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말씀읽기와 적용 (WORD)사역하기 (WORK)설교요약 (SUMMARY)2018년 8월 1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87번째 강해) 제목: 영악한 자 되지 말라 본문: 고린도전서 16:15-18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비극은 영악한 자들이 너무 많은 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영악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말하면 얍삽하다는 말입니다. 헌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영악함과 얍삽함과는 정반대되는 삶을 살았던 그래서 미련스럽게 보이는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주목할 만합니다. 본문 15절을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소개한 미련하리만큼 우직한 사람, 얍삽한 것과는 담 쌓은 사람이 바로 스데바나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성서적 내증을 참고하면 스데바나와 그의 집에 있는 사람들은 아가야 지역에서 바울에 의해 복음을 듣고 회심한 그래서 구원을 받은 첫 열매라는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참고할 것은 아가야 지역입니다. 고린도전서가 기록된 시기로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주후 55년경 그리스 남부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로마 당국은 그리스 남부 지역을 아가야로 구분하여 그 지역의 수도를 고린도로 정했습니다. 그렇다면 아가야라는 지역은 고린도를 포함하는 것은 물론 헬라 철학의 본거지였던 아덴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넓은 지역에서 바울이 성령의 은혜로 만든 첫 회심의 열매인 스데바나와 그의 온 집을 소개하노라면 바울 스스로가 얼마나 감격적이었을까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감격은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가 행했던 사역의 결과물은 더욱 바울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15절 후반절을 다시 읽습니다.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 바라” 저는 고린도전서 강해를 시작하면서 이 편지에 대한 대략적인 선 이해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쓴 편지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두 개가 아니라 애초에 세 개였다고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5: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여기에서 바울이 언급한 편지는 고린도전서보다도 더 먼저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편지는 상실되었습니다. 이 편지는 특히 음행에 대한 권고와 같은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었기에 보관되기를 기대했지만 분실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바울은 긴박성을 가지고 다시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다만 분실 전까지 그 첫 번째 편지의 내용을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읽었다는 점은 그나마 위안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읽었던 자들이 순종이 아닌 불순종으로 가닥을 잡고 음행의 죄를 그치지 않자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있었던 뜻 있는 자들 중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스데바나 외 더불어 그와 함께 한 일행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는 서신을 작성하여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로 가지고 온 것이 오늘 본문의 정황입니다.
이 일행에 참여한 자들의 명단이 17절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였습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본문 17절) 일련의 이런 아름다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에베소에 온 스데바나 일행에 대하여 바울은 칭찬의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16절에서는 이렇게 극찬합니다. “이 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조금 전에 소개했던 17절 하반절에서는 ‘그들이 너희(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 중에 바울의 대척점에 서 있었던 자들)의 부족한 것을 채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마지막 절에 표현한 바울의 칭찬은 절정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 주라” 저 역시 바울이 극찬하고 있는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행보에 대하여 동의하고 같은 마음을 품습니다.바울이 이들 일행의 사역에 대하여 극찬하고 있는 것에 동의하며 저는 또 한 가지의 내용을 오늘 설교의 포인트로 잡았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의 시작인 15절을 눈여겨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구절의 후반절은 다시 되새겨야 하는 구절입니다. 스데바나가 한 사역의 발군(拔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개역개정판 성경의 번역이 이렇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어성경을 직역하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을 섬기는 일을 자진해서 맡은 가정입니다.” ‘작정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헤탁싼’은 ‘스스로 결정하다 즉 자진하다.’는 의미의 단어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해서 C.K 바레트 교수는 이렇게 번역한 내용을 자신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스데바나 가족) 바울에게로부터 그런 일을 떠맡은 것도 아니었고, 교회를 통해 맡은 것도 아니었다. 주제넘게 나서려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봉사와 겸손의 정신으로 자진해서 맡은 것이었다. 추측건대 그 일을 완수하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직접 위임받은 것이다.”(바레트, 국제성서주석, 고린도전서, p,447.) 저는 바로 이 구절의 직역을 통해 대단히 매력적인 단어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진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왜 제가 이 단어를 매력적인 단어라고 정의했습니까? 설교의 서두로 돌아가 이렇게 비교해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진하는 삶, 자원하는 삶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영악한 것입니다. 얍삽한 것입니다. 계산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굴리는 것입니다. 스데바나의 가족 그리고 외연을 확장하여 브드나도와 아가이고 일행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 행보는 자진함이었습니다. 자원함이었습니다. 영악하지 않음이었습니다. 계산하지 않음이었습니다. 얍삽하지 않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런 순결한 신앙의 자세를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보상하셨습니까? 바울을 통한 보상이었습니다. 본문 16-18절을 복기하겠습니다. “이 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니 그들이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웠음이라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 바울이 대신 그들의 수고를 격려하는 세 가지의 위로는 ① 이들이 원하는 것에 대하여 순종하라 ② 이들의 사역에 대하여 기뻐한다. ③ 이 사람들을 알아주라입니다.
