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김기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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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꽃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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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7-11-04 20:0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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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꽃자리, 2016)를 읽고 초등학교 시절에 글쓰기는 일기 쓰기였다. 일기에 대한 추억이 좋은 사람은 천재다. 적어도 평자의 일기 쓰기 기억은 지루하다 못해 참지 못할 지긋지긋한 숙제였다. 그것도 매일 써야 했던 지옥 같았던 쓰디쓴 추억이다. “날씨 맑음, 아침에 일어났다. 이를 닦고 세면을 한 뒤에 밥을 먹고 나서, 책가방을 챙겨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집에 돌아와 숙제를 하고 잠간 놀다가 이를 닦고 잠을 잤다.” 이 글 맥을 전혀 다른 것처럼 매일 쓴다는 것은 기적이었지만 고문이었다. 그러다보니 밀리는 것은 다반사, 어쩔 수 없이 개학 전에 몰아쓰기로 결심한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날씨 맞추기였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일기 쓰기 숙제를 제출하고 나면 조마조마했다. 선생님에게 들킬까봐. 일기 숙제를 나눠주는 선생님은 거의 대부분의 동료들에게 무의미하게 나눠주셨다. 무사히 넘어가서가 아니라 코멘트 할 가치가 없어서였을 것이 분명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일기 숙제도 오십보백보였기에 말이다. 그렇게 일기 쓰기를 지옥 같이 여겼을 때, 아주 가끔 선생님이 반색하며 칭찬했던 친구들이 눈에 보였다. 평자처럼 일기 몰아쓰기가 아닌 창작력을 갖고 글쓰기에 성공한 아이들이다. 이윽고 본보기로 그 아이들이 쓴 글이 발표될 때 그 친구들의 글은 딴 나라 이야기처럼 신기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친구들은 지금도 문학 분야에서 한 몫을 하고 있으니 흔히 하는 말처럼 될 성 싶은 나무는 그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어른들이 말이 틀리지 않는 말임에 분명하다. 이렇게 천재적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이야 두 말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부단히 노력 끝에 글 쓰는 이가 된 후천적 지인들도 부지기수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끊임없는 글쟁이로의 노력 끝에 일기 몰아쓰기의 수준에서 환골탈퇴를 경험했다는 점이다. 그 경험은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뒤늦게라도 글 읽기와 글감 남기기를 소홀이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 중에 하나를 뽑으라면 서슴지 않고 평자는 작가 조정래라고 말한다. 조정래는 이렇게 ‘황홀한 글 감옥’에서 말했다. “저는 저의 재능보다 노력을 더 믿었습니다.” 조정래, “황홀한 글 감옥”, (서울: 시사 IN 북, 2010년),p,98.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김기석은 본서의 초대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의 흔적이다. 한 주에 한 번씩 꽃자리 웹진에 글을 쓰기로 작정한 후에 매 주일 나의 삶의 지평 속에 등장했던 이들과의 만남을 기록하기 시작했다.”(pp,6-7) 저자만 사람을 만나는가? 그럴 리가 있겠나. 평자도, 독자도 마찬가지 수많은 사람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하루를 열고 닫지 않는가. 다만 저자의 글을 읽고 북 리뷰를 남기면서 든 소회는 이것이다. 생각하고 만난 만남의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점에서 저자는 사유한 자이다. 삶의 내용들에 대해 치열하게 맏짱 뜨는 자이다. 부러운 것은 그 치열함을 글감으로 풀어내는 능력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본 최고의 평론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독서 내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에 말이다. 그가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에서 평자의 뇌를 움직이게 하는 직격탄을 날렸다. “정설(正說)이 아닌 것에 대해 강한 관심을 보이는 일은 인간의 유연한 적응력을 키우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이언숙역, (서울: 청어람 미디어, 2014년),p,241. 또 이렇게 말했다. “이상한 현상과 만나는 것은 인간이 건강한 적응 능력을 기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책, p,242.
