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8.6.24 지역 셀 사역2024-04-23 16:4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지난 상반기 동안 나에게 임했던 감동적인 은혜 나누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찬송가 302장)
● 아, 하나님의 은혜로 (찬송가 310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상반기를 마감하면서
● 본문 : 고린도후서 6:1-2
1) 은혜를 헛되이 받는 고린도교회의 대상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이며 왜? 이었을까요?
⓵ 누구? : 
⓶ 왜? :  

2) 지금을 가장 은혜 받기 좋은 때라고 믿는 자들의 공통점은?
⓵ 2절 참고 – 
⓶ 설교 중에서 –  

3) 적용하기
⓵ 나는 과거지향적인 신앙인인가? 현재적, 미래지향적 신앙인인가를 냉정히 판단하고 현재적, 미래지향적 신앙인으로
    서도록 노력하고 기도하기
⓶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은혜의 현재성을 가장 농후하게 느끼는 콘텐츠를 찾아 참여하기
⓷ 상반기를 잘 마감하고 하반기를 은혜롭게 맞이하기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소명감이 분명한 교육 전도사 청빙을 위해 중보
2) 교회학교 여름 사역을 위해
  (성경학교, 학생청년 연합 수련회)
3) 6월 마지막 주간, 영적인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4) 7월 1일 월삭예배를 통해 7월을 준비하도록
5) 환우들을 위해
6) 나의 태신자들을 위해
7) 담임목사 세미나 섬김을 위해 (25일 사역)

● 셀 사역하기
1) 지역 셀 태신자들을 점검해 보기
2) 지역 셀 환우들을 돌보고 중보하기
3) 토요일 청소 사역 함께 협력하기
4) 공 예배 사수하기 – 셀 리더와 인턴들은 솔선수범
5) 지역 셀 피선교지 돌보기   
6) 기도하기에 최선을 다하기 
7) 담임목사 설교 유튜브 영상 지인들에게 전달하기 
    (주일 낮 설교와 수요 예배 설교 영상)  

 
설교요약 (SUMMARY)
6월 24일 주일 오후예배 설교
제목: 상반기를 마감하면서
본문: 고린도후서 6:1-2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3개의 금이 있다. 황금, 소금, 지금이다.” 이 세 가지의 금(金) 중에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금 하나를 그래도 굳이 선택하라면 말할 것도 없이 지금입니다. 지금이라는 이 어마어마한 보물을 얼마나 귀중하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해피엔딩이 될 수 있는가 하면 반대로 새드 엔딩이 될 수 있기에 지금의 선용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지금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가장 위대한 금 같은 시간으로 나에게 적용해 나아가는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요?

1)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것이 지금을 가장 위대한 지금으로 만드는 첩경입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보내는 두 번째의 편지에서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고린도교회 공동체 안에는 소위 말해 바울을 대적하고 있었던 그룹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11:22-23절 전반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바울이 본인의 대적자들 앞에서 담대히 자신을 변호하는 이 구절을 깊이 들여다보면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의 면면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히브리인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자들이었습니다. 정통 이스라엘의 뿌리를 갖고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들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미 고린도에 뿌리를 내려 자수성가한 디아스포라 유대 율법적인 성향의 히브리인들이거나, 이것이 아니면 이스라엘에서 고린도로 내려온 본토 유대 율법적인 성향의 사람이든지 일 것입니다. 이 추측을 하는 이유는 이미 갈라디아 교회를 유린하던 자들 중에 이런 자들로 인해 바울이 심히 어려움을 당했던 선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바울을 공격하고 있는 자들에 의해 가장 심각한 피해를 받고 있는 선의의 피해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신실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해서 본문 1절에서 바울이 강하게 역설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선언은 이중포석이 담겨 있습니다.

    신실한 고린도교회 지체들에게는 너희들이 은혜대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일임을 격려하고 있는 것 하나와 대적자들에게는 경고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헛되이’ 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비어 있는’ 혹은 ‘텅 빈’이라는 의미입니다.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자들의 영적 상태는 언제나 비어 있습니다. 이들이 왜 은혜를 소홀히 여깁니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은혜에 대하여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의 관심은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사람에 대한 권위, 자리, 위상, 인기 등등이었습니다. 바른 교회 아카데미에서 2개월 연속 저널에 실을 칼럼을 기고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기도원에서 글을 써서 보냈습니다. 나중에 저널이 나오면 홈페이지에도 게재하겠지만 이번 글의 제목을 이렇게 정했습니다. “팔로워십(followership)이 먼저다.” 교회에 리더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넘쳐나는 반면 팔로워(섬기는 자, 따르는 자)가 되려는 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기도원에 가지고 올라간 여러 책들을 읽다가 대단히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주군이신 예수께서는 위대한 리더이셨지만 당신은 리더십 즉 이끄는 자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주님이 줄곧 말씀하신 것은 팔로워십 즉 따르는 자에 대한 선언이셨습니다. 여러 구절이 있지만 대표적인 구절 하나만 소개합니다. 마가복음 10:41-45절입니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은혜를 사모하는 자는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자들이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역설하면서 아주 중요한 팁을 하나 남깁니다. 누가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입니다. 내 힘으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결코 은혜를 사모하거나 기대하지 않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만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자만이 지금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 내 힘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심으로 내가 지금 여기 은혜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은혜는 과거형이 아니고 현재형임을 믿는 삶입니다.

