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9시가 되면 눈이 게슴츠레 해집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침대로 들어오라는 신호입니다. 허면 만사를 제쳐 놓고 휴대폰을 수면 모드로 바꾸어 놓고 취침에 들어갑니다. 새벽 5시에 기상해서 샤워를 하고 옷매무새를 갖추고 새벽예배 인도를 위해 교회로 나갑니다. 예배 인도를 마치면 집에 돌아와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그 어간 잠간 이슈 뉴스를 시청합니다. 이윽고 서재로 나오면 오전 7시 30분 즈음, 곧바로 하루를 여는 화살기도를 드리고 내일 아침 큐티 집을 붙들고 씨름합니다. 큐티와 맥체인 성경 읽기 일과를 마치고 나면 약 8시 30분. 곧이어 아침 커피를 내리고, LP로 듣고 싶은 음악을 틀고 조간신문을 읽습니다. 평일에는 경향신문 기사인 ‘내 인생의 책’을 읽고 스크랩합니다. 금요일에는 경향신문, 토요일에는 국민일보에 실리는 주간에 출간 된 양서를 꼼꼼히 살피는 편입니다. 약 1시간 정도 소요되는 이 작업이 끝나면 독서일과에 들어갑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약 2시간 정도, 가능하면 속독으로 약 100페이지 정도의 독서를 합니다. 이어 읽은 독서의 내용 중에 설교에 사용할 내용과 구절들을 컴퓨터 파일에 저장하고 정리하면 오전 사역이 마무리됩니다. 오전 사역을 마치고 나면 하루 유일하게 섭취하는 탄수화물 식사를 하고, 교회의 업무와 사역들을 행합니다. 특히 지난 주간은 사무총회 회의록 초안 작업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연말 사역에 집중하였습니다. 문제는 제게 할당된 글쓰기입니다. 외부에 송고해야 하는 글들이 있어서 마감 날자가 오면 조금씩 과부하가 시작됩니다. 설상가상으로 독서한 책들에 대한 북-리뷰는 제게는 중요한 일이기에 사역이 겹쳐지는 날에는 과부하 생겨 임계점에 도달할 때를 종종 경험합니다.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은 설교를 준비하는 날입니다. 지금까지 평생 원고 설교와 강해 설교를 고집해 왔기에 이 방법 외의 다른 것을 시도하면 대단히 낯설고 불편함을 느낍니다. 원고를 작성해서 교회 홈페이지 설교 영상 콘텐츠에 공개하는 무모한 일을 시도하는 것은 그래야 내가 게을러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비평적으로 성찰해 주는 충고를 잘 들으려고 합니다. 우물 안에 개구리로 남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나’라는 사람의 한계를 알기에 수많은 선생님들의 도움이 절실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래야 공부하는 당위가 생기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들이 어느 날 제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을 거라고. 제가 딱해 보인 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강덕아, 왜 그렇게 사니?” 그러다가 금세 이렇게 자답합니다. 생겨먹은 게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지난 30여 년을 달려왔습니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이제 10여 년도 채 남지 않은 사역의 내용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이 식(式)에 익숙해져 있는 내가 다르게 바꿔도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이렇게 살려합니다. 다만 한 해가 갈수록 다르게 느껴지는 아픔이 있습니다. 과부하가 되면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비극입니다. 체력도 딸립니다. 해서 과부하가 생기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하는 게 중요함을 재삼 느끼곤 합니다. 남은 사역의 여정 과정 속에서 별 대과(大過)없이 건강하게 사역하고 마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사치스러운 생각은 아닐 거라고 믿기에 또바기 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걸어가려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