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팀 켈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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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두란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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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8-03-06 15:2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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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의 ‘설교’(두란노 간, 2016년)을 읽고
켈러와의 다양한 만남
복음서를 연구하는 신학자나 목회자에게 꼭 점령(?)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아마도 거의 대동소이하게 마가복음이라는 대답을 할 것 같다. 소위 예수의 어록이라고 말하는 큐(Quelle) 자료에도 절대 밀리지 않는 문서적 권위를 갖고 있는 복음서라는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필자는 가장 민초적이고 민중적인 성격이 강한 복음서가 마가복음서라는 개인적 확신 때문에 복음서를 성서일과로 읽을 때는 마가복음을 줄곧 묵상하고 가까이 하는 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섬기는 교회에서 2009년 10월부터 2013년 4월까지 거의 4년에 걸쳐 주일 낮 예배 메시지로 선포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마가복음 사랑하기를 감당했던 추억도 있다. 마가복음 여행을 마친 지 약 한 달 뒤에 뉴욕 리디머 교회를 담임하는 팀 켈러(티모시 켈러라고 부름)가 쓴 ‘왕의 십자가’(두란노, 2013년)라는 마가복음 설교를 모아 엮은 책을 만나 여행했는데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적지 않은 실망을 했던 씁쓸한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여전하기는 하지만 2013년 팀 켈러는 마치 혜성처럼 등장한 미국 교회를 성장시킨 몇 안 되는 지성적(?) 목회자라고 인식되었기에 그의 글에 기대를 걸었던 것이 필자가 실망한 이유였을 것 같다. 필자가 팀 켈러의 ‘왕의 십자가’라는 마가복음 강해 설교 기록을 접하면서 그가 어쩔 수 없는 도시적 성향의 목회자라는 한계, 그로 인해 대도시 중심적 패러다임에 함몰되어 성경을 보는 편견을 ‘왕의 십자가’에서 발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팀 켈러에 대한 인식은 적어도 필자에게는 곱지 않은 시선을 자리를 잡은 것이 사실이었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렇게 별로 긍정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았던 사람, 팀 켈러가 나에게 또 다른 스펙트럼으로 다가온 기회가 있었는데 ‘예수를 만나다’(베가북스, 2014년)에서 이루어졌다. “‘신을 찾기 위해 이렇게 하라’는 게 기독교가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당신을 찾으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게 기독교다.”(p,41) 켈러가 이렇게 말한 사족의 이유는 앞서 이렇게 진단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특히 정말로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것이다.”(p,40) 웬만한 기독교적인 지성들 중에 성육신의 은혜와 신비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겠는가?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을 가장 강력한 자부심의 근거로 삼고 있지 않겠는가? 이것은 켈러뿐만이 아니라 필자에게도 그리고 다른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매일반이리라. 중요한 것은 켈러에게 있어서 약한 자에게 더욱 가까이 임하는 기독교라는 성찰이 ‘예수를 만나다’에서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이전의 켈러에서 보지 못한 진일보를 보았고 또 그 점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다. 프랑스가 낳은 걸출한 사회학자이자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엘륄의 걸작인 ‘뒤틀려진 기독교’를 보면 현대 기독교의 추한 몰골 중에 하나인 ‘성공주의’라는 뒤틀림을 저자가 고발하고 있는 대목이 나온다. 그의 고발 중에 읽으면서 필자 역시 심각하게 오늘의 상황과 맞물려 고민하게 한 글을 소개한다. “기독교가 성공을 바라지 않고 복음 자체를 위해 복음을 전파하려고 애쓰자 성공은 이루어졌으며, 언제나 그렇듯이 일단 성공이 이루어지면 성공에 대한 갈망이 생겨났고 그리스도인들은 성공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난 받을 수 있는 점은 바로 이 성공 뒤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과 그래서 사회가 기독교에 의해 뒤집히기는커녕 오히려 사회가 기독교를 뒤바꾸었다는 것이다.”(p,64)