평자는 저자의 길을 접하면서 다치바나 다카시의 이 지적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짜릿함을 맛보았다. 김기석이라는 작가의 글이 주는 신선함은 언제나 정설이 아닌 것에 대한 호기심, 동시에 이상한 현상에 대하여 적대적이지 않은 호의에서 발견한다. 적어도 현직 목사로서 갖고 있는 상투성과 치열하게 피 튀기며 싸운다. 그래서 평자는 그의 글을 눈에서 놓지 못한다. 적어도 이 정도의 사고함이 왠지 먹사로 불리며 시대에 가장 치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한 어떤 목사에게도 있다는 대리만족이 평자에게는 큰 기쁨으로 다가오기에 말이다. 총 다섯 개의 꼭지로 구성된 본서를 저자가 그렇게 의도했는지 아니면 꽃자리가 그렇게 편집했는지는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지만 설교문의 상투적인 도식인 1,2.3 대지에 익숙한 터라 글을 접근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 도리어 푸근함(?)을 느꼈다. 저자의 다른 책들은 이렇게 구분하지 않았던 것이 태반이라. 유대인들의 교육법인 ‘티쿤 올람’(tikun olam) 즉 ‘고장 난 세상을 고친다.’는 명제로 풀어나간 첫 번째 장(章)에서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지금보다 내가 떠날 때의 세상은 더 아름다워진 세상이기를 바라는 저자의 갸륵함이 나에게도 전달되었다. 그러려면 ‘우분투’ (I AM BECAUSE YOU ARE.)의 마음으로 ‘너’없이 ‘나’도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태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함을 글로 역설한다. 더불어 인상적인 것은 하이데거의 철학적 인간의 해석이다. “인간의 인간됨은 타자의 입장에서 서 보는 것이다. 타자가 자기의 능력과 사람됨을 주체적으로 사용하고 또 형성해 가도록 돕는 일이 우리 각 자에게 주어진 소명이라 할 수 있다. 해서 그의 철학을 말하는 총체적인 단어는 전치사 für(∼위하여)에 담겨 있다.”(p,57) 죄는 이웃에게 등을 돌리게 하지만 사랑은 이웃을 마주보게 만든다는 저자의 혜안이 첫 번째 장을 수놓았기에 책 내 내에서 퍼질 풀꽃 같은 냄새를 기대하며 저자와 만났다. 두 번째 꼭지가 칼로카키티아이다. 발음하는 것조차 어려운 이 단어 ‘칼로카키티아’라는 이 희랍어를 저자는 ‘고귀함’으로 번역했다. 물론 그 출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이다. “성격의 고귀함과 선함을 드러내는 말이다. 아름다운 앞에 자꾸 서보고, 그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깊어 갈 때에 자기중심적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p,88) 저자는 이 장(章)에서 우리 모두가 공감해 보아야 할 의미를 나눈다. 최근에 어느 교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공개한 내용이 이것이었다. “한국교육은 연필 깎는 것을 다시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 손에 칼을 쥐고, 다른 한 손에 쥔 연필을 깎을 줄 아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 기구가 대신해 주거나 엄마가 대신 해주기 때문이다.”(p,91) 나는 이 글을 기초체력의 부족으로 읽었다. 이 체력이 없기에 남을 의지하는 허약함이 태반인 이 땅의 아이들이 양산되고 그 결과 자립적인 모드로 성장한 아이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세태가 되는 아픔이 우리 곁으로 와 있다. 결국 이런 아이들이 중심을 이루어야 할 세상은 허약하기 그지없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런 허약성과 의존성으로 인해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구조는 이타적인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게 함은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혹여 있으면 그는 마치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간 취급을 하는 거꾸로 되어도 한 참 거꾸로 된 현상을 발아하게 한다는 점에서 몹시 우려스럽다. 이 점에 있어서 저자도 평자의 마음을 이해했는지 이렇게 정리하는 문장을 남겼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p,93)고. 세 번째 꼭지는 이디오테스이다. 저자는 이 단어를 ‘사사로움’이라고 번역했다. 