말의 역사는 다른 공간에서 다른 지면으로 리뷰를 남기고자 한다. 데리다는 ‘용서하다’에서 전술한 요한 크리스토퍼 아놀드가 말한 용서에 대한 신앙적 접근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던 필자를 논리적으로 위로해 주었다.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p,27) 프랑스 철학자 장 켈러비치가 남긴 이 한 문장이 내 이성의 테두리 안에서 심장을 뛰게 했다. 너무 솔직한 토로이기에. 데리다가 켈러비치의 이 말을 인용한 이유에 대하여 즉답하자면 두 가지의 아포리아로 본인의 ‘용서’ 이해를 해석했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 용서다.” 이 전제에서 그는 용서라는 단어를 풀려면 적어도 두 가지에 대한 이론을 전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용서가 ‘요청돼야만’ 용서에 동의하거나 용서에 동의할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다는 원칙 천명이다.(p,27) 또 하나는, 범죄가 너무 무거울 때, 근본적인 악의 경계, 나아가 인간의 경계를 넘어섰을 때, 이 범죄가 거대한 괴물이 됐을 때, 용서는 사람 사이에 인간의 척도에 남아 있어야 하는 만큼, 더는 용서하지 않음에 대한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즉 그런 용서는 불가하다는 점이다.(p,28) 데리다가 이렇게 선을 긋는 이유를 필자는 나름 이렇게 추측해 보았다. “용서의 가벼움은 천박성을 부축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매년 위안부 어르신들이 쉼을 갖고 계시는 ‘나눔의 집’을 다녀온다. 섬기는 교회가 행하는 사역의 일환인 기부금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 장소에 다녀올 때마다 왠지 모를 오기가 분기탱천한다. 나는 그 시대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 어르신들이 겪어야 했던 죽음보다 더 괴로웠을 고통을 1도 경험하지 못했는데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심장이 타들어가는 분노를 느낀다. 그래서 어느 해에는 그 문을 나서면서 목사로서 말도 안 되는 오기의 말을 이렇게 읊조린 적이 있었다. “주님, 왜 일본은 안 가라 앉죠! 가라앉게 좀 해 주세요.” 전술한 장 켈러비치는 적어도 ‘최종 해결책’으로 불렸던 유대인 말살을 위한 학살의 범죄와 같이 도무지 용서의 한계를 넘어선 것에 대한 용서하기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단호함을 주장했다. 이에 비해 데리다는 그가 자주 사용하는 그만의 독특한 철학적 구조인 해체주의적인 글 묘사를 나치의 범죄를 소개했는데 대단히 인상적인 도전을 준다. “나치는 그들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희생자들을 ‘존재한다.’는 (속죄할 수 없는) 과오의 죄인으로, 혹은 인간으로 존재한다고 감히 주장하는 죄인으로 다뤘으므로 나치의 범죄는 속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p,78) 데리다는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아이히만이라고 대변되는 나치의 죄 중에 가장 가공할 만한 죄는 ‘죄의 평범성’이라고 역설했는데 이것에 비해 조금 더 불편하고 두껍게 비난한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 데리다의 설파를 필자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이런 해체주의적 발상의 ‘용서하다.’라는 동사의 이해를 필자는 결코 ‘용서하다.’의 행위가 ‘불-가능’의 해석적 관점으로 요리했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은 철학적 성찰이 데리다는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용서하다’의 실천적 실행은 죄를 지은 자들이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속죄해야 하고, 이에 부응해 화해를 목적으로 죄는 용서해야 한다. 이것이 보편적 평안의 역사를 위한 유일한 용서의 길이다. (중략) 따라서 용서라는 것이 정말로 있다면, 용서할 수 있는 일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수 없는 것, ‘불-가능’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말은 화해를 목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한다는 뜻일 수 있다.(pp,98-99) 아마도 데리다가 말하고 싶어 하는 ‘용서하다’의 정의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어 숙연해 졌다. 영화 ‘밀양’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때부터 기독교의 용서가 마치 자판기에 적절한 돈을 주입하면 내가 원하는 그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너무 값싸게 남용되는 것이 같아 못내 유감스럽다. 프리모 레비의 말이 서평을 마치는데 금과옥조가 될 것 같아 남겨 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던 프리모 레비에게 어떤 학생이 물었다. “당신의 책에는 독일인에 대한 어떤 증오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을 다 용서한 것인가?” 레비가 이렇게 답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치려는 적은 더 이상 적이 아니다.”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15,p,270.) 결론은 버킹검이다. 데리다의 글을 읽었지만 그래도 용서는 용서하기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사족하나)
일본침몰을 읊조린 것은 철저히 회개했다.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