엘륄은 이 지적은 적확하고 날카롭다. 작금의 조국교회가 당하고 있는 일련의 참담한 현실과 결과물들이 성공주의에 혈안이 되었던 집단적 코마에 기인하였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나, 신학자나, 일체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순교적 영성은 성공을 바라지 않는 복음 확산이라는 쉽지 않은 고투이다. 켈러로 돌아가 보자. 그는 성공한(?) 목회자이다. 그것도 종교의 무덤이라고 하는 뉴욕에서 성공한 목사라는 대단한 레테르가 그에게는 붙어 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다’에서 필자는 상당히 의외의 일들을 여러 차례 목도했다. 성공한 목사인 그가 상당히 거칠고 과격한 야성적 캐리그마를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그를 다시 한 번 재평가하는 기회를 삼아 보았다. 아직은 완전히 확신할 수 없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 보면 반신반의의 관점에서 오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16년을 마감하는 성탄의 계절에 그의 또 다른 논거를 만났다. 이번의 만남은 목사라는 같은 동질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그도 고민하고 필자도 고민하는 가장 현실적인 담론인 ‘설교’(두란노, 2016년)를 통해서이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보람된 사역이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피하고 싶은 사역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설교이리라. 가장 긴장되는 사역이면서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는 사역, 단 한 번의 사역을 통해서도 한 인간의 전 인생을 결정할 수 있는 사역, 경우에 따라서는 또 한 사람의 영혼을 죽일 수 있는 사역이기에 말이다. 20세기 최고의 복음주의적인 설교자라고 말하는 데 별 이의가 없는 존 스토트는 ‘설교’ (IVP, 간)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다. “설교자는 설교만 말할 수 없다. 그는 또한 살아내야 한다.”(p,157)
세상에 이런 부담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므로 30년 간 설교를 해온 필자는 매번 죄인이다. 그리고 섣부른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목회를 끝내는 날까지 계속 죄인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더 가중된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은 설교를 줄이는 것이고,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다. 헌데 그게 어디 현실적으로 가당키나 한 일인가! 더군다나 한국교회라는 현실 앞에서는 더 더욱 그렇다. 그러기에 가급적 실수를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택하는 방법은 유명한 설교꾼 말고 그래도 삶으로 설교하려고 존경할 만한 사역의 선배가 걸어온 길을 들추어 보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팀 켈러는 또 한 편의 배울 만한 건더기를 줄 것을 기대하며 책을 열었다. 저자는 설교라는 담론을 이어가기 위해 크게 세 꼭지로 전개한다. ‘말씀을 섬기는 설교’가 그 첫째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설교’가 그 다음이고, ‘성령을 덧입은 설교’가 마지막 설명이다.
1. 첫째 꼭지로 접근해 보자. 말씀을 섬기는 설교다.
필자가 이 장을 접근하면서 가장 크게 눈에 띠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저자의 신학적 통찰의 직관이었다. ‘말씀을 섬긴다.’ 이 말의 대치적인 설교들의 양태가 있다면 그건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다. 적어도 필자가 이 대목에 방점을 찍은 것은 한국교회 역사를 뒤돌아볼 때 심히 유감스러운 일들이 자행된 점을 바로 이 점에서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심각한 비약일까? 노만 빈센트 필에 의해서 주창된 ‘긍정적 사고방식’ 을 차용한 로버트 슐러와 조엘 오스틴으로 계보가 이어지는 ‘긍정의 힘’ 이라는 축복의 원형들, 대한민국 최대 대형교회를 이끌어 온 번영신학의 대들보에서 주창된 ‘삼박자 축복’, 한국교회를 한 동안 들썩이게 한 야베스 신드롬에 나타난 축복의 복음, 그리고 지금도 첨예하고 논쟁거리로 대립하고 있는 청부론 설교까지 들추어내면 필자의 개인적, 주관적 성찰이라는 한계를 전제하면서 말하지만 나는 일련의 이런 설교들은 말씀을 이용한 적절한 실례들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한다. 수년 전에 설교하는 구약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이 행한 설교에 관한 11편의 명 강의를 묶은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읽으면서 필자를 불 질러 놓았던 그의 지론 중에 하나를 소개한다. “설교자가 선택할 전략은 텍스틀 이용해 현재 생활 세계를 정당화할지, 아니면 사람들의 견해에 도전해 위기를 조성하면서 다른 생활 세계를 제시할지 하는 것이다.”(p,201)