    본문 2절을 봅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바울이 인용한 이 구절은 이사야 49:8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제 2 이사야는 분명히 예루살렘의 회복을 약속하면서 이 신탁을 전하였습니다. 49:8절 전반절은 현재적인 은혜가 이스라엘에게 임하고 있음을 확인한 말씀이고, 후반절은 앞으로 계속해서 구원의 완성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약속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는 과거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그렇게 하셨던 하나님의 일하심과 은혜를 부어주시는 지속적 일하심이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지금도 그 은혜는 그리고 일하심은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은혜는 일회성이지 않습니다. 은혜는 과거 지향적이지 않습니다. 은혜는 지속성이며 현재 지향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8년 1월 1일 영신 예배를 통해 나에게 주셨던 말씀과 은혜는 6월의 마지막 주일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 말은 오늘 상반기를 마감하는 주일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12월 송구영신 예배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37절을 읽습니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을 맹수들의 손에서 건지셨던 하나님은 오늘 다윗을 골리앗의 손에서 건지신 것이며, 앞으로 사울의 수없는 공격과 살해 위협에서도 건지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고백한 사무엘상 17:37절의 고백은 오늘 바울의 고백으로 이어지고, 이 목사의 고백으로도 이어지고, 또 우리 세인 지체들의 고백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성서적 밑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지금 받는 것이며 가장 생명력이 있는 현실적 사실입니다.

    지난 주일에 심소영 자매의 남동생 내외가 서울에서 내려와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서울 동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올케가 시댁에 내려왔다가 시누가 다니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 셈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올케가 소영 자매에게 이런 소회를 나누었다고 저에게 기쁘게 전언해 주었습니다. “목사님, 올케가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현장감이 있는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매우 기뻤습니다.” 아직 등록은 하지 않았지만 열심히 공동체에서 공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는 자매의 전언도 받았습니다. “말씀이 들려지는 은혜 때문에 교통은 불편해도 교회를 찾게 됩니다.” 이런 감동으로 은혜가 적용되는 지체가 있음은 저에게 이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은혜는 현재적이다.”

    사도행전 2장 말씀 중에 한 구절을 읽겠습니다. 2:37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이 말은 베드로의 사자후였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베드로의 사자후를 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고백한 고백의 일성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어찌할꼬?” 여기에 기록된 조동사는 SHALL 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SHALL 이라는 단어는 의무감 100%를 나타낼 때 쓰이는 조동사입니다. 반드시 무언가를 회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우리가 어찌할꼬?’에 담겨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볼 때 색다른 은혜를 받습니다. 애잔한 감동, 마음을 쓰다듬는 은혜, 속이 펑 뚫리는 감격만이 은혜가 아닙니다. 찔림도 은혜입니다. 이 찔림이라도 받았다면 나는 오늘 예배의 승리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찔림도 현재적이요, 지속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에게 임하는 은혜의 다양성들이 현재적으로 체휼되기를 기대합니다. 현재적으로 은혜를 받는 자들은 성서의 권고로 주저 없이 돌이키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현재적인 은혜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기도원에 가지고간 책을 읽다가 이런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드라이브를 즐기던 부부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였다, 서로 말도 하지 않고 냉정하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창 밖에서 개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남편이 아내한테 빈정대며 말했다. ‘당신 친척이잖아. 반가울 텐데 인사나 하시지?’ 그러자 남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내가 창문을 열고 지나가는 개에게 소리쳤다. ‘안녕하셨어요? 시 아주버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은 지난 상반기를 마감하는 주일입니다. 개 같은 인생을 살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지난 6개월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혹시 개만도 못한 인생을 살라고 지난 6개월 동안 우리에게 은혜를 현재적으로 주신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 은혜를 느끼며 살라고 하십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주셨던 은혜를 날마다 복기하고 또 시작되는 6개월도 민감하게 은혜를 느끼며 살 수 있도록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지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