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12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스물네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4:9-15 제목: 가인과 아벨 이야기(2) 새벽예배를 인도하고 집에 들어가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면 보았던 아침 뉴스 밑 자막에 가방 안에 동거남의 9살 아들을 감금하고 집어넣어 살해한 내연녀에게 징역 25년이 선고되었다는 소식이 떴습니다. 바로 그 자막이 지나가는 동안 보도된 뉴스는 2살 된 양아들을 때려서 뇌출혈을 일으켜 의식불명의 상태로 만든 양부가 구속되었다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마치 집단 정신병동 수용소이고, 상당수 사람들이 정신병 환자인 것 같다고. 친구들 모임을 가진 둘째 날, 조금 일찍 깨서 모임이 있던 장소의 캠퍼스로 나갔습니다. 이른 아침이고 공기가 너무 좋고 날씨도 화창해서 가지고 간 나태주 시인이 쓴 ‘꽃을 보듯 너를 본다’를 펴서 읽는데 이 시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우리는 서로가/꽃이고 기도다/나 없을 때 너/보고 싶었지?/생각이 많이 났지?/나 아플 때 너/걱정 됐지?/기도하고 싶었지?/그간 나도 그래/우리는 서로가/기도이고 꽃이다.” (p,30.) 물론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왠지 오늘 내가 살아가는 현장은 집단 정신병자들이 우글거리는 정신병자 수용소 같다는 우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은 유감입니다. 히브리대학의 유발 하라리가 ‘호모데우스’에서 자신 있게 말한 것이 있습니다. 고대인들이 신을 의지한 것은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에는 자기들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인간에게 이런 힘이 있기 때문에 신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라고 강조합니다. 그 힘이 바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지금은 호모데우스의 시대 즉 인간이 신인 시대라고 선언하기까지 했습니다. 정말로 그럴까? 신이 된 인간이 통제하고 있는 이 시대, 어떻습니까? 파라다이스입니까? 유토피아입니까? 그냥 한 번 웃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극단일까요? 며칠 전, 60대 택시 운전자를 몸에 문신으로 도배한 20대가 무차별 폭행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공영방송과 종편 뉴스에서 방송되었습니다. 무슨 생각이 드셨습니까? 톨스토이의 말이 혹시 떠오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습니다.그러자 하나님께서 살인자를 찾아오셨습니다.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 구절을 보면 양 극단의 면이 보이는 것 같아 매우 아프고 쓰립니다. 가인의 소위가 얼마나 악한지 그것이 한 면이고, 그런 가인을 그럼에도 찾아오신 사랑의 하나님이 갖고 계신 안타까움이 다른 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생을 죽인 가인을 찾아오셨습니다. 벌을 내리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먼저는 그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를 물으신 것은 구약 학자 발터 짐멀리(W. Zimmerli)가 말한 대로 '은혜로운 기회‘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가인에게 먼저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기를 바라고 원하셨다는 말입니다. 저는 요한복음 21장을 볼 때마다 주님의 마음 때문에 울컥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요한복음 21:10-12절을 읽어드립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정황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요한복음 21:14절로 해석하겠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디베랴에 오셔서 153마리의 고기를 잡게 하신 뒤에 그들이 잡은 물고기로 같이 아침 식사를 하신 주님의 이 현현이 세 번째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세 번째라는 횟수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과 같은 제 2제자군에 해당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염두 해 둔 해석이 아니라 요한복음 20장에 기록된 도마와 관련한 나타나심을 기초로 한 계산입니다. 여하튼 당신의 부활사실을 리얼하게 알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낙향해서 옛 일도 돌아간 7명의 제자들에게 다시 가셔서 그들에게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를 연상하게 하는 고기잡이 승리를 이끄셨던 주님의 러브스토리가 진하게 다가오는 것이 요한복음 21장의 메시지입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요 21:12) 후에 베드로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이 여실히 엿보이는 메시지가 연속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살인자 가인을 찾아가셔서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러나 가인은 악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은혜로운 기회주심을 일거에 거절합니다. 9절 하반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이희학 교수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가인은 오히려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나아갔으며, 그에게서 죄를 참회하는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께 대한 가인의 태도는 아담보다 훨씬 더 파렴치 하며, 한 단계 더 깊어진 죄악 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희학, “인간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대한기독교서회,p,160.) 너무 적확한 해석입니다. 기회를 주었는데 싸늘하게 거부한 가인의 죄는 아담보다 더 한 층 가중되었다는 해석은 탁월해 보입니다. 가인이 이 점입가경의 뻔뻔함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반응하십니다. 