놀랍게도 브루그만 교수는 이 양자가 다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견해와 생각을 달리한다. 성경을 텍스트로 삼고 성경이 말하는 설교를 하려면 전자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건 설교자의 전략의 문제가 아니다. 설교자라면 언제나 텍스트에 대한 집요한 연구와 성찰을 통해 비평적 스펙트럼으로 콘텍스트에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집요한 없기에 번영신학의 오류들을 교회 현장에 도입하여 교회를 전혀 교회답지 않게 만드는 누를 범하게 한 것이다. 켈러는 성경말씀을 설교하고, 매번 복음을 설교해야 하며,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게 해야 한다는 관점을 이 장에서 역설한다. 그렇다면 필시 저자는 텍스트에 찾아내야 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명제를 그리스도 예수로 보았음이 분명하다. 세 번째 소 꼭지 즉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를 들여다보면 약간의 과유불급으로 보이는 여지가 눈에 들어온다. 바꾸어 말하면 일체의 성경적인 텍스트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불편함이 눈에 띤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변의 잡다한 신변잡기를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누락한 채 설교라는 이름으로 강단을 더럽히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작금의 현실을 뒤돌아볼 때 켈러의 지적은 가슴에 담아둘 충분한 도전이다. 켈러가 말한 이 대목은 심쿵 하게 한 가슴떨림이 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우리를 위한 생명나무로 바꾸셨다. 자신에게 무한한 대가를 안기시면서 말이다.” (p,114) “이렇게 우리는 율법에 ‘의해’(by) 구원 받는 게 아니라, 율법을 ‘향해’(for) 구원 받는다.”(p,115) 2.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설교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설교자는 청중의 삶을 향한 책임이 있다.”(p,125) 1장이 텍스트를 말했다면 이번 장에서 켈러가 제시한 담론은 콘텍스트이다. 그래서는 그는 세 가지에 주목했다. ‘몸담고 있는 문화를 향해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과 ‘시대정신의 바른 이해가 필요함’을 역설했고, ‘마음에 닿게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라고 간파한다. 저자는 이 세 가지의 주제에 접근한 기초를 현대인들의 무관심으로 규정한다. “오늘날 우리는 종교에 대한 적대감보다 오히려 무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p,128) 필자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때에 저자가 내한하여 한국교회를 향한 예리한 통찰을 던지고 있음을 여론을 통해 접했다. “지금은 도덕적 진리는 없고, 도덕적 기준과 선과 악을 당신이 정하라는 시대다. 그런 상황이라 죄가 무엇인지 말하는 게 쉽지 않다.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독교 사역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 한국 사회 안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 끼치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어떤 식으로든 영향 미칠 것은 확실하다. 오늘날 젊은 사람들은 권위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래라 저래라 타인이 압박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마음에 다가가지 않은 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걸 싫어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해야 할까?” (3월 6일자 국민일보 미션 라이프 게재 글) 이 글만 보더라도 저자가 얼마나 포스트모던이라는 상황에 예민한지를 대변해 준다. 그가 이렇게 진단한 뒤에 내놓은 대안은 이러했다. ① 믿지 않는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언어를 써야 한다. ② 성경과 더불어 안 믿는 이들이 존경하는 인물을 인용해라. ③ 그들이 의심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줘라. ④ 그들이 믿고 있는 것에 근거해 그들이 잘못 믿고 있다고 말해줘야 한다. ⑤ 믿지 않는 이들의 갈망에 맞춰 복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라. ⑥ ‘이렇게 해야 한다’고 어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라 ⑦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기독교인이 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분명히 제시하라. (같은 신문의 같은 면)
