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19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스물다섯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4:14-16 제목: 에덴의 동쪽에서 다시 에덴으로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이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내린 심판과 그 심판에 따른 가인의 하소연 그리고 하나님의 반응을 연쇄적으로 얼려주는 기사입니다. 저는 지난 24번째 강해에서 가인이 받아야 하는 징벌 중에 가장 치명적 심판은 바로 이 부분이라고 적시한 적이 있습니다. ‘주의 낯을 보지 못하는 것’ 가인이 이 징벌로 인해 거주하게 된 땅을 본문 16절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에덴의 동쪽’하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임스 딘이 출연한 영화 ‘에덴의 동쪽’입니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영화한 이 작품은 인간 군상의 원죄적인 내용들이 펼쳐지지 않습니까? 아버지였던 애덤의 잘못된 선택, 그를 이용하려고 했던 그의 정부인 캐시, 그리고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들의 갈등 등등 원죄적인 인간들의 자화상을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결국 이들이 살았던 영역은 에덴의 동쪽이었던 셈입니다. 에덴의 동쪽이 어떤 곳이었습니까? 본문 16절은 분명히 증언합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그렇습니다. 여호와 앞을 떠난 장소였습니다. 유리하는 장소였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상존하는 곳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가인의 죄로 인한 징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로 바라볼 때 지금 에덴의 동쪽에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에덴의 동쪽은 이런 곳입니다. 1) 하나님의 낯(파네)을 보지 못하는 곳입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 역시 이 십자가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누가복음에 기록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이를 증언합니다. 누가복음 22:42절 전반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주님의 이 기도는 전반의 기도였습니다. 반전이 있지 않습니까? 후반부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어떻게 주님은 이런 반전을 이루어 내실 수 있었습니까? 요한복음 저자는 그 반전의 이유를 기가 막힌 주님의 말로 풀어냅니다. 요한복음 8:29절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외롭지만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아버지의 낯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교훈을 얻게 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심판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단절이라는 교훈 말입니다. 많은 불신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에게서 멀리 떨어지려는 행동입니다. 아니면 아예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 분과는 아랑곳하지 않는 막 사는 삶을 살려는 악한 의도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태생적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비극과 저주는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입니다. 사무엘상 3:1절을 읽어 보십시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 시대의 비극은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시편 51편에서 밧세바를 간음한 다윗이 절규하며 회개한 내용 중에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구절이 녹아 있습니다. 시편 51:8-11절입니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이 정말로 괴로워했던 것은 기쁜 소리가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뼈들이 떨리는 괴로움이었습니다. 정직한 영이 사라진 괴로움이었습니다. 성령이 떠난 아픔이었습니다. 어떤 경우가 이런 경우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때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는 이런 일을 경험하는 자가 없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지체들 중에는 에덴의 동쪽에 거한 자들이 없기를 기대합니다. 2) 유리하며 방황하는 장소가 에덴의 동쪽이었습니다. 아마도 가인이 겪어야 하는 또 다른 고통은 참 평안을 얻을 수 없는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놋 땅은 유리하는 자들이 방황하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유리하는 자들의 땅이라는 이 메시지를 단지 문자적으로 국한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대목은 영적인 시사점이 더 크다고 생각되는 가르침입니다. 유리방황하는 자들의 특징은 만족함을 모르거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는 그 유명한 메시지에서 큰아들과 작은 아들이 보여주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거하던 집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떠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 큰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서도 즉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것이 만족인지를 몰랐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이 두 아들에 대한 해석을 그의 걸작인 ‘탕자의 귀향’에서 너무 잘 묘사합니다.