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정용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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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새물결플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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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8-11-29 21:4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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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의 ‘목사 공부’를 읽고 일주일에 세 번은 반드시 탁구장에 나가서 시간 반 정도 땀을 흠뻑 뺀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탁구부에서 약 1년 동안 기본기를 익힌 것이 평생을 갖고 가게 될지 상상도 못했는데, 탁구를 취미로 즐기는 나에게 그 1년은 대단히 소중한 시기였음을 근래 재삼 확인한다. 레슨을 받은 동아리 회원들을 보면 부쩍 부쩍 자란다. 반면 동네 탁구를 친 자들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도찐개찐이다. 왜 그럴까? 기본기 때문이다. 모든 운동과 공부가 그렇듯이 기본기를 단순히 기본기로 남아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기본기가 축적되어 있는 자는 곧바로 성장하는 틀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정용섭 목사를 떠올리면 이런 단어들이 복기된다.
“신학교 선배, 조직신학자, 독설가, 기존 교단 교회에서는 목회가 불가능한 자”
이런 등등의 수식어는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도 있고, 부정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정용섭 이라는 이름의 뉘앙스가 주는 메타포는 ‘바른’, ‘상식’, ‘기본기’ 등등이다. 4-5년 전, 그의 설교 비평을 접하면서 난 개인적으로 많은 수확(?)을 거두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한국교회의 소위 말하는 기라성과 같은 큰 목사들의 강단 메시지는 몇 몇을 제외하고 몹시 불편해서 거북했는데 그 체기가 뻥 뚫리게 해주는 수확을 얻게 해주었고 더 큰 보너스는 그래서 설교자의 공부가 어떠해야 하는지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매를 맞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분 좋은 추억을 갖고 있던 차, 그가 출간한 ‘목사 공부’라는 또 다른 도전적인 제하의 책을 읽어야 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거의 1년 만에 대학원에서 강의를 따라오는 신학생들을 위해 추천하고 싶은 마음에 지난 달 미뤄온 숙제를 마감했다. ‘목사 공부’ 듣는 이에 따라 상당히 불편하거나 심지어 불쾌할 수 있어 보이는 문구를 만들어낸 정 목사는 이런 면에서 끌어당김의 천재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미리 전제하지만 신학교 선배임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필드 중에 ‘예배’, ‘헌금’, ‘장로’ 그리고 ‘성찬예배’에 대한 소고에서 상당히 큰 괴리가 있기에 실천신학적인 총론에 있어서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부분이 많은 반면, 개론적인 부분에서 있어서는 비판할 내용이 상당수 있음도 분명히 적시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적인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선배의 지성적, 영성적 목양의 태도에 대하여 존경을 표하고 싶다. 특히 이 책을 통해 필자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읽었던 대목은 책의 말미에서 저자가 가쁜 숨을 쉬듯 토설한 ‘목사의 죽음’과 ‘목사의 구원’의 테제였다. 저자는 죽음과 구원이라는 존재론적인 단어들을 연관시켜 해석했다. 특히 이 두 단어를 목사에게는 거의 금기시되는 개인화, 객관화의 작업으로. 대단히 감동적인 작업으로 펼쳐내 필자는 저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죽음이란 ‘살아 있는 동안 인간관계를 비롯한 일체의 관계와 업적을 상대화하는 훈련이다.”(p,293.)
이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목사가 죽음에 대하여 설교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저자의 직격탄을 맞았는데 불편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사했다.
“죽음을 아는 것만큼 생명이 눈에 보일 것이며, 생명을 아는 것만큼 죽음이 눈에 보일 것이다.” (p,296)
이렇게 ‘죽음’에 대한 상투적이지 않은 해석도 신선했는데 ‘구원’은 책의 줄기 중에 압도하는 압권이었다.
