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신앙은 진정성입니다.2024-03-08 17:04
작성자 Level 10

2020년 8월 26일 수요 예배 설교 (욥기 90번째 강해)

 

본문 욥기 42:1-6

제목 신앙은 진정성입니다.

 

서론)

 

2018년 4월 11일 수요일 예배를 통해 시작했던 욥기 강해의 마지막 장에 도착했습니다.

첫 번째 강해 시간에 저는 욥기를 연구하면서 가져야 하는 4가지 태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① 욥을 읽으면서 오늘의 욥이 누구인지 질문하면서 읽으라는 권면이었습니다.

② 고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기대하고 바로 그 공부에 감동이 임하기를 기대한다고도 했습니다.

③ 더불어 기존의 욥기 해석의 상투성에 대항하자고 했습니다.

④ 성경이 말하는 올바른 믿음의 정의를 추적해 보자고도 했습니다.

결국 욥기를 연구하면서 가져야 하는 목적으로 기존에 우리가 학습되어 인간 해석에 대해서 섣불리 해석하지 말고 조금 더 신선하며 도전적인 욥과의 만남을 가져보자고 교우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대한성서공회 총무를 역임한 민영진 박사가 김기석 목사가 쓴 의 추천서에서 욥기를 읽을 때 항상 염두 해 두어야 하는 태도를 4가지로 설정한 것에 따른 담임목사의 강해 방법을 교우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김기석, “”, 꽃자리, pp,20-21)

Ⓐ 욥기를 읽어나갈 때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태를 바라보지 말라는 교훈이었습니다.

Ⓑ 욥의 말보다 그의 친구들인 엘리바스빌닷소발의 변론이 더 은혜롭게 들리는 경우가 있는데 거부하지 말고 수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 욥기의 주제를 무고한 자의 고난그리고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이라는 공식으로 묶지 말라는 메시지였습니다.

Ⓓ 욥과 우리의 삶을 유리시키지 말라는 권면이었습니다.

2년이라는 세월을 통해 교우들과 함께 씨름해온 욥기 강해의 맨 마지막 장인 42장에 도착한 오늘, 1-41장도 그랬지만 특히 42장은 앞에서 열거했던 욥기 독서 방법의 그 절정을 적용해 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먼저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교우들이 담임목사의 설교를 듣고 당혹해 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약 3주 동안 선포할 42장 강해는 기존의 해석과는 전혀 다른 측면을 공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해석이 민영진 박사가 역설했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했던 담임목사의 노력이었음을 교우들이 양지해 주시기를 기대하며 42장 강해를 시작하겠습니다.

 

본론)

 

하나님께서는 38장에 기록된 대로 폭풍우 가운데 욥에게 현현하셨습니다.

욥기 4-39장까지 치열하게 대립하고논쟁하는 욥그의 세 친구 더불어 엘리후라는 젊은 변사의 수많은 말잔치에 끝까지 침묵하셨던 하나님께서 더 이상은 묵과해서는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욥에게 현현하셔서 38-41장에 걸쳐 욥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절대적 주권을 가지시고 적극적으로 당신을 표현하셨습니다.

그 동안 욥이 하나님께 대들었던 일체의 항의를 거론하시면서 욥에게 언어로 공격적으로 대응하셨습니다.

이미 38-41장까지의 강해를 통해 살폈지만 하나님의 공격적 방어하심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너를 지었다너는 나의 작품이다피조 된 너는 너를 창조한 나의 주권을 이해할 수 없으며해석할 수 없다.”

인정하든지 인정하지 않든지 하나님은 욥을 꼼짝 못하게 하셨습니다.

39장에서 한 번 맹폭하신 하나님의 반격을 받은 욥은 40:3-5절에서 별로 달갑지 않은 태도로 하나님께 도전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대단히 불편한 심기를 보인 욥에게 하나님은 고삐로 놓지 않으시고 베헤못과 리워야단의 예를 다시 끄집어 내셔서 참 보잘 것이 없는 인간 즉 욥의 연약성과 나약성을 다시금 상기하게 하셨음을 우리는 지난 40:6-41:34절에서 거침없이 살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주사위는 이제 욥에게 넘어간 셈입니다.

주사위를 받아든 욥은 오늘 본문 2-6절에서 그가 욥기에서 남긴 최후의 변론을 이렇게 남깁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 구절을 통해 살펴야 할 의미를 이렇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욥은 전통적으로 학습되어 있는 하나님의 전능성에 항복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2)

어떻습니까?

