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벌벌 떠는 자2024-03-08 17:02
작성자 Level 10

2020년 5월 20일 수요 예배 설교 (욥기 80번째 강해)

 

본문욥기 37:1-13

제목벌벌 떠는 자

 

서론)

 

전율(戰慄)한다.’는 단어가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전쟁을 앞두고 두려워 떠는 상태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저의 큰 형님이 군에서 복무할 때 1976, 8,18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났는데 철원에서 근무하던 큰형님으로부터 내무반에서 유서를 쓰고 작전에 투입되려는 바로 직전까지 갔다고 비장하게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형님은 유서를 쓰는 그 때의 심정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로 전율했다고 술회하였습니다.

이럴 때 쓰는 단어가 전율하다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실례가 있습니다.

받은바 감동이 너무 커서 그 감동이 압도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경우입니다.

제가 유난히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2:60-62절입니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 구절에는 주목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몇 가지만 추적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주님을 부인하자마자 닭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베드로를 강타한 충격은 청각적인 전율함이었습니다.

즉 닭 울음 소리였습니다.

이어 두 번째 베드로를 타격한 충격은 시각적 전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얼굴을 돌이켜 베드로를 보신 것입니다.
주께서 베드로를 돌이켜 보셨다고 번역한 보다라는 단어 엠블레포는 주목해서 보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연히 본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보았다는 말이 됩니다.

베드로가 느꼈을 충격은 아마도 메가톤 급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표현한 것이 오늘의 설교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해석을 하고 싶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또 하나 베드로에게 임한 충격은 이성적 전율이었습니다.

생각나서

그렇습니다.

청각적시각적이성적 충격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베드로의 울음을 단지 울었다고 해석하지 않고 전율했다고 해석하곤 합니다.

이렇게 받은바 감동이나 은혜 혹은 충격이 커서 느끼는 것이 바로 전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자나 후자나 전율한다는 것의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딘 상태가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전율하는 반응은 그러므로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론)

 

엘리후는 36장에 이어 37장에서도 욥을 계속해서 몰아세웁니다.

특히 욥에게 죗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이켜 예배하는 자가 되라고 적극적으로 몰아붙인 엘리후는 다시 한 번 고삐를 늦추지 않고 욥을 압박합니다.

본문 1-2절을 읽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무슨 말입니까?

 

※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음성을 듣고 전율(떨라)하라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면서 욥을 옥죕니다.

엘리후는 본인의 마음이 떨렸다고 말합니다.

더불어 그 자리에서 자신은 흔들렸다고 술회합니다.

저는 엘리후의 이 고백에 대한 원론적인 권면에 동의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임재하시는 데 어찌 전율함이 없으며진동함이 없겠습니까?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시내 산에 도착한 시스라엘 신앙공동체에게 내려주실 계명을 모세에게 하사하기 전공동체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임재를 기자가 이렇게 묘사했는데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출애굽기 19:16-19절입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서 있는데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이 장면에서 하나님이 인간계에 임재하실 때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느꼈던 경외의 분위기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이 어마어마한 임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다른 것으로 표현할 수 없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으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다 떨더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임재하실 때 전율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인간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분 자체가 거룩함이시기에 죄로 덕지덕지하게 범벅이가 되어 있는 인간은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인간계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떨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의 음성에서 주군의 음성을 알아듣기 위한 방법으로 세 가지의 영역에 주목합니다.

환경성령의 감화성경 말씀입니다.(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음성”,IVP,p,253.)

이 세 가지의 영역을 전제한 달라스 윌라드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유기적인 구조로 서로 상호작용을 할 때 그 분의 음성을 듣게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환경이 성령의 내적 감화와 하나님의 말씀과 합치될 때

적절한 갈파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세 가지의 영역이 합치될 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엘리후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이 세 영역 중에서 환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내용을 강조합니다.

3-13절에서 이렇게 역설합니다.

그 소리를 천하에 펼치시며 번갯불을 땅 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그 후에 음성을 발하시며 그의 위엄 찬 소리로 천둥을 치시며 그 음성이 들릴 때에 번개를 멈추게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놀라운 음성을 내시며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큰일을 행하시느니라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 하시며 적은 비와 큰 비도 내리게 명하시느니라 그가 모든 사람의 손에 표를 주시어 모든 사람이 그가 지으신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짐승들은 땅 속에 들어가 그 처소에 머무느니라 폭풍우는 그 밀실에서 나오고 추위는 북풍을 타고 오느니라 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물의 너비를 줄어들게 하느니라 또한 그는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하시느니라 그는 감싸고도시며 그들의 할 일을 조종하시느니라 그는 땅과 육지 표면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령하시느니라 혹은 징계를 위하여 혹은 땅을 위하여 혹은 긍휼을 위하여 그가 이런 일을 생기게 하시느니라

너무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인 것 같아 현대적 개념으로 설명하게에는 구체성에서 동 떨어지는 느낌이 들겠지만 달라스 윌라드의 지적처럼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이 자연환경과 합치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엘리후는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코로나 19가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지 반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이러스라는 보이지 않는 괴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있습니다.

