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말씀읽기와 적용 (WORD)사역하기 (WORK)설교요약 (SUMMARY)2018년 8월 1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88번째 강해) 제목: 이런 부부 없습니까? (1) 본문: 고린도전서 16:19-20
오늘은 부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본문에는 바울이 편지를 마감하는 글에서 스데바나와 브드나도, 그리고 아가이고의 사역에 대하여 감사하고 난 뒤에 또 한 부류의 잊지 못할 부부를 소개하며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들에 대하여 예우 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을 읽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설명 드리면 에베소로 대변되는 아시아 교회들이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문안한다고 의미입니다. 이렇게 말한 바울은 곧이어 아굴라와 브리스가라는 부부가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 문안한다고 했습니다. 주목할 문구는 ‘그 집에 있는 교회’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문안한다는 대목입니다. ‘그 집에 있는 교회’는 에베소 교회입니다. 성경이 조명하고 있는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에 대한 첫 번째 증언은 사도행전 18장입니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의 경로 중에 고린도에 들어왔을 때였습니다. 이때는 바울이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17장에 기록된 아덴 사역에서 별로 거둔 열매가 없었고 거의 피신하다시피 옆 도시인 고린도로 혈혈단신으로 건너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없이 홀로 사역하러 고린도로 들어온 바울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바로 그 외로웠던 장소인 고린도에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위해 미리 사람을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8:2-3절입니다.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이들은 주후 52년에 재위했던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 살고 있는 일체의 유대인들을 로마 시에서 추방하는 반유대주의 정책을 피는 바람에 졸지에 로마에서 쫓겨나 고린도로 건너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침 이들 부부의 직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기에 자비량 선교를 위해 같은 직업을 선택했던 바울과 1년 6개월 동안 함께 거주하면서 바울에게서 복음의 능력은 물론 대단한 선교적인 비전을 배워 함께 공유하며 사역의 동역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이후 이들 부부는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바울이 마치고 에베소로 건너가자 미련 없이 바울과 같은 배를 탑니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에는 미리 로마로 다시 건너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마음 밭을 열도록 미리 사역해 준 정말로 좋은 응원자들이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에베소에서 이들은 바울을 도와 경제적인 스폰서로 서서 지근거리에서 지원하였음을 사도행전 18:18-23절이 증언합니다.
또 한 가지 이들 부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신앙적 수준이 이어지는 사도행전 18:24-28절이 보고하는데 대략과 같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학자이자 크리스천인 아볼로가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건너옵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도에 대하여 열심히 전하며 전도하는 것을 이들 부부가 유심히 봅니다. 문제는 아볼로의 구변 좋은 설교와 가르침은 탁월했는데 요한의 세례만 증언할 뿐이지 성령의 세례에 대하여는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이것을 안타깝게 여겨 아볼로를 초청해 성령의 세례에 대한 나눔을 전하였고 명석했던 아볼로는 자기가 알지 못하고 있었던 성령 세례에 대하여 인지하고 성령 세례를 증언하는 승리의 사역자가 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일까지 감당했음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자세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단순히 바울의 경제적 스폰서로서의 역할만을 감당한 자들이 아니라 이미 성령의 세례를 경험한 시대가 요청하는 제자로서의 역할을 넉넉하게 감당하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제 이들 부부의 사역을 하나만 더 증언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이렇게 바울을 도와 사역했던 이들 부부의 신앙적 압권은 자기들의 집을 고린도에서도, 에베소에서도 교회의 터로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주후 1세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로는 공적인 건물 말고는 거의 전무했던 실정입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교회 공동체가 모이는 건물이 있을 리 만무입니다. 아마도 바울의 열정과 그의 일행의 열정적인 사역을 전제한다면 고린도도, 에베소도 회심하여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적지 않았음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교제하고 예배를 드리도록 자신들의 집을 공개한다는 것은 정말로 놀랄만한 헌신과 신앙의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여성이었던 브리스가는 집이 자신의 사생활을 누려야 하는 소중한 장소인데도 말입니다. 자기의 집을 교회로 내놓았다는 헌신은 대단히 괄목할 만한 그리고 본받을 만한 믿음입니다. 적어도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이런 헌신과 사역을 감당해 주었기에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그가 내놓은 에베소 교회 공동체 무리 전체에게 문안할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로마서의 에필로그에서 바울은 어떤 의미로 보면 이 두 부부에 대한 최고의 극찬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합니다. 로마서 16:3-4절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이 구절에 기록된 헬라어 ‘트라켈론’은 ‘목’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더 큰 영적인 의미는 ‘급소’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호흡이 진행되는 통로가 목이라는 급소임을 감안할 때 얼마나 이들 부부가 바울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음을 가늠하게 해 줍니다. 적어도 에베소에 있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제공했던 에베소 교회공동체에 있었던 모든 형제와 자매들이 고린도교회 공동체 지체들을 위해 안부와 문안 인사를 하면서 본문 20절은 마감됩니다.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이상의 본문 주해를 통해 저는 오늘 교회가 교회에게 문안하는 공동체적인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전제하면서 설교 제목에서 언급한 대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주목하고자 합니다. 제가 이 부부들에 대하여 욕심을 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나누고 다음 주에 또 한 가지를 나누겠습니다.