그리고 이렇게 단어를 부연 설명한다. “영어로 ‘바보’ 혹은 ‘백치’를 뜻하는 이디엇(idiot)은 헬라어 이디오테스(idiote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단어는 ‘공공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사사로운 개인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단어이다.”(p,137) 저자가 이 단어를 왜 돌출시켰을까? 아마도 그리스 사람들이 보았던 정치에 대한 역학구도를 도입하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평자는 조심스럽게 진단해 보았다. 다시 말해 이명박근혜 정부로부터 지속적으로 야기된 정치적 불신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도외시하려는 의도적인 일체의 시도를 이디엇으로 평가하고 싶었을 런지 모른다. 그런데 어찌하랴! 정치는 사사로운 영역이 아니라 공적 영역인 것을. 촛불 혁명이 무엇이었을까? 나의 이디오테스의 상태를 깨운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의도하고 저자가 쓴 것이 아님을 알지만 소설가 고종석의 일침은 아주 교묘하게 이디오테스의 무능력과 무감각의 중력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파문처럼 평자에게 다가왔다.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의 연대이다.”(p,157) 오늘 내가 살고 있는 현장의 비극은 어루만짐으로 이루어 가는 치유가 대세인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터트리고 파괴해서 곪게 하려는 움직임들이 대세가 되었다는 리얼리티의 막장 드라마이다. 미국의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에게서 이디오테스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끼친다. 거기에 맞물려 생존의 치킨게임을 할 수 밖에 없는 북쪽의 어린 지도자를 보면서 그가 더 큰 이디오테스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같아 쓰라리다. 나는 오늘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어루만짐이라고 말한 저자의 견해에 적극 지지를 표한다. 그것이 희망이라는 것을 평자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레베카 솔닛의 갈파가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우리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다름 아닌 희망의 마비이다.” 레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 설준규 역, (서울: 창비, 2006),p,172. 무슨 일이 있어도 희망을 포기하는 절망만큼은 경험하지 말자. 난 이 슬로건이 떨어지지 않을 것을 믿는다. 왜? 남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루만짐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기에 말이다. 네 번째의 꼭지로 넘어가 보자. 길 위의 사람, 호모비아토르의 면(面)이다. 저자는 이 면에서 가슴에 깊이 새겨 놓고 싶은 촌철살인을 하나 지긋이 건넨다. “떠나는 이들은 언제나 주류적 가치에 사로잡히기를 거절한 이들이다.”(p,222) 왜 이 말이 절절하게 다가왔을까? 아마도 보상심리이리라. 9년 전, 아주 잘 나가던 주류에서 탈락되어 철저하게 비주류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평자의 삶 중에 굴곡진 흔적들에 대하여 보기 좋게 격려해준 마디라고 할까! 그래서 저자의 이 말이 살갑게 다가왔다. 그런데 격려의 말로만 치부하기에는 저자의 역설이 뭔가 억울해 보인다. 더 솔직히 성이 차지 않는다. 난 ‘떠나는 이들’이라는 말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내가 떠나고 싶어서 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인생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내 밀리어 떠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할 수 없어 밀리는 인생 말이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가정과 교회에서조차 내 밀리어 떠나게 되는 비극이 얼마나 우리들의 지근 주변에서 수많이 목격되는가! 이런 차원에서 능동적 떠남, 자발적 떠남을 선택한 자들의 용기가 너무 부럽다. 레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기막힌 에필로그를 장식한다. 다음과 같은 글 맺음으로. “역사에 미래가 있는가 여부는 아직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 레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 김정아 역, (서울: 반비, 2017),p,466.