이 구절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교우들에게 여러 차례를 전했던 목회 철학이 정답임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계산하지만, 하나님께 계산하지 않는 삶을 살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계산하지 않으신다.” 이사야 39장으로 여러 교우들을 초대합니다. 이사야 38장은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려 하나님께 벽면기도를 드리며 생명 연장을 간구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뜨거운 그리고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15년이라는 생명을 연장 받은 감동의 드라마가 실려 있는 장입니다. 헌데 38장의 해피엔딩이 39장에 들어서면서 대단히 불행한 언-해피엔딩(unhappy ending) 스토리로 급반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근동의 강자로 부상한 바벨론의 발라단은 남 유다의 정황을 살피기 위해 히스기야 왕의 문병과 치료 축하사절로 위장한 아들 므로단발라닥을 사절로 보냅니다. 그런데 이 축하 사절을 받은 히스기야는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일국의 왕인지를 뽐내고 싶었습니다. 그 뽐냄의 한 편에는 우리가 이런 강대국이니 까불지 말라는 위세의 표현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신단을 왕궁을 초청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보여줍니다. 군사력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한 머리 굴림이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이 괴이한 행동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를 불러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그 내용이 이사야 39:5-7절입니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의 머리 굴림의 결과는 유다의 멸망은 물론 히스기야 본인의 후계 가계도의 전멸이라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은보 옥한흠 목사의 설교 연구”라는 친구 목사의 박사 학위 논문을 다 읽고 서평을 준비하다가 옥한흠 목사가 평소에 자주 되뇌며 아파했던 한 구절이 가슴을 터지게 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바울처럼 예수님을 생각하면 기쁘고 흥분되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향한 열정이 식어버린 것 같다. 나부터 다시 바울처럼 은혜를 회복하고, 성도들도 바울처럼 같은 은혜를 느꼈으면 좋겠다.”(오생락, ‘은보 옥한흠 목사의 설교 연구’, 서울신학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p,169.) 한국의 초대형교회를 담임했지만 여타 다른 대형교회 목사들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달랐던 은보 옥한흠 목사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첫 사랑의 신앙으로 살기를 소원했다는 이 믿음의 행보를 접하면서 왜 그가 사후에 더 존경받는 한국교회의 어른이자 진보나 보수를 아우르는 목사들의 사표가 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감동을 독서 과정에서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에게 오늘 설교의 교훈을 문장으로 전하고 기도하겠습니다.
※ 하나님의 교회에서 인정받아야 하고 칭찬받아야 하는 대상은 계산하지 않고 영악하지 않기를 결심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수고를 안다. 고린도교회 형제들아 이들이 원하는 것에 대하여 순종하라, 이들의 사역에 대하여 내가 기뻐한다. 이 사람들을 알아주라“ 세인교회를 섬기는 지체들이여! 하나님 앞에서 계산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그들을 계산하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영악해지면 하나님도 우리들을 계산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삶의 여정을 순결함으로 끝까지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13:22절을 읽겠습니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구절에 등장하는 ‘마음’이라는 헬라어 단어 ‘카르디아’는 ‘심장’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언어로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심장을 쿵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가만히 이렇게 설교 문장을 정리하다가 갑자가 다윗이 몹시 부러워졌습니다. 영악한 자 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하나님의 심장을 쿵하게 만드는 자가 우리 세인 지체들이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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