큰아들은 바르고 착하게 사는 이들 가운데에 나타나는 분노의 대명사라고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해 성도라는 이름을 갖고 사는 자들이 흔히 범하는 정죄와 판단과 편견의 죄를 보여준다고 갈파했습니다. 반면 작은아들은 악하게 사는 자의 전형이라고 묘사합니다. 가출은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 하는 유리하는 자의 전형이라고 못 박습니다. 결국 큰아들은 인간의 내부적 방황을, 작은 아들은 외부적 방황을 보여주는 대명사라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가인은 놋 땅에 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놋 땅에서 거하는 그는 거기서 안정적으로 정착하여 사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그곳에서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자로, 동시에 또 다른 삶의 투쟁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는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 나간 자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았던 교부신학자 어거스틴은 그래서 이 유명한 어록을 남긴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까지 참 평안이 없었다.” 결국 가인에게는 스스로의 희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는 결국 버려진 땅에서 그렇게 살다가 가야 하는 인간이 겪어야 하는 비극의 단면을 우리들에게 알려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본문 15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놋 땅에서 유리방황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의 가인이 본인이 받아야 하는 징벌의 무게가 너무 크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반색하며 가인에게 약속을 두 가지 합니다. ① 가인을 죽이는 자는 7배의 벌을 받게 할 것이다. ② 가인에게 죽음을 모면하게 하는 표를 주시며 안심시키십니다. 이 두 가지의 약속을 접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이게 뭐지? 징벌의 선언과 구원의 선언을 동시한 셈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해석이 가능합니까? 이론적으로 접근해서 이렇게 행동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해석할 방도가 없습니다. 병 주고 약주는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폄훼하시겠습니까? 얼마 전에 대중가수로 잘 알려진 아이유가 20대의 마지막 생일을 맞이해서 소외계층에 5억 원을 기부했다는 아주 기분 좋고 아름다운 소식이 뉴스에 올라왔습니다. 그 행위에 대해 어떤 이가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재산이 얼만데 5억 원이냐?” 아주 질 나쁜 인간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 병 주고 약주는 거냐는 식으로 해석하는 자는 정말로 나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처럼 보이는 가인에게 준 표와 가인을 죽이는 자는 7배의 벌을 줄 것이라는 선언의 해석은 단 한 가지입니다. ※ 그냥 은혜입니다. 살붙이지 않고, 뼈붙이지 않고 그냥 은혜입니다.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인간이자 죄인인 가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은혜입니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은혜는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은혜는 나에게도 그렇게 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 구원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이라는 표를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무슨 자격조건이나 있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그럴만한 하등의 자격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그냥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건반사는 아니지만 구원을 받은 은혜를 아는 자로 적아도 한 가지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에덴의 동쪽에서 영원히 머물러 살고 있는 나의 삶의 영역이지만 그래도 에덴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신앙적 삶의 태도는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기주 작가가 쓴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를 읽으며 행복했습니다. 그의 글 하나를 소개하고 오늘 설교를 맺겠습니다. 성찰 (이기주, “사랑은 내 시간을 기꺼이 건네주는 것이다.” 황소북스, p,117.) "시선을 안으로 돌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성찰(성찰)이다. 성찰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introspection'을 동강내보자. 앞부분 ’intro'는 ‘앞으로’ 혹은 ‘안으로’라는 뜻이고, 'spect'는 ‘보는 행위’를 의미하는 동사 ‘see'와 관련이 깊다. 달리 말해, 성찰은 내면세계를 자세히 살피는 일이다. 스스로를 헤아려 본다는 점에서 ’성찰‘은 ’좌정‘ (坐定)의 성격을 띤다. 앉을 坐는 평평한 땅(土)위에 사람(人)과 사람(人)이 동등하게 마주보는 모습을 나타낸다. 정(定)은 ’정하다‘, ’바로잡다‘ 등의 뜻을 가진다. 자신을 철저히 대상화하여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고치는 것이 좌정이자 성찰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구원을 도무지 받을 수 없었던 가인과 같은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표를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이 은혜였다는 사실을 성찰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은 자 하늘을 디디며 사십시다. 그게 은혜 받은 자의 최소한의 도리이며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 자만이 찬송가 310장 1절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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