길을 걸어가는 자는 위대하다. 왜? 그들은 호모비아토르이기 때문이다. 호모비아토르는 진보한다. 왜? 정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항상 늘 그는 움직인다. 서 있으면 흔들릴 수 있는 자아를 알기에 앞으로 나아간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다비드 르 브르통은 이렇게 자신의 혜안을 나눈 적이 있다. “걷기는 세계를 사물들의 충일함 속에서 생각하도록 인도해 주고 인간에게 그가 처한 조건의 비참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상기시켜준다.”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김화영 역, (서울: 현대문학, 2010),p,237. 평자는 저자의 책들을 섭렵하면서 특이한 점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저자가 길에 천착한다는 점이었다. 그가 발간한 책 제목만 보아도 어림짐작할 수 있다. ‘가시는 길 따라 나서다’(2009년),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2007년),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2015년), ‘흔들리며 걷는 길’(2014년), ‘광야에서 길을 묻다’(2015년), ‘오래된 새 길’(2012년) 등등 길과 참 깊은 교제를 하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저자가 이토록 길에 대하여 애착을 갖는 이유는 그가 스스로 호모비아토르임을 인식하며 언제나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는 현명하다. 다섯 번째 꼭지로의 초대이다. ‘아케다’ 의 현장이다. 히브리어로 ‘묶는다.’는 뜻의 ‘아케다’ 는 어떤 의미로 보면 창세기에 소개된 비극이다. 외아들 이삭을 묶어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야기, 저자는 아케다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유대인들이 항상 이삭의 번제 사건을 건드릴 때 주목한 대상인 이삭에 방점을 찍지 않았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해석대로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전개하지도 않았다. 저자가 주목한 ‘아케다’의 현장에서의 주인공은 어머니이자 아내인 사라였다. 어떻게? 창세기 22장의 면면을 살필 때 항상 사라는 제외되었다는 아이러니의 폭로로 말이다. “자신의 태속에 들어온 생명을 애지중지 돌보고 산고를 겪으며 출산한 아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일에 사라는 제외되었다.”(p,276) 평자가 저자의 이 진단에 주목한 이유는 이것이다. 사라가 무조건적으로 남편이 결정한 사항에 대하여 단 한 마디의 토를 달지 않았던 존경할 만한 신앙의 여인이자 아내이기 때문도 아니요, 아들을 맹목적으로 빼앗겨도 말할 수 없었던 가부장적인 족장 시대의 여인만이 느껴야 하는 폭력의 결과물도 아니라 저자는 사라의 사라짐을 슬픔으로 승화시켰다는 대목 바로 그것 말이다. 금년에 평자는 여류 예술 평론가이지 문화비평가인 레베카 솔닛의 신세를 많이 졌다. 해서 참 그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그녀의 글 중에서 금년에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은 ‘남자들은 자꾸만 나를 가르치려 든다.’였다. 혹자는 이런 극단적 페미니즘적인 작품을 높이 평가하려는 평자에게 고개를 갸우뚱하였지만 엄연히 평자에게 이 책은 깊이 고민하고 반성하게 한 걸작으로 남아 있다. 책의 시작에서 그녀가 던진 화두는 정신을 번쩍 나게 했다. “자신이 잉여라는 생각과의 전쟁이고, 침묵하라는 종용과의 전쟁이다.” 레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김명남 역, (서울: 창비, 2017),p,16.
여성들이 이런 전쟁을 치르게 된 결정적인 원인 제공을 한 자들은 분명히 남성이라는 선전포고가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6,2분마다 강간이 벌어지고 여성 다섯 명 중에 한 명이 강간을 당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솔닛이기에 가장 비인간적인 폭력을 당하고도 여성은 잉여 혹은 침묵이라는 또 다른 폭력에 짓밟혀 있다는 그녀의 전개는 억지가 아님을 평자는 동의한다. 책을 읽다가 조금은 전투적인 글을 읽고 통쾌(?)했다. 왜? 충분히 항명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임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보다 젊었을 때, 드넓은 대학 캠퍼스에서 여학생들이 강간을 당하자 대학 측은 모든 여학생에게 해가 지면 밖에 나기지 말라고, 아니면 아예 나돌아 다니지 말라고 일렀다. 건물 안에 있어라. 그러자 웬 장난꾸러기들이 다른 처방법을 주장하는 포스터를 내 붙였다. 해가 진 뒤에는 캠퍼스에서 남자를 몽땅 몰아내자는 처방이었다.” 위의 책,p,111.
