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하나님께 제일 먼저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 경배와 찬양 (WORSHOP)● 즐겁도다 이 날 (찬송가 167장) ● 마라나타 (복음성가)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분명한 것은? ● 본문 : 고린도전서 15:35-49 1) 바울이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육체의 상태를 본문에서 비유로 말한 두 가지를 곱씹자. 1) 36절 후반절-38절 참고: 2) 39-41절 참고: |
2) 부활체라는 것은 어떤 모습인가? 본문 설교를 중심으로 말해 보자. 3) 적용하기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는 완벽한 부활체로 부활할 것을 믿는다면 오늘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했나? 설교 주제에 맞게 다시 한 번 점검하고 그 삶을 나누어 보자.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 제목 1) 교회학교 여름 행사를 위하여 2) 입원 중에 있는 지체와 환우들을 위하여 3) 소명감이 확실한 교육 전도사 청빙을 위하여 4) 담임목사의 외부 사역이 잘 준비되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5) 장애우 섬김 사역이 승리할 수 있도록
● 셀 사역하기 1) 지역 셀 태신자들을 점검해 보기 2) 지역 셀 환우들을 돌보고 중보하기 3) 토요일 청소 사역 함께 협력하기 4) 공 예배 사수하기 – 셀 리더와 인턴들은 솔선수범 5) 지역 셀 피선교지 돌보기 6) 기도하기에 최선을 다하기 7) 담임목사 설교 유튜브 영상 지인들에게 전달하기 (주일 낮 설교와 수요 예배 설교 영상) | 설교요약 (SUMMARY)2018년 6월 1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79번째 강해) 제목: 분명한 것은? 본문: 고린도전서 15:35-49
다음 강해에서 살피겠지만 미리 고린도전서 15:51-52절을 차용하여 읽어보십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바울은 본 서신에서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날에 우리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할 것을 믿지만 어떻게 부활하느냐? 입니다. 오늘 설교의 문제 제기는 바로 이곳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들에게 제기된 특별 계시인 성경의 내증 안에서 찾아 말씀드린다면 이렇게 말씀드리면 정직한 답이 될 것입니다.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활을 할 때 우리들이 부활하는 형상은 참 괜찮은 형상이 될 것이라는 답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 답에 대한 근거를 찾아보겠습니다. 본문 35절을 읽겠습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여기에 ‘누가’라고 표현된 의문대명사는 지난 주일 설교에서 언급했던 사두개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 안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과 헬라적인 문화를 뿌리 깊게 신봉하는 헬라 철학적인 신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하여 믿지 않는 자들 말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곧바로 이들의 질문에 응대합니다. 페이소스가 엿 보이는 바울의 말은 ‘바보들아’로 시작합니다. 36절 시작을 봅니다. “어리석은 자여!” 여기에 기록된 단어 ‘어리석은 자여!’라는 이 호격의 단어를 조금 더 쉽게 표현하면 ‘바보들아!’가 더 맞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바보처럼 질문하는 자들을 향하여 대단히 적절한 예를 듭니다. 36절 후반절부터 38절을 봅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제일 먼저 바울이 꺼낸 설명의 카드는 씨앗의 예였습니다. 우리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씨앗은 분명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씨앗이 심겨지면 씨앗의 형태는 반드시 죽게 되지만 그 죽은 씨앗으로 인해 새로운 형태의 열매들이 탄생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육체라는 형체로 이 땅에서 살았습니다. 마치 자라나면 어떤 형체가 될지를 전혀 모르는 씨앗의 형태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재 강조하지만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 육체의 모습은 씨앗의 형체였습니다. 우리들이 죽고 나면 하나님은 그 씨앗을 형체를 근거로 새로운 형체를 만드신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씨앗의 형체를 가지고는 그것이 어떤 또 다른 열매를 만들지에 대하여는 그 당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육체가 다 소진할 때까지는 우리들의 육체가 썩는 것으로 끝난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부활할 때의 형체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부활체로 다시 바뀌어 살게 될 것임을 본문38절까지의 내용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자연 피조물을 예로 들은 다양한 형체의 설명이었습니다. 39-41절을 봅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하나님이 땅에 만들어 놓으신 일체의 피조물을 보면 같은 육체가 없습니다. 짐승의 육체, 새의 육체, 물고기의 육체, 자연 피조물들도 다 각기 다른 형체들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기의 영역에서 고유의 역할을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달이 해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고, 물고기가 육지의 짐승 역할을 감당할 수 없고, 하늘의 새가 물에서 살 수 없습니다. 모두가 이 땅에서 고유의 역할을 감당하게 만들어졌다가 생을 마감합니다. 인간도 매일반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육체는 이 땅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존재이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형체가 될 수 있도록 그날에 하나님이 변화시켜서 우리들을 부활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본문 42-49절 마지막 절까지 바울은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지금까지의 본문 이해를 통해 던져야 할 질문과 답을 가장 성서적 근거가 든든한 상태에서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 것입니까? 그 답을 오늘 설교 제목에 부합하여 이 정도로 답해 보겠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는지 답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이것만큼은 제시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갈 수 있는 완벽한 부활체일 것입니다. 