도식적인 차원에서 저자의 글이 혜안으로 보인다. 특히 도시 목회자의 전형적인 형태로 말이다. 뉴욕이라는 전 세계의 현대판 바벨리즘의 보고라고 하는 이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의 생태적인 반향이라고 보면 비판할 수 없는 적확한 진단이다. 또 한 가지 저자의 이 진단이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지형에도 거의 엇비슷하다는 점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다. 문제는 저자가 책에서 밝힌 P.T. 포사이드의 대척점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의 제 문제이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가장 영향력이 있었을 때 교회는 세상을 이끌지 않았고, 그렇다고 동조하지 않았으며, 다만 세상에 맞섰다.”(p,131) 포사이드의 이 갈파는 설교가 세상에 ‘반향’(echo)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에 ‘대항(resist)’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필자도 설교를 할 때마다 이 고민에 휩싸여 있다. 해서 전율하게 하는 외침은 포사이드의 이것이다. “세상과 맞섰다.” 나름의 목양적인 고민을 하는 일련의 목회자들 중에 이 말에 열광하지 않는 목회자가 있겠는가? 그런데 도전이 무엇인가? 맞서는 것이 오늘은 안 된다는 지론이지 않은가! ‘상황화’ 를 두려워하지 말라. 와 ‘상황화’를 염두 해야 한다. 의 충돌이다. 이 과정은 목회의 현장에서 계속해서 씨름해야 할 테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다가 켈러가 말한 충돌의 개념을 만났다. 그의 충돌은 총론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오히려 각론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소통의 문제를 제기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포스트모던의 청중들은 교회의 언어에 관심이 없거나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저자는 부각시킨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다음과 같은 도전적인 발언을 던진다. “복음주의 특유의 상투어와 전문어를 삼가라”(p,144) “‘우리-그들(we-them)’의 언어다.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 경멸조로 말하거나, 다른 종교와 교파, 우리와 신앙이 다른 사람들을 회피하거나 업신여기는 말투는 피해야 할 언어군이다.”(p,143) 필자가 사역하는 유일한 외부 사역이 하나 있다. 바른 교회 아카데미이다. 일 년에 두 번 내지는 한 번의 세미나가 진행되는 데 한국교회의 개혁적인 담론들을 함께 고민하는 세미나이다. 불과 몇 주 전에 이 사역이 있어 다녀왔다. 세미나 중에 한 젊은 목사가 본인의 목회 현장에서의 나눔을 통해 이런 고민들을 함께 동석한 목회자와 신학자들에 던졌다. “교회 현장에서 우리 목사들이 전하고 있는 종교적 언어들이 포스트모던의 탈 획일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지성적 젊은이들과 청년들에게는 이해는 고사하고 소통되는 언어들이 아니라는 데에 적지 않은 고민이 있습니다. 어떻게 소통시키고 감각하게 해야 할 지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함께 동역하는 그 목회자의 아내도 이어 연이어 참여자들에게 토설했다. “현장에서 남편과 더불어 소통하려는 목회에 몸부림을 치면서 열린 목양 사역의 일환으로 파격적인 나눔, 눈높이의 낮춤, 교회스럽지 않은 것의 품음까지도 경우에 따라 진행하는데 가끔은 이렇게 사역을 하면서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두려움이 올 때가 있습니다. 어떤 목회가 정답인지에 대해 고민됩니다.”
서울 도심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지성적인 젊은이들에게 집중하고 있는 목사 부부의 진정성이 있는 목양 담론들을 들으면서 선배 목사로서 답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데 부끄럽게도 말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너무 당연하다고 믿고 쓰는 교회적인 언어들이 배타성을 갖고 있는 단어라니 아프다. 그러나 사실이기에 참담하기까지 하다. 더 고민되는 것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모르겠다는 아이러니이다. 진짜 모르기 때문인가? 이렇게 답하면 어떨까 싶다. 총론은 아는데 각론을 모른다고. 팀 켈러는 이 책에서 필자가 모르는 것에 대한 발군의 실력을 뽐낸다. 그가 말한 것은 세 가지로 대변된다. ① 주위의 문화와 공명하며 저항하는 것 ② 후기 현대의 저변에 흐르는 문화의 내러티브를 검증하라 ③ 설교의 상황화를 통해 청중의 변화를 이끌어내라 켈러는 이 세 가지의 담론들을 적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마무리를 소개하였다. “설교의 마지막을 ‘이렇게 살라’라는 문장으로 끝내지 말고, 대신에 이렇게 살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지만 그렇게 사신 분이 계심으로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도 이런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로 마무리하라”(p,242) 그렇다면 결국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설교는 교리적인 차원의 설교가 아니라 언어적인 차원의 소통임을 저자가 강조한 것이 된다. 오늘의 설교자들이 들어야 할 공감의 소리다. 불통의 시대에 소통의 언어가 설교라는 도구라고 사용되어야 한다는 당위적인 문제 앞에서 무겁지만 발걸음을 띠어야 할 저자의 가르침을 오늘 나와 네가 담아야 할 인 이유이다.