김기석은 사라의 슬픔을 가진 자들을 소개한다. 한국으로 코리아드림의 꿈을 안고 왔다가 건강, 인권, 물질들을 다 빼앗긴 채로 버려진 이주노동자들, 세 살 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 우리가 죽은 후에 세상이 나아졌나요? 라고 묻는 304명의 세월호 희생자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평자는 이 땅에서 목사로 살아간다. 목사로 바장이는 내 목회신학은 과연 무엇인가? 나는 위에 열거한 자들을 고귀함의 극치로 인정하고 현장과 강단에 매일 서는가? 저자가 일갈한 대만 출신 신학자 CS 송이 말한 신학을 현장에서 적용하고 있는가? “정치신학은 민중의 눈물 즉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불행 때문에 흘리는 민중의 눈물에서 비롯된다.” CS 송, “맹부인의 눈물”, (서울: 도서출판 일과 놀이, p,89.) 김기석, “세상이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p,254. 재인용.
저자는 ‘아케다’ 의 사라를 조명하며 가슴을 출렁이게 하는 금과옥조 같은 시금석을 하나 살포시 평자의 마음에 놓는다. “슬픔이야 말로 ‘너’에게 건너가는 다리가 아닌가 싶다. ‘나’의 고통이 ‘나’만의 고통에 머물 때 감상 혹은 애상에 빠지기 쉽지만 그것이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 화할 때 그 고통은 보편적 의미를 획득한다.”(p,277) 목회는 ‘이케다’의 현장이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묶어야 하는 현장 말이다. 그러나 그 묶음이 죽이기 위한 이케다가 아닌 타자를 살리기 위한 이케다가 되어야하는 것은 물론 타인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1인칭 객관화시키는 이케다 즉 이타적 슬픔의 승화시키는 장소가 목회 현장이어야 하지 않나 싶다. 마지막 장으로 들어가 보자. 라흐마니노프의 ‘베스퍼스’이다. 가톨릭 성무일과 중에 저녁기도를 의미하는 ‘베스퍼스’를 ‘마음의 길’이라고 혹자들은 평가하며 정의한다. 수많은 길이 있다. 가 본 길, 가보지 않은 길, 가야 할 길, 가지 말아야 할 길 등등. 우리 앞에 놓인 길들은 형형색색이며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는 위험천만이다. 평자는 이런 수많은 길들 중에 가장 걷기 어렵고 힘든 길이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마음의 길이다. 이 길은 누구와도 같이 걷기가 녹록하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도구가 있다면 이 길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힘 있게 걸을 수 있다. 그 도구는 진정성이다. 저자도 이에 동의한 듯하다. “나는 언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서로의 마음에 가 닿으려는 절실함과 진정성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마틴 부버가 말한 ‘근원어’ 즉 자기의 전 인격을 걸어 말하는 언어이다.”(p,339) 저자는 또 지성 슬라보예 지젝을 빌어 말한다. “오늘의 세계는 우리에게서 꿈 꿀 수 있는 능력마저도 억압하고 있다.”(p,364)고. 이것을 동의하기에 평자도 꿈 꿀 수 있는 소망이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내 마음의 길을 진정성과 절실함을 담보로 걸으려고 한다. 가장 큰 비극은 소망의 좌절이기에 말이다. 저자는 라흐마니노프를 말했지만 평자는 긴 글을 쓴 피로를 푸는 방법으로 하인리히 쉬프의 첼로 연주로 듣는 안토니오 비빌디 콘티누오를 위한 협주곡을 택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서재에 울려 퍼지는 첼로의 선율이 기가 막히게 성스럽다. 김기석 책이 또 나오지 않기를 바라야 하는가? 그의 출간 된 전 서적의 서평을 마치고 난 뒤의 소회는 이렇다.
저자여! 책 출간 좀 천천히 하라. 따라가기 버거우니. 그래도 왜 그의 책은 기다려지지. 모순 덩어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