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강남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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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새물결플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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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8-06-13 16:5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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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의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새물결 플러스)를 읽고
대학원에서 TH.M 학위 과정을 할 때, ‘구약석의’를 당시 대한성서공회 총무를 역임하신 민영진 박사께서 강의했다. 그의 강의 전반은 구약의 포괄적 해석이었다. 보수적인 성향의 신학교를 졸업한 필자는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했던 성서의 세계에 발을 딛는 경이로움을 경험했다. 그 동안 주입되었던 나의 뇌 구조 속에는 친 이스라엘, 반 팔레스타인이라는 틀이 박혀 있었다. 그랬던 나에게 민 박사의 강의노트는 벼락이었다. 그는 강의 중에 이렇게 이사야의 예언을 끄집어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이사야 19:23-25
민 박사께서는 이 텍스트를 이렇게 석의했다.
“대한민국의 하나님은 북한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과 미국이 공격하고 있는 레바논과 이라크에 대하여 하나님은 내장이 끊어지는 마음으로 신원하며 아파하시고 있으며, 부유한 자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며 가난한 자와 구분 짓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분노하심이다.”
10년 전,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방문한 ‘나사렛’ 에 펼쳐진 거대한 담들을 보며 이곳이 인류의 죄를 십자가라는 도구로 헐어버리셨던 예수께서 자라나신 땅인가? 하며 장탄식에 젖었던 적이 있었다. 청파 교회 김기석 목사는 그의 한 책에서 이렇게 자신의 불편함을 녹여냈다.
“우리가 정말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람을 함부로 규정해 버리는 것이다. 분리의 장벽은 팔레스타인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수많은 경계선이 있다.” 김기석,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 꽃자리, p,15.
분리의 장벽이 어찌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과 이스라엘인의 거주 지역에만 있겠는가? 바로 내가 만든 분리의 담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있는 내가 바로 담 자체인데.
강남순 교수의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종교’(새물결플러스 간, 2016년)는 필자에게 수확이었다. 어떤 면에서 앞에서 전술한 분리의 장벽을 만들어낸 힘 있는 자들의 폭력을 글로 폭격하는 수확이었다. 이사야가 말했던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을 평등의 구조로 병행하여 함께 강복한 하나님의 신탁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수확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신에 대한 사랑 또는 예수에 대한 사랑은 사실상 교리적 고백이나 제도 종교에 헌신하는 가시적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사랑의 책임, 연대를 통해서만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이다.”(p,206.)
저자의 이 갈파는 이 책의 제목 전체가 주는 논지를 가장 극명하게 그리고 세밀하게 표현한 대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코즈모폴리터니즘(cosmopolitanism)’에 입각한 인간 이해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어느 나라 국민이든, 어떤 종교를 믿든, 어떤 민족/인종에 속하였는지 상관이 없이 살아 있는 인간은 단지 ‘생명’을 지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p,18)
이 인간 이해의 근거에 이의를 달 반론의 객체가 존재할까 싶다. 말 그대로 이념, 종교, 인종, 국가의 차이에 관계없이 동의해야할 가치이다. 유엔 인원 자문 위원이었던 장 지글러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에서 그래서 이렇게 말했던 것은 의미가 깊다.
“동일성은 다른 사람과의 진짜의, 혹은 상상의 만남, 단결 행위 등 한 마디로 공유된 의식에서 생겨난다.” 장 지글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p,170.
강남순 교수는 본인의 역작인 이 책에서 ‘코즈모폴리터니즘 에 대한 전 방위적인 학문적 전개를 해나감에 있어서 거침이 없었다. 아마도 전개하고자 했던 담론에 대하여 신학자로서 나름대로의 사명감과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해 보이는 학자적인 소명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의 비장함이 책 내내 펼쳐지고 있다. 제일 먼저 필자를 움직였던 ‘코즈모폴리터니즘의 귀환’에서 눈길을 끌었던 대목이다. 저자는 본인에게 상당한 사상적 영향을 준 가야트리 스피박의 논제를 독자들에게 던진다.
“세계(WORLD)라는 명사를 동사화한 ‘세계를 만들어감’(WORLDING)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이론을 창출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어느 특정한 방식으로 표산하고 만들어감으로서(WORLDING THE WORLD) 사실상 매우 중요한 실천을 창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p,38.)
왜 평자인 필자가 이 부분에 필이 꽂혔을까? 이어지는 강 교수의 비수 같은 지적 때문이었다.