욥의 이 고백은 생소하지 않은 고백입니다.

욥만의 고백이 아니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당연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욥만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도 똑같이 고백하는 신앙고백의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천착하다보면 욥의 고백이 대단히 위대한 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이 욥의 토로는 처음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9:3-10절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십시다.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일을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2절의 선포는 하나님의 설득으로동시에 하나님이 행하신 압박 때문에 욥이 항복한 신앙고백이 아니라 그가 이전부터 유대 종교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자로서 너무나도 당연히 학습되어 있는 종교적 고백의 반복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해석이 왜 중요합니까?

38-41장에 걸친 하나님의 강력한 당신의 드러내심 혹은 현현하심으로 강변하시는 하나님 되심에 대하여 욥이 굴복하여 고백한 신앙고백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신앙적 감동이나 설득이나 교훈으로 인해 욥이 진정성을 갖고 신앙고백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알고 있는 기존의 종교적 습관으로 하나님께 이렇게 토로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확하다는 해석을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2) 욥의 토로는 진정성이 있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정서적 체념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본문 3절을 다시 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어떤 의미로 보면 이 토로는 하나님께 대한 대단한 도전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철저한 돌이킴이나 회개하기 위한 엎드림그리고 낮아짐으로 해석하는 것이 본문 절의 통상적인 해석인데저는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말이 통하지 않는 대상에게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고침묵하고 동의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과도 같이 시위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해석이 더 정직해 보입니다.

3절 전반절의 대상은 분명히 욥 자신입니다.

무지한 존재이기에 나는 그렇게 무모한 일을 시도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후반절에 표현하고 있는 말 그대로하나님은 내가 깨닫지 못하는 일을 행하셨고헤아리기도 어려운 이상한 일을 행한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 한 구절도 욥이 하나님의 설득에 감동을 받아 그런 고백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담임목사의 이런 욥기 42장의 접근을 기독 느헤미야 연구원의 권지성 교수 역시 지지해 주는 듯한 주석을 남깁니다.

욥기 9:10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큰일을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이 구절을 권 교수가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욥은 9:10절에서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왜 이유 없이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어 자신을 멸망하게 하셨는지 도무지 자신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 호소에 가깝다.”(권지성, “특강 욥기”, IVP, p,334.)

욥기 9:10절의 연장선상에 있는 고백이 바로 오늘 본문 3절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그래서 무대뽀식의 엮어 넣기가 아니라 욥기 42장을 새롭게 해석하는 대단히 중요한 접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욥기 42장 마지막 강해 욥이 2배에 해당하는 회복과 복을 얻었다는 해석으로 점철되어 있는 7-17절까지의 해석을 전혀 다른 해석으로 나아가기 위한 초석을 지금 1-6절의 설교를 통해 교우들에게 미리 만들고 있습니다.

3) 욥은 하나님에게 적극적으로 반응하겠다고 시위합니다.

 

본문 4-5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40:3-5절에서 욥이 입을 닫겠다는 불만 섞인 태도를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말하지 않겠습니다.”

묵비권 행사를 통한 하나님의 방식에 대드는 태도였음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내가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내가 주께 묻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면 일사항전을 각오하는 듯한 발언입니다.

더불어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이전에는 내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만 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했지만이제부터는 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눈 크게 뜨고 주님을 바라보겠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42:1-6절의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 가운데 담임목사의 해석이 너무 앞서 나간 해석이 아닌가 싶을 분도 있을 줄 압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런 해석은 아마도 처음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말입니다.

하지만 재 강조하지만 다음에 살필 7-17절의 말씀 해석을 전할 때 지금 담임목사가 왜 이렇게 진보적으로 본문 1-6절을 해석하는지를 함께 아우르며 말씀드릴 때 불편한 마음이 해결될 것입니다.

 

4) 욥은 하나님의 설득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상황에 대하여 시위하고 자위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본문 6절을 해석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문장만 보면 욥의 판정패처럼 보이는 문장입니다.

결정타는 회개하다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문장에 있는 두 단어에서 전혀 다른 해석을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거두어들인다는 히브리어 에므아쓰이고 또 다른 하나는 회개하다로 번역된 니함입니다.

에므아쓰’ 즉 거두어들인다.’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단어인가에 해석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거두어들이겠다는 것이며누가 거두어들인다는 말입니까의 제 문제를 해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나아가 보십시다.

