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오생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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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서울신학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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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8-08-11 21:2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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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생락의 박사학위 (Ph.D) 논문 ‘은보(恩步) 옥한흠 목사의 설교 연구’를 읽고 서평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가 접을까도 생각하면서 망설였다. D-MIN 과정 수료자가 감히 Ph.D 학위 논문을 평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며, 하극상(?)이며 동시에 소가 웃을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옷매무새를 고치고 서평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학문적인 퀄리티의 차원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예의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한 달 전, 신학교 동기인 오생락 목사(춘천 하늘 소망성결교회 담임목사)와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그 날 받은 친구의 귀한 학위논문을 읽고 난 뒤에, 정글 같은 목회 현장에서 사역하면서 지성적 성찰과 사유함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목사의 직무에 손 놓지 않고 치열하게 달려온 친구의 수고와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을 보고 부럽기도 하고 또 뭔가를 친구 입장에서 전해주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먼저 친구는 섬기는 교회를 제자훈련이라는 매개를 통해 성장시키고 부흥시킨 살아 있는 간증자이다. 해서 그가 연구하기로 한 은보의 설교 연구는 또 다른 의미에서 멘토십을 가졌던 스승에 대한 최고의 예우였고, 동시에 자신감이었다. 해서 저자의 학위논문은 단순히 아카데믹한 자료일 뿐 아니라 교계와 학계에 대한 실천신학적인 공헌을 준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만한 논문이다. 은보 옥한흠 목사에 대한 인지도는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라면 모를 리 없는 거인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가 살아생전 지성, 영성, 감성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철저하게 균형 잡힌 목회자로 살아내기를 고민했는지 그가 남긴 수많은 저서들을 보면 익히 알 수 있다. 놀랄만한 측면은 복음주의 권에 속해 있었던 소위 말하는 보수성향의 목회자이며, 강남의 대형교회를 맡아 승승장구한 은보에 대하여 정도의 차이는 있긴 하지만, 진보적인 성향에 가까운 학자들과 논자들마저도 그에 대한 비판을 가할 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평했다는 점이다. 이유는 아마도 다른 일탈의 대형교회 목회자와는 나름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대척점에 있는 영역에서도 인정했다는 방증이리라. 필자 역시, 그가 2007년 행한 부활절 연합 예배 설교를 들으면서 한없이 부끄러웠고 고개를 들을 수 없는 공범자임을 인식한 감동을 간직하고 있다. 대형교회 목사가 행한 설교 중에 몇 안 되는 명 설교로 인정할 정도로 은보의 독특했던 선배 설교자의 그 날의 감동은 시간이 만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장 목회자인 필자의 의식과 뇌리에 가득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은 웬만한 상식의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라면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공히 같은 분모를 갖고 있을 것이라 사려된다. 저자는 은보의 설교 연구라는 제목에 걸맞게 존재하고 있는 그의 설교와 자료들 그리고 동영상 자료들까지 수집하여 그의 설교를 설교 초기(1978-1984)와 중기(1985-1989) 그리고 후기(1991-2003년)으로 설정하여 집요하게 분석하였고 연구한 수고가 엿보였기에 학자적 고집으로 무언가를 실천신학계 특히 설교학계에 공헌하겠다는 본인의 의도를 여실히 논문에서 보여준 저력을 발휘했다. 저자는 897편의 주일 설교를 분석하는 노고, 더불어 단순히 설교 내용의 분석이 아닌 설교를 통해 은보가 알리고자 했던 신학과 목회적 철학, 그리고 교회의 교회다움, 신자의 신자다움, 목사의 목사다움이라는 명제를 실천하기 위해 평생을 걸었던 은보의 사상을 발취하는 발군의 실력을 논문에서 유감없이 펼치고 있다. 