“‘교리’에 갇힌 예수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주변인과 함께 살아갔던 ‘예수의 시선’이 어떠했을 지에 대한 상상을 해 보자. 그는 분명 인종, 성별, 성적 성향, 장애 등 다양한 종류의 사회-문하-정치- 경제를 넘어서 모든 사람을 고귀한 존재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개별인들의 존재론적 평등성과 존엄성을 전적으로 긍정하는 연민과 따스함을 지닌 ‘우주적 시선’, 이것이 바로 신학적 상상력에 의한 예수의 시선이다. 이 우주적 시선을 지니는 것, 바로 이것이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조우하기 위한 첫걸음이다.”(pp,41-42)
현장 목회자로 어언 30년이 넘는 시절을 정글 같은 로컬에서 부대꼈다. 목회 초년병 시절,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교리에 필자 역시 묶여 있었다. 그러나 목회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교리라는 범주는 제도권의 탑을 바벨로 만들기 위한 도리어 가장 졸렬한 세속적 냄새의 흉측한 괴물 같은 것임을 뼈저리게 느끼곤 한다. 필자는 성적 성향에 대하여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보수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분명히 표하지만 이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헌데 유감이 있다. 성적 성향의 다름을 갖고 있는 자들을 향한 교회가 던지는 폭력적 행위들이다. 예컨대 필자는 아주 가끔 매스미디어에서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인 범죄들은 보도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허나 어디 현실이 그런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들은 경쟁하듯 봇물처럼 기사화된다. 정말로 알 권리 때문일까? 속이 보여도 너무 보인다. 클릭수가 많아야, 시청률이 높아져야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회는 더 없이 피폐해진다. 그리고 더 말초적이 된다. 무척이나 유감스럽다. 성적 성향이 다른 자들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여론화가 아니다. 품어줌이다. 이렇게 말하면 수구적인 자들은 평자를 공격할 것이다. 동성애를 인정하는 목사라고. 매도하지 말라. 재 강조하지만 난 동성애를 반대하는 목사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교회가 이들의 일들을 여론화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들의 성적 성향에 다름을 여론화시키는 것 말고도 교회는 해야 할 일들과 돌이켜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 왜 여기에는 민감하지 않은가? 왜 품어주어도 회복될까 말까한 아픈 상처들에 소금을 뿌리는가? 코즈모폴리터니즘을 이해하는 종교는 너와 나의 종교적 편 가름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종교로 가능하다. 이즈음 하고 건너뛰어야 하겠다. 필자가 피력하고 싶은 본 책에 대한 관심의 밀도가 책의 후반부에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 필자가 서설한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철학적, 사회학적, 종교적인 담론들은 직접 독서를 통해 그 알짬들을 발견하기를 천(薦)한다.
제 7장에서 펼친 저자의 담론은 ‘코즈모폴리터니즘과 이웃사랑’이다. 저자의 시작에 주목해주기를 바란다.
“신학적 담론들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의 의미는 추구이고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타자들에 대한 책임성에 관한 것이다.”(p.203)
신학이 다루어야 할 내용 중에 어느 것 하나도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는 두 가지이다. 이 담론을 피력하고 있는 저자는 이 측면에서 적어도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시대의 보폭을 맞춘 동행자이다. 신학이 경박해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같은 의미만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다름의 의미도 보듬고 성찰해야 하는 데 너무 일방통행으로 같은 것만을 강제하고 있기에 무게감도 없거니와 설득력도 떨어진다. 신학의 지평은 반드시 다름의 쪽을 볼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두는 일이다. 저자가 필설하고 있는 또 다른 하나, 타자들에 대한 책임성이 신학의 임무라고 말한 점은 기막히게 아름답게 보이는 저자의 필(筆`)이다. 어떤 진보적인 이는 신학은 인간학이라고 강력하게 제시한다. 금년 초에 읽었던 ‘신학이란 무엇인가?’를 쓴 성공회대학교 권진관 교수의 갈파가 아직도 저의 뇌리의 한 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다.
“신학은 역사와 사회 속에서의 우리들의 신앙(마음의 지향)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위해 근본적인 질문, 즉 신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학문이다.” 권진관, “신학이란 무엇인가?”,동연,p,12.
이점에서 신학을 인간학이라고 말하는 단편은 이해하지만 전체적 함의를 동의하지 못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재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은 인간학이 다루는 대단히 중요한 필드를 간과해 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책임성’,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숙명론적인 기독교의 의무적 과제를 올바른 신학은 반드시 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이 점을 책에서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에 있는 ‘이웃 사랑’은 ‘신(神)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타자에게 대한 책임과 연대의 의미를 모두 총괄하고 있다. 따라서 ‘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 고백에 담긴 ‘타자에 대한 책임성’의 의미까지 모두 짚어내야 한다.” (p,203)
필자는 ‘타자에 대한 책임성의 의미까지 모두를 짚어내야 한다.’는 저자의 일성에 대하여 음미하다가 본회퍼가 테겔형무소에서 선언했던 그 명언을 떠올리며 오버랩 해 보았다.
“교회는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다.” 스티븐 니콜스,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아바서원,p,74.
