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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2018.7.29 설교 요약지2024-04-23 16:49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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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29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85번째 강해)
제목: 기초 체력이 있으십니까? (1)
본문: 고린도전서 16:13-14

우리는 고린도전서라는 편지를 지난주까지 84주에 걸쳐 치열하게 살펴왔습니다. 얼마나 고린도교회가 만만치 않은 교회였는지 동의하는 분들은 치열이라는 단어를 수긍할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오늘 한국교회가 짊어지고 있는 일체의 문제점을 미리 경험한 선배 교회가 고린도교회라고 말을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골치 덩어리였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지성, 영성, 그리고 감성까지 포함하여 고린도교회를 치료하기 위한 최선을 다했음을 우리는 84주 동안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보고 있는 16장에서 그는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편지를 마감해도 정말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의 짧은 두 구절이지만 다시 한 번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다시 한 번 쐐기를 박는 듯한 영적 권고를 선언합니다. 본문 13절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주목하십시다. 13절은 단절이 아니라 연결이라는 점을. 고린도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에게 바울이 권고 겸 명령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1) 남자답게 강건하여야 한다.
원어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번역해야 정확한 번역입니다. ‘안드리제스테’ 즉 ‘용감하라’와 ‘크라타이우스테’ 즉 ‘힘을 내라’는 단어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용감하십시오. 그리고 힘을 내십시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용감하라고 권하고, 힘을 내라고 말한 대상이 누구일까? 에 대해 설교를 준비하면서 깊이 상고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편지의 말미에 이 선언을 한 것은 대다수의 가장 지극히 평범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경주를 감당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런 권면을 아끼지 않은 것입니다. 주변에 이상한 신자들이 너희들을 이상한 논리나 궤변이라 교리를 가지고 흔들어도 상심하지 말고 용감하게 신앙생활을 감당하라는 것이었고, 힘을 내라는 위로였을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렇게 용감하게 힘을 내서 신앙의 경주를 하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두 번째의 영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2)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13절을 다시 읽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중반절에 ‘믿음 위에 굳게 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냥 용감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그냥 힘을 낼 수 없습니다. 힘을 낼 수 있는 전제 조건, 용감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함을 정확하게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 위에 설 때라는 전제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믿음에 굳게 서서’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 번역은 원어에 있는 단어 하나를 생략한 번역입니다. 바로 정관사 ‘호’입니다. 원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믿음 위에 서서’ 라고. 정관사 하나가 무엇이 그리 중요합니까? 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정도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굳게 서야 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가 84번에 걸쳐서 살폈던 바울이 말한 그 믿음입니다.고린도전서 1:18절을 읽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바울이 가장 상식의 선으로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붙들어야 할 그 믿음을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십자가의 도’
이것을 인지하십니까? 성도의 기초 체력이 바로 십자가의 도임을. 이것이 흔들리면 성도는 전부가 흔들립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2절에서 이렇게 더불어 역설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세속의 사람들은 이런 바울을 가리켜 이렇게 공격할 것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배타주의자”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21세기의 영적 상태는 단순히 교회가 그 동안 걸어왔던 우리들만의 리그, 이타적이지 않은 이기적인 교회의 성장 논리로 인해 기형적으로 일그러진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돌아서라는 충고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데에 저는 적지 않게 당황스럽습니다. 고린도전서가 기록되었던 줗 1세기 중엽이나 혹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나 그리스도인들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포인트는 교회가 생명 걸고 지켜야 하는 십자가의 도, 원색의 복음, 갈릴리에서 사셨지만 결코 갈릴리 백성들에게 정치적 예수를 믿으라고 선포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 그리스도가 바로 나임을 외쳤던 복음의 보폭입니다. 그런데도 세속의 공격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이 영적 기초 체력마저도 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설교자는 경악합니다. 성도가 가져야할 영적 기초 체력이 무엇입니까? 믿음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십자가의 도를 사수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가 아닌 십자가 같은 유사 예수에 붙들릴 때 우리들의 영적 기초 체력은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여러분의 심비에 밑줄 긋기를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영적 기초 체력의 근원을 소개합니다. 용감하게 신앙의 경주를 하며, 힘을 내 달려가며, 십자가의 도라는 원색의 복음에 굳게 서려면 성도들이 꼭 이루어야 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3) 깨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3절 전반절에서 바울은 선포합니다. “깨어 있으라”