소유의 종말로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미래학자인 제러미 리프킨과 재미 저널리스트인 안희경씨가 대담을 했는데 경향신문이 그 내용을 실었습니다. (경향신문 5월 14일자)

코로나19 위기의 주요 원인을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리프킨은 대담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 부분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아니에요기후변화로 생긴 모든 결과가 이 팬데믹을 만든 겁니다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첫째는 물 순환 교란으로 인한 생태계 붕괴입니다우리는 물로 가득 찬 행성에 살고 있어요지구온난화로 지구의 물 순환이 바뀌고 있습니다지구가 1도씩 뜨거워질 때마다 대기는 7%씩 더 많은 강수량을 빨아들입니다열은 구름이 지표에서 강수를 더 빨리 취하도록 몰아칩니다그래서 통제가 어려운 물난리를 겪는 겁니다그 거칠고 극단적인 현상 속에 가뭄과 산불도 일어납니다미국은 작년에 캘리포니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이 산불에 휩싸였어요호주는 그 두 배였고요두 번째는 인간이 지구에 남은 마지막 야생의 터를 침범하고 있어서예요. 1900년만 해도 인간이 사는 땅은 14% 정도였어요지금은 거의 77%입니다인간은 야생을 개발해 단일 경작지로 사용하고숲을 밀어버리고 소를 키워 소고기를 생산합니다이것도 기후변화를 유발합니다셋째야생 생명들의 이주가 시작됐습니다인간들이 재난을 피해 이주하듯 동물뿐 아니라 식물바이러스까지 기후재난을 피해 탈출하고 있어요서식지가 파괴됐기 때문에 인간 곁으로 왔고바이러스는 동물의 몸에 올라타서 이동했죠최근 몇 년 동안 에볼라사스메르스지카와 같은 팬데믹이 발생한 이유입니다.”

저는 리프킨의 이 설명을 신문에서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방법을 자연 환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있다고 말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엘리후가 피력하고 있는 자연환경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갈파처럼 말입니다.

엘리후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앞에서 욥에게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떨면서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본문 1-2절을 상기하십시다.

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세인 체들과 나누고 싶은 레마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내용을 듣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적인 민감함(벌벌 떰)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7:3-5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이 구절 중 3절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메시지에서 번역했습니다.

예수를 배반한 유다는 그 분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진 것을 알았다양심의 가책에서 이길 수 없었던 그는 은화 서른 개를 대제사장들에게 돌려주며 말했다내가 죄를 지었소내가 죄 없는 사람을 배반했소.”(유진 피터슨, “메시지 신약”,p,112.)

우리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대명사로 낙인찍은 가롯 유다를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듭니까?

그래 맞다그는 저주의 대명사차라리 태어나지나 말 것을.”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소회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가롯 유다보다 훨씬 더 신앙적 레벨이 높은 자들입니까?

솔직히 고백해 보십시다.

그를 보면서 도리어 너무 창피하지 않습니까?

그는 스스로 뉘우치는 자였습니다.

가롯 유다는 스스로 자살로 자신의 종말을 선택했기에 그의 뉘우침은 율법적인 뉘우침이지 복음적인 뉘우침이 아니라고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뜯어 맞추기식의 궤변입니다.

어디 성경에 가롯 유다의 뉘우침이 율법적인 뉘우침이라고 적시해 놓았습니까?

그가 자살을 선택했기에 그렇다는 해석은 너무 헛나가도 헛나간 것입니다.

도리어 이렇게 저는 해석합니다.

가롯 유다만큼 책임지는 뉘우침을 한 자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자살을 미화하는 목사라고 시비를 걸지 마십시오.

가롯 유다가 그러면 구원 받았단 말이냐고 유치하게 대들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 가롯 유다가 구원을 받았냐 아니냐를 여러분에게 말하며 설전을 유발하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내 신앙의 여정 중에 나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그 분이 나를 위해 일하시고 말씀해 주시는 사역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고 옥한흠 목사께서 유고로 남긴 어록 문득당신이 그리워질 때“ 중에 나오는 두 문장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울지는 못할지언정가슴을 치진 못할지언정 말씀을 갖고 장난을 쳐서야 되겠습니까말씀을 묵상하며 엉엉 우는 평신도만큼은 따라가지는 못하더라도 말씀 앞에서 벌벌 떠는 모습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p,205.)

신자의 비극은 대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적은 데 이유가 있지 않습니다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지키지 못하는 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p,94.)

전자의 글을 읽다가 벼락같은 천둥의 소리로 들었습니다.

후자의 글을 읽다가 번개가 치는 섬광으로 전율했습니다.

세인교회에 지금 무엇이 필요합니까?

목사와 성도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에 벌벌 떠는 민감함이 필요합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사탄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노리는 목표는 질병 퇴치 노력에 같이 동참하라는 협조 사항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코로나 사태를 통하여 사탄의 이런 궤계에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에 민감하여 그 분의 일하심 앞에서 벌벌 떠는 영적 경외함입니다.

둔감하지 마십시오.

눈감고 있지 마십시오.

아둔하지 마십시오.

벌벌 떠십시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본문 1-2절을 다시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떨며 그 자리에서 흔들렸도다 하나님의 음성 곧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똑똑히 들으라

오늘 욥기 80번째에 주시는 설교의 레마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 민감함에 있어서 절대로 느슨해지지 않기를 바라며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환경그리고 성령의 감동 감화하심에 둔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