이런 수고의 과정을 거친 뒤에 오늘의 독자들이자 후배들인 필자와 같은 자에게 어떻게 설교를 준비해야 하며, 전해야 하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설교한 대로 살아낼 것인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하는 화두를 던져주었다. 저자는 은보의 설교를 이렇게 연구결과 정의했다. (pp,156-160) ① 깊은 묵상과 주석을 통한 본문 연구 설교 ②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한 설교 ③ 성육신 원리에 입각한 설교 ④ 철저하게 준비된 설교 ⑤ 상처받은 치유자의 설교 ⑥ 삶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설교 가만히 되새겨보면 그 어느 항목 하나를 삭제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설교자의 기본자세를 열거하고 있는 설교이다. 이런 자세를 갖고 설교를 준비하고 선포하다보면 항상 설교자에게 도전되고 곱씹게 되는 목회자로서의 태도가 비쳐지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바울처럼 예수님을 생각하면 기쁘고 흥분되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식어버린 것 같다. 나부터 다시 바울처럼 은혜를 회복하고, 성도들도 바울처럼 같은 은혜를 느꼈으면 좋겠다.”(p,169.) 기막힌 성찰이다. 존스토트 목사는 이렇게 ‘설교’ (IVP, 간)에서 일갈한 적이 있다. “설교자는 설교만 말할 수 없다. 그는 또한 살아내야 한다.”(p,157) 은보 역시 존 스토트의 이런 말을 곱씹으며 설교하는 설교자로 서기 위해 목을 걸었던 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설교하는 구약학자인 월터 브루그만도 본인이 행한 설교에 관한 11편의 명 강의를 묶은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에서 이렇게 필자를 불 질러 놓았던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설교자가 선택할 전략은 텍스트를 이용해 현재 생활 세계를 정당화할지, 아니면 사람들의 견해에 도전해 위기를 조성하면서 다른 생활 세계를 제시할지 하는 것이다.”(p,201) 적어도 브루그만의 말대로라면 은보는 후자의 설교자였다. 그리고 저자인 오 목사도 논문의 논지 중에 하나를 바로 이 대목에서 힘주어 말하였던 것을 보면 초록이 동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자도 바른 설교자로 살고 있음에 필자도 동의하고 또 공감했다. 저자는 이 논문을 마감하는 발전적 제언에서 필자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일침을 내놓는다. “은보 옥한흠 목사가 소천한지 벌써 5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에는 여전히 옥한흠 목사를 그리워하고, 그의 설교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가 아직 한국 교회 안에 옥한흠 목사의 설교의 영향력을 뛰어넘을만한 메시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p,186.) 저자는 은보의 설교에 대한 약점도 과감 없이 비판하며 아쉬움을 표했다. 가부장적인 설교, 신약성경에 치우친 편식의 설교, 주석적인 오류와 한계까지 파헤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 내용들을 아쉬움으로 대변하고 끝맺는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은보가 가지고 있는 단점들은 장점들로 충분히 보완된다고 저자가 믿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친구 목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다가 갑자기 뉴욕 리디머 교회의 담임인 팀 켈러가 ‘설교’에서 인용한 조지 휫필트 목사의 이야기가 떠올라 소개하고 싶어졌다. “조지 휫필드가 처음 그의 설교를 출판하자는 재의를 받았을 때 그는 일단 동의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천둥과 번개는 지면에 담아낼 수 없을 텐데요.” (p,257)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은보의 설교 중에 천둥과 번개가 정말로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래도 행운아이다. 은보는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천둥과 번개를 맞고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은보의 제자군에 속한 본받고 싶은 동기 목사이자 존경하는 친구이다. 그래서 그가 사역의 현장에서 전하고 있는 일체의 사역은 필자에게는 벤치마킹의 자료들이자 이미테이션의 대상들이다. 너무나 늙어버린 거대한 공룡과도 같은 한국교회를 위해 현장에서 지성과 영성과 감성으로 씨름하고 있는 친구가 같은 하늘에 있어 행복하다. 그는 그래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박사 학위를 받을 만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친구의 승리와 건승을 중보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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