‘그레고레이테’라는 이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는 ‘신중하게 경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군에서 복무한 자들은 다 아시겠지만 병사들의 임무 중에 전시가 아닌 평시에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 중에 하나가 경계입니다. 더군다나 전시 때에 경계병의 임무는 전 부대원의 생사가 걸려 있는 가장 위험한 임무 중에 하나인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경계의 가장 무서운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방심입니다. 성도의 기초 체력 중에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할 것도 방심함일 것입니다. 방심하면 깨어 있지 못합니다. 흐트러지고 무너집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방심하면 안 되는 각종 영적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분파주의, 지혜라는 우상, 각종 차별, 부자와 빈자에 대한 교회 안에서의 갈등, 사도바울의 사도권을 배격하는 교만, 성적인 타락에 대한 무지, 독신과 재혼에 대한 그릇된 신앙, 무질서한 만찬, 몰지각한 은사주의와 신비주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불신앙 등등 정말로 교회 안에서 부정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총망라되었을 정도의 문제들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바로 설 수 있는 방법은 깨어 경계하는 삶이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하였던 기사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사를 통해 민감하게 배워야 할 교훈은 다윗이 행한 성적 타락에 대한 죄와 더불어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방심함이라는 영적인 대적입니다. 사무엘하 11:1-2절을 읽어 봅니다.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다윗의 범죄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치열한 암몬과의 전시이기에 가장 경계해야 할 시간인데도 잠 잘 시간이 아닌 이른 시간에 잠을 잤다는 것. 일어난 후에 너무 한가하여 왕궁 옥상으로 올라가 유유자적하고 있었다는 점 말입니다. 사무엘하 기자의 이런 표현은 단순히 다윗의 동향을 보고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가는 지금 다윗이 흐트러져 있었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방심하고 있음을 공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학적인 이론 중에 ‘나비효과’ 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풀면 이런 뜻입니다. 초기의 수치에 따른 미묘한 차이가 크게 증폭되어 시간이 지난 후에 엉뚱한 차이와 결과를 나타낸다는 이론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가 나비의 날개 짓이라는 정말로 별 볼일 없는 미미한 것이 폭풍을 일으키는 전조가 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의 교훈은 그래서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것이라고 해도 결코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말하는 교훈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나비효과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마감하면서 결정적으로 담아야 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떻게 해야 깨어 있을 수 있을까?에 대한 제 문제의 답을 제시하겠습니다. 이 답은 제 말이 아닌 김기석 목사의 글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김 목사는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에서 깨어 있는 자가 걸어야 할 대단히 중요한 갈파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 대목을 읽어드립니다.
“우리의 생에 봄을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삶의 지침이 될 만한 경구들을 찾기 위함이 아니다. 그럴 목적이라면 명심보감을 보면 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까닭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든 것들이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중략)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는 길을 잃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거나 설사 읽는다고 하더라도 밑줄만 긋는다. 말씀을 인용할 줄은 알지만 그 말씀을 삶의 척도로 삼아 나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도록 말씀을 읽어야 한다. 말씀 한 마디라도 붙잡고 궁구하다보면 삶의 중추가 보이게 마련이다.”(p,299,303, 310에서 발췌)
두루뭉술하게 깨어 있는 상태에 대해서 넘어가지 마십시다. 기초 체력을 무너뜨리는 원흉입니다. 84번에 걸쳐 설명했던 고린도교회에 팽배했던 쓸데없는 이론, 지식, 올바르지 못한 종교적 행위에서 벗어나십시다. 그리고 바로 이 촌철살인을 붙드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도록 말씀을 읽어야 한다. 말씀 한 마디라도 붙잡고 궁구하다보면 삶의 중추가 보이게 마련이다.”
이것을 추구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살아낼 때 우리는 가장 강력한 영적 기초 체력으로 무장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탁구장에 나갈 때마다 느끼는 소회가 있습니다. 탁구장 관장에게 레슨을 받는 초보자와 그냥 운동하러 나오는 초보자의 성장 속도는 조금 과장하면 10배 정도의 차이가 납니다. 기초를 배우고 안 배우고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말씀으로 깨어 십자가의 도라는 그 믿음에 굳게 서서 용감하게 힘을 내 시대에 아픔들을 극복하며 그리스도인들도 멋있게 승리하는 세인 지체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