첫째로 이들은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았던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9절을 다시 읽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에베소에서 만들어진 에베소교회 공동체는 이 두 사람 부부의 집이라는 공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가 제공한 에베소 교회 공동체가 고린도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문안하고 교제하는 이유는 단순히 친교의 차원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들 모두가 ‘주 안에 있는’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특징은 ‘주 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주 밖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본문이 소개되고 있는 시대 공동체에서는 주 안에 있다는 말은 목을 걸어야 하는 시대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로마의 통치 권력이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던 바로 그 때 ‘주(큐리오스)’는 오직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호칭이었습니다. 바로 로마의 황제인 시저입니다. 만에 하나 로마의 시저 외에 또 다른 존재에게 ‘큐리오스’ 즉 ‘주’라는 호칭을 붙인다면 그것은 반역이었고, 죽음을 당하는 빌미였습니다. 이렇게 살벌한 여건 속에서 개인도 아닌 교회 공동체가 또 다른 교회 공동체에게 보내는 서신은 분실의 위험, 도난의 위험 등등 곳곳에 지뢰밭이 산재해 있었던 시기였기에 주라는 호칭을 쓴다는 것은 목을 걸어야 하는 일종의 도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편지에 기록합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19절)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주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또 그들이 제공한 에베소 교회는 주 안에 있는 공동체입니다.”입니다. 이렇게 주 안에 있는 에베소 교회 공동체가 고린도에 있는 또 다른 주 안에의 공동체에게 문안한다는 것은 대단한 담대성을 담보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한 복판에 기둥같이 서 있는 자들이 바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지역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이런 정체성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로마서 16:3절을 나누어 보실까요?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근래에 불교가 아주 많이 시끄럽습니다. 저는 다른 종교의 막장 드라마에 사사건건 시시비비가 어떠한가를 말하려고 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승려 설조가 한 말 중에 이 단어는 가슴에 새겼습니다. ‘유사승(類似僧)들은 교단을 떠나라’
저는 눈을 우리 기독교계로 돌려 봅니다. 동성애라는 범죄 앞에서 통회하고 자복하자는 절절한 통념의 그리스도인들을 차별을 정당화하는 자들이라고 도리어 밀어 붙이는 자유주의적인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인 자들이 이 땅에 존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라고 말하면 고조선 시대의 이야기라고 치부하여 다른 것도 말하고 구원의 범신론적인 다양성을 인정할 것을 종용하는 즉 다른 구원의 복음을 인정하라는 세속의 공격은 물론 교회 내의 무서운 유사 기독교인들도 칼을 들고 있습니다. 이단을 이단이라고 말하면 이제는 버젓이 이단들이 법적으로 고소를 하는 차별 금지법이 대세가 되어 기독교를 능멸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심각한 데도 그리고 모두의 질타 소리가 하늘을 뚫고 있음에도 너무나도 강철 같은 견고함으로 아들에게 대형교회를 세습함에 있어서 전혀 부끄러워 않는 에 대하여 유사 교회들이 이 땅에 즐비합니다. 도리어 이런 패역함을 아픈 마음과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적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정체성을 강조하면 정신병자 취급하는 자들이 유사 교회들도 오늘의 교회 안에도 존재합니다. 주 안에 있는 자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갖고 세상을 리딩해야 합니다. 정체성이 희미하여 젊은 아이들의 말대로 세상에게 리딩 당하는 쪽팔림을 당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순교적인 시대를 살면서도 그 순교의 빌미가 되는 주 안에 있음을 자랑한 분명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그립습니다. 나는 우리 교회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같은 부부들은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견지하고 이 땅에 당당히 살아가는 승리의 주체들이 많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11:26절을 읽겠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크리스티아노스’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호칭을 받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처럼, 아시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진짜 주 안에 있는 자라고 인정받았던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그렇게 주의 사람들로서의 삶을 살아내어 복음을 갉아 내리는 좀비 같은 유사 그리스도인들이 즐비한 이 땅을 예수의 이름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귀한 성도들이 우리 세인 지체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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