저자는 본회퍼가 말한 이 촌철살인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교회의 이타성을 재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비장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치열하게 빈틈을 주지 않는다.
“이웃-원수-사랑의 명령은 나 자신과 같은 ‘동질성’을 지닌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그 동질성을 넘어 ‘다름(alterity)’을 지닌 사람들에게까지 이웃 사랑을 확장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는 이웃의 범주를 자신이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아닌 ‘보편적 타자’에게로까지 확장해야 한다.”(p,212)
저자는 이런 확장에 대하여 확신에 찬 기개를 가지고 이렇게 역설한다.
“이런 경계를 넘어서는 이웃 사랑의 의식은 코즈모폴리턴 정신과 근원적으로 만나고 있다. 예수의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세계에서만이 ‘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예수의 코즈모폴리터니즘 사상의 극치를 이룬다.”(p,213)
네이털리티(natality)의 재조명은 코즈모폴리터니즘 이해의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이웃 사랑의 근거를 더 확실시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죽음의 운명성, 인간의 절멸성을 ‘모털리티’(mortality)라고 한다면, 반대로 누구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탄생성’은 ‘네이털리티’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이 네이털리티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p,213.)
저자는 이 모털리티와 네이털리티의 상관관계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 학자가 바로 한나 아렌트라고 했다. 아렌트의 말에 의하면
“이웃 사랑이란 타자를 모털리티, 즉 절멸성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 속에 있는 영원히 변치 않는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한 사람 속에 있는 영원한 것이란 모털리티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 태어남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네이털리티’이다.”(p,214)
라고 갈파한다. 참 의미 있는 성찰로 여겨진다. 한나 아렌트의 지적이나 저자의 갈파에 필자가 동의하는 이유는 기독교가 내세우고 있는 교리적 장점 중에 하나인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공교롭게 모털리티의 영역에서 더 많이 해석하려는 무리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도리어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삶의 지경이 넓어진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네이털리티의 영역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필자도 동의하기 때문이다. 즉 이웃 사랑의 타당성은 운명론적인 차원에서 기독교가 접근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인간은 언제나 새로워져야 하는 존재이기에 마땅히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찾아야 함을 역설하고 싶다. 해서 이 공식이 결론적으로는 코즈모폴리턴들이 가져야 하는 의식 즉, 본인과 사랑해야 할 대상인 타자가 같은 배를 탄 우주시민이라는 의식으로 승화됨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교회는 이 의식으로의 진입이라는 명제 앞에서 선두에 서야 한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절멸성의 대상이고, 누군가는 탄생성의 대상이하고 구분지어서는 안 된다. 주군이셨던 예수께서는 언제나 탄생성의 반열에 서 계셨지 절멸성의 자리에 서 있지 않으셨기에 말이다. 저자의 글을 읽다가 파울 첼란의 시를 발견했는데 심쿵했다. 적어도 목사로 이 땅을 사는 필자는 이 마음으로 목양의 현장에 서 있는가를 재점검하게 해 주었기에 말이다.
“내가 진정으로 나일 때, 나는 너다.(I AM YOU, WHEN I AM I.)를 가능하게 한다.”(p,231.)
그래서 가야트리 스피박은 이렇게 말했다.
“마음을 바꾸는 구체적 행위가 사랑이다.”(p,232 재인용)
오늘 내가 섬기고 있는 한국교회가 쓸어 담아야 할 보석과도 같은 권고이다. 서평을 마감하면서 제 8장에 기록된 저자의 일설을 꼭 나누고 싶다.
“종교에 관한 논의에서 ‘신의 존재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 의 물음보다 더 중요한 물음은 이 세계에서 나는 어떠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이다.”(p,250)
저자의 이 질문에 담긴 속내는 아마도 이런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인지하면서 살아간다면 나는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코즈모폴리턴으로 사랑을 살아내야 함을 강력하게 에두른 발언이라고 말입니다. 평을 마치면서 이 점에 필자가천착하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음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에 절실한 필요조건은 이타적 사랑과 그 사랑함을 살아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요, 물질적인 빈곤함 때문도 아니요, 교리적인 이해의 무지 때문도 아니라 그 사랑의 삶을 살아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로 돌린다면 교회가 코즈모폴리터니즘에 대하여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인용한 존 카푸노의 말이 엄청나게 큰 공명이 되어 내 가슴을 타격한다.
“종교적인 사람의 반대는 사랑 없는(loveless) 사람이다.”(p,251)
그렇다. 종교는 그래서 ‘책임성’이라고 강조했던 이 책의 7장에 기록한 자크 데리다의 말이 크게 보인다.
결론 부분은 숨 가쁘다. 나는 어떤 목사로 살아야 할까? 그리고 어떤 목사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답해 준 걸작을 만났다. 행복한 오월의 마지막 날 밤이다. 2018년 5월 3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