다음 강해의 첫 구절인 50절을 미리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이 땅에서의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부활시키실 때에 이 땅에서 찌들고 찌든 혈과 육의 모습이 아닌 썩지 아니하는 부활체의 모습으로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 부활체의 모습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는 그날이 될 때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해서 빈약하게도 이 부활체에 대한 설명을 이론적으로 교우들에게 설명드릴 수 없어서 저 역시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본 것처럼 지금은 희미하여 알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들을 그날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같이 분명하게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오늘 설교의 교훈에 따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한 가지의 실천적 삶을 살아내는 다짐을 하면서 오늘 설교의 교훈을 극대화하기를 원합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연습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인침 받아 완벽한 부활체로 부활될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연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삶의 내용들을 열거하라고 한다면 상당히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지만, 주일 설교를 통해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며 섭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교우들과 저는 오늘 항상 제가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한 가지의 내용만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 이 땅의 가치에 동의하고 타협하는 무감각과 치열하게 싸우십시다. 지난 주간, 우연히 기독교 포털 사이트에서 한 목회자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목회자는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강단에서 죄를 보편화시키지 마십시오. 강단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일반화시키지 마십시오. 그렇게 보편화하고, 일반화시키니 목사가 제일 먼저 그 죄의 선봉에 서는 것입니다.” 죄의 보편화와 일반화는 곧바로 무감각이라는 굴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 중에 자살골은 무감각이라는 굴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21세기에 목회와 신앙의 싸움은 무감각의 굴로 들어가지 않도록 막는 것이며, 그 강제함에 순종하여 굴로 들어가지 않아야 하겠다는 자각을 날마다 깨닫는 것입니다. 민수기 14:22-23절을 봅니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이 구절에서 못내 가슴 아픔으로 다가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출애굽의 여정 중에 하나님이 행하신 10번의 일하심을 민수기 14장에 기록된 가나안 정탐 이후 불만과 불평으로 보고하는 자들도 보았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넜던 기적과 뒤따라오던 애굽의 군사들이 수장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추위에 떨어야 했던 광야의 밤에 그들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광야의 위험스러운 일체의 동물들을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준 불기둥을 그들은 경험했습니다. 더불어 광야의 내리쬐는 살인적인 햇빛을 구름기둥으로 막아주신 것도 목도했습니다. 쓴 물을 단물도, 반석에서 솟아나는 물고 공급하신 것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신 것도 매일 경험하고 있는 그들이었습니다.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매일 경험하고 있는 그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가나안은 들어갈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거기에 거하는 거민들은 장대한 거인들입니다. 우리는 망했다고 자멸하는 굴속으로 들어간 자들이 바로 그 수없이 많은 기적을 맛본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몰락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둔감함, 이 땅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무감각 때문이었습니다. 은혜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치열함 속에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만지심입니다. 이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자들은 무감각해집니다. 더불어 그 은혜의 방편 반대편에 있는 것이 더 매력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 결과는 타협과 무감각의 굴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작년에 재일 한국인으로서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세인카쿠인 대학 총장을 역임한 강상중 교수가 쓴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에서 그가 갈파했던 촌철살인이 동의되어 설교 노트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기독교에서 악이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악은 무언가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악은 그저 공허함을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악은 형식 그 자체를 즐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p,85) 강 교수가 무엇을 근거로 기독교에서 증언하는 악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부분에 대하여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악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실재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추적하는 집요한 실제입니다. 그래서 강 교수가 말한 전반부의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후반부의 내용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악은 그 형식 자체를 즐긴다.”입니다. 악은 악을 즐기도록 우리들을 옥죕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죄나 악이나 세속적 가치에 깊이 빠져들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이 땅의 가치에 동의하고 암묵적으로 타협하는 동안에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가치에 대하여 눈감게 하며 민감하지 못하게 합니다. 마치 출애굽을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수없이 많은 기적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둔감했던 열 명의 정탐꾼처럼 말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완전한 부활체로 부활할 것을 믿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여! 이 땅의 가치에 동의하고 타협하는 무감각과 치열하게 싸우십시다. 그래서 그 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옷 입으십시다. 해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세인 지체들 모두가 신부로 입장하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고린도전서 13:12절을 읽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분명한 것은 그 날이 되면 부활체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날이 되면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분투하십시다. 치열하게 사십시다. 무감각해지지 마십시다. 그 날이 우리에게 오늘은 한 걸음 더 성큼 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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