6절 전반절에 무엇을 거두어들인다는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기에 해석이 난해합니다.

다시 말해서 욥이 하나님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인지욥이 그 동안 자신이 했던 말을 거두어들인다는 것인지 불투명합니다.

다만 철회한다는 의미는 분명해 보입니다.

어느 것을 철회하든지 한 가지는 명확합니다.

하나님의 설득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거두어들인다면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 시위일 것이고자신의 말을 거두어들인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수용이나 수긍이 아니라 체념이라는 소극적 시위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한다.’ 는 의미의 히브리어 니함의 해석도 매일반입니다.

통상적으로 회개하다의 의미이지만 상당수 많은 경우, ‘후회하다.’ 혹은 위로를 얻다.’ 또는 만족을 얻는다.’는 뜻으로도 해석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정황들을 전제한다면 욥의 니함은 회개하다의 니함보다는 자위하다.’ 혹은 스스로 만족하려고 하다의 의미가 더 가깝다고 저는 해석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욥이 오늘 본문에서 토로한 내용들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적긍정적 해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더 도발적이고공격적인 자기 말을 하는 성향의 메시지라고 해석하는 것이 저에게는 타당해 보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본문에 근거한 상황을 조금 깊게 살피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얻어낸 신학적 성찰은 욥의 변화가 아닌 욥의 사고에 대한 정당화에 더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저는 설교의 제목을 추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내가 갈망한다는 기독교적인 신앙의 내용은 무엇인가?

 

※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진정성을 깨닫는 것이다.

 

내 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자기를 지켜내기 위한 건강한 고집입니다.

이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여 크리스천의 길을 간다는 것은 나를 지켜내는 건강한 자아의식이 하나님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한 나약성임을 곧 인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굴복이 없이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요자기도취이자심지어는 신앙이 아닌 자기만족이라는 거짓 신앙에 함몰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주 가끔 이런 시쳇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우리 남편은 예수를 믿지는 않지만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에요.”

목사님우리 아이들은 교회는 안 나가지만 예수 믿는 사람보다 더 정직하게 살아요.”

교만의 극치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신앙은 내가 어떻게 사느냐를 따져보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어떤 삶을 요구하는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홈페이지에 서평 하나를 올렸습니다.

강영안 교수의 읽는다는 것이라는 수작입니다.

서평에 쓴 글을 하나 인용하겠습니다.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바른 생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바른 생각이다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를 말해주지 않고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지 말해주며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어떻게 찾을지를 말해 주지 않고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길을 어떻게 찾아 발견했는지를 말해준다.”(강영안, “읽는다는 것”, IVP, p,240)

엄청난 가르침이자 성찰입니다.

언제나 강조했듯이 그리스도인이 바라보아야 하는 초상은 불완전한 내 생각내 사고내 방법이 아니라 그런 나를 바라보시고 언제나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아주 가끔신앙의 연수를 수십 년임을 자랑하는 자들이 내 안목과 내 시선에서 단 1CM도 벗어나지 못한 채 자기만의 성에 갇혀 전혀 진보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목사로서 절망을 느낍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나를 따르라에서 외쳤던 사자후는 값싼 은혜에 대한 맹폭격이었습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철천지원수다값싼 은혜란 싸구려 상품이요떨이로 팔아버린 사죄요떨이로 팔아버린 위로요떨이로 팔아버린 성례전이다값싼 은혜란 교회의 창고에 무진장 쌓여 있어 언제나 손쉽게 무제한으로 제공될 수 있는 것과 같다한마디로 값싼 은혜는 대가나 노력 없이 얻는 은혜다.” (본회퍼, “나를 따르라”, 이신건역대한기독교서회, p,33)

오늘 설교에 적용하면서 말씀을 맺으려고 하는데 이렇게 성찰해 보십시다.

나에게 주어지는 은혜란 나라는 존재에게 만족을 주려는 일체의 값싼 신앙의 천박성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값비싼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적용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욥과의 마지막 관계 맺음을 통해 욥에게 원하셨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진정성이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아프게도 그 소망을 욥은 거절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진정성이 신앙이라고 믿는 목사입니다.

물러설 수 없는 이 목사의 목회 철학입니다.

이 진정성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자는 값싼 은혜를 은혜라고 착각하며 사는 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깨닫는 자에게 복이 있음을 믿습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