“목사로 평생을 살아온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이것은 나 자신을 향한 신앙 양심의 소리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매주 설교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공동체를 꾸려가야 하는 목사의 숙명론적인 이런 질문 앞에 벌거벗고 살아야 한다. 목사라는 직책, 목회의 업적, 신학적 사유 능력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목사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위기에 놓인 사람이다. 신자는 그래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성찰할 순간이 있지만 목사는 그게 없다.”(pp,303-304)
저자의 이 말에 대하여 상당히 불편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묻고 또 물어야 하는 것은 그래야 목사가 정직해지고 겸손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운운하고 언급할 수 있겠나 싶은 것은 필자도 동의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한 이 세상과의 단절은 바로 이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이요, 구원이다.”(p,305)
저자는 조직신학자이다. 동시에 그는 보편의 역사와 관련하여 성경을 해석한 판넨베르그를 전공한 학자이다. 그러기에 그의 신학적 영역은 진보적일 수밖에 없고 동시에 저자의 신학적 개념의 해석도 주류적인 해석과는 상치되는 점에서 숙명적으로 대립의 각을 세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이단아적인 성향의 목사인가? 그의 목양적인 내용을 아는 사람은 그가 어떤 면에서 상당히 상식적이며 보수적인 컬러를 지닌 목회자요, 신학자임을 인정한다. 필자도 그 점을 수긍하는 편이다. 그러므로 그가 주장하는 구원이라는 단어의 설명에 대해 시비를 걸지 않았으면 한다. 그가 구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이유를 조금 더 들어보자.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으니까 살아 있는 한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경험함으로서 현재적 구원도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런 경험들이 시시때때로 주어진다. (중략) 그 경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다.”(pp,306-307)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구원의 결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 즉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대단히 은혜로운 결론을 제시한 셈이 된다. 교리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해석과 인식은 다양할 수 있기에 저자가 말한 ‘구원’에 대한 토론은 이 정도로 약(略)하자. 도리어 필자가 주목한 것은 목사가 회피하거나 금기시하는 본질적인 내용 즉 구원에 천착했다는 점이었다. 이 점은 성향의 여하와는 관계없이 격려해야 할 대목이다. 이제 필자는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다시 이 책의 앞부분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저자는 책머리 부분에서 한국이라는 땅에서 바른 목사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객설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눈이 충혈 될 정도로 그의 세밀한 심미안적인 통찰에 머리를 숙였다. 왜? 그가 종합한 대한민국 목사의 쓸쓸한 현주소를 이렇게 필자가 갈무리했기 때문이다.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목사만 찾고 있는 한국교회, 거기에 부합하여 살아남기 위해 목사라는 정체성과는 이미 결별한 수많은 목사가 들끓고 있는 아픈 현장이 바로 조국교회다.”
이 아픈 현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목사의 슬픈 자화상이다. 한국교회가 요구하는 목사의 정체성은 신실함이 아니다. 그건 물 건너간 지 이미 오래다. 교회의 행정을 점령한 정치적 기득권자들의 목적과 보는 눈은 하나다. 오직 교회를 어떻게 하면 성장시키는가이다. 교회 성장론에 함몰되어 있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긔 괴물들과 함께 가려면 목사는 타협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승리가 아닌 성공을 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성서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성서를 연구하면서 ‘사실(FACT)과 사건(EVENT)’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주해를 해야 할 목사들은 그것에 대하여 연구할 시간도 동기도 갖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교회라는 공동체와 단체는 지적인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목사들이라도 교회만 성장시키고 부흥시키면 되는 괴물 목사들을 만들어내는 이상한 공동체로 변질되었다. 이 기막힌 상태를 보고 저자는 성서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완전히 배제한 질 떨어지는 설교를 양산하면서 성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현실에 대하여 한탄한다. 그는 적어도 목사가 강단에서 설교를 행하기에 앞서 그가 전하고자 하는 성경 텍스트에 대한 본문을 단순히 ‘사실 언어’ (fact language)가 아니라 의미 충만한 ‘사건의 언어’(event language)로 읽어야 함을 강조한다.(p,21) 필자도 그의 지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 성경을 해석할 때 설교자는 즉 해석자는 ‘성서 뒤의 세계’, ‘성서 속의 세계’, 그리고 ‘성서 앞의 세계’를 파악하는 접근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목사 공부는 이 작업을 독려하는 책이다. 단순한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고찰만을 제시한 책이 아니다. 실천신학적인 고민이 담겨 있는 성찰의 책이다. 그래서 목사들은 물론, 목사가 되고자 하는 자라면 섭렵해야 하는 필독서이다. 이 책은 은혜로운 책이 아니다. 교회의 리더인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근접한 목사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하는 책이다. 판넨베르그 이야기를 했으니 끝내면서 그의 말을 하나 인용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사 속에 현현했던 논리적 구조는 어떻든 모든 피조물 속에 현존해야만 한다.” (판넨베르그, 자연신학, p,53.)
대가의 말을 읽다가 페러디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목사는 현존하는 목양의 필드와 그곳에 거하는 신자들 사이에 현존할 때 목사다.”
그 현존은 공부로 나타난다. 그래서 목사는 부단히 공부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