3. 성령을 덧입은 설교
저자는 이 테제의 소 테마를 이렇게 썼다. “설교자의 삶과 인격에 성령이 오셔야 한다.” (p,252) 폭격은 이어진다. “설교가 ‘들리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설교’보다는 ‘설교자의 삶’을 더욱 힘써야 한다.”(p,255) 필자가 이 책을 접하면서 가장 뜨겁게 담은 한 대목이 여기에 등장한다. “조지 휫필드가 처음 그의 설교를 출판하자는 재의를 받았을 때 그는 일단 동의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천둥과 번개는 지면에 담아낼 수 없을 텐데요.” (p,257) 목사로서 가장 힘든 것은 설교를 통해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설교자가 먼저 변해야 청중도 변하지 않을까 싶은데 설교자인 내가 변하지 않는 모습 때문에 심히 고통스럽다. 저자는 설교의 깊이를 들여다보는 세 가지 텍스트라는 틀이 있다고 밝힌다. ① 성경 본문 텍스트 ② 청중이 속한 콘텍스트 ③ 설교자의 숨은 마음인 서브 텍스트이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서브 텍스트이다. 정말로 넘어지기 쉬운 대단한 갈파다. Ⓐ ‘우리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로 대변되는 공동체 울타리 강화이다. Ⓑ ‘나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로 귀결되는 자기 과신과 교회 생산성 강화이다. Ⓒ ‘이 진리는 정말로 대단하지 않아요!’ 로 귀책 되는 지식 강화이다. Ⓓ ‘그리스도는 정말로 위대하지 않아요!’ 저자는 이 Ⓓ의 서브 텍스트만이 설교자가 가져야 할 텍스트임을 분명히 한다. 왜? 전제는 이 Ⓓ의 선포는 성령의 내주 하심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파생되는 설교자의 삶으로부터 나온다는 점 때문이다. 이 설교를 이렇게 정의해도 괜찮을 듯싶다고 저자는 에두른다. 이 텍스트를 ‘예배의 서브 텍스트’라고 말이다. 필자도 이 점에 동의한다. 설교자는 예배의 서브 텍스트에 목을 걸어야 한다. 이것을 실패하면 어마어마한 말의 능력과 구변의 탁월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설교자라고 말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제 글을 마감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의 말미에는 팀 켈러의 강해 설교 작성에 대한 매뉴얼이 소개된다. 필자는 이 대목에 대하여 추천하고 싶지 않다. 왜? 설교자의 삶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도리어 필자가 가장 주목해야 하며 놓치면 안 된다고 평가하는 것은 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공부하기와 영적 집중력이다. 모든 설교자는 각기의 상황이 다르다. 그러기에 이동원 목사의 설교 준비하기, 이찬수 목사의 설교 준비하기, 해돈 로빈슨의 설교 준비, 팀 켈러의 설교 준비하기가 같을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동일하다. 공부하기는 재론의 부연 설명이 필요 없다. 공부하지 않는 설교자에게 부탁한다. 제발 설교하지 말라. 또 하나, 설교자에는 각기 처한 삶의 자리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공히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하는 공통분모가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싶다. 저자가 말한 그대로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설교를 하는 성령으로 덧입는 집중력이다. 이것을 잃고 실패하면 청중만 죽지 않는다. 가장 결정적 치명상은 설교자인 내가 죽는다는 것이다. 팀 켈러의 글을 조금은 길게 북 리뷰 했다. 글을 마치면서 곱씹는다. 이렇게.
“주님, 내가 전하는 일체의 설교에 천둥과 번개가 있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