10절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가인의 적반하장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으셨던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죄를 직접 드러내십니다. 10절의 메시지를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네게 죽인 네 동생의 피가 땅에서 솟아올라 나에게 그 억울함을 신원하고 있다.” 10절 맨 마지막에 번역되어 있는 ‘호소하느니라’는 히브리어 ‘짜악’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적인 의미는 ‘절규하다’입니다. ‘絶叫’라는 한자 단어를 풀면 끊을 ‘절’자와 부르짖을 ‘규’입니다. 특히 ‘叫’ 라는 단어는 짐승이 운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절규라는 단어는 짐승이 너무 고통스러워 육체의 마디마디가 끊어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소리 내는 울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누가 그렇다는 것입니까? 아벨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바로 너 가인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앞에서 소개한 나태주 시인의 대표적 명시 하나만 더 소개 해봅니다. 사랑에 답함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게 사랑이고, 이게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가인은 정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가인은 본인의 죄를 참회하는 것은 고사하고 도리어 정당하게 여기는 듯한 어처구니없음을 본문이 고발합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었기에 이어지는 11-12절에서 세 가지의 심판을 내리십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① 가인이 밟는 땅을 심판하겠다는 말입니다, (11-12) ② 가인이 유리방황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심판이었습니다. (14) ③ 하나님의 낯을 볼 수 없게 되는 심판이었습니다. (1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가인에게 가능성 하나를 열어놓으심으로 구속사의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열외는 그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본문 1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가인에게 주어진 표와 가인이 두려워했던 자들이 누구인지는 다음 주 수요일 25번째의 강해를 통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자, 지금까지의 본문 해석을 통해 오늘 수요 강해를 통해 저와 여러분이 함께 공유할 은혜를 소개하겠습니다. ※ 돌이킴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본문에서 기회라는 단어를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찾아오심이었다고. 주님은 가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신 이유는 단 한 가지 죄에 대한 인정함과 돌이킴을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기회를 보란 듯이 날려 보냈습니다. 다시 한 번 본문 9절을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은 모르고 하신 질문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크로스웨이 성경 공부반에서 강의를 하면서 가르쳤던 교훈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세 가지 죄가 있다. Ⓐ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죄 Ⓑ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죄 Ⓒ 배웠으면서도 행하지 않는 죄, 이중에 가중처벌을 받아야 하는 죄는 세 번째 죄다.” 저는 가인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줄 아는 정도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인지 능력이 있었던 자가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자기가 죽인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를 물으실 때, 가인이 그 물음의 의도를 모를 리 만무인데도 그는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였고 냉랭하고 하나님의 물음에 항의조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배웠으면 행하지 않는 죄는 영적 시각으로 볼 때 가중처벌죄입니다. 하나님은 기회를 가인에게 주시기 위해 오셔서 질문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 7:16-18절을 봅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그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가 뽑혔고 유다 족속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세라 족속이 뽑혔고 세라 족속의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삽디가 뽑혔고 삽디의 가족 각 남자를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더니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이요 삽디의 손자요 갈미의 아들인 아간이 뽑혔더라” 잘 아시는 것처럼 읽어 드린 말씀은 아이 성에서 대패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이유를 범죄자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 장본인을 색출하기 위해 제비를 뽑는 기사입니다. 여호수아 역사서 기자는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유다지파 → 세라 족속 → 삽디의 가족 → 갈미의 가족 → 갈미의 아들 아간 순으로 기록했습니다. 아간의 죄는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벨 세겔과 오십 세겔 짜리 금덩이를 숨긴 죄였습니다. 당시는 철저한 신정정치체제였던 공동체였기에 아간의 죄는 중범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간을 척결하기 위해서 그는 곧바로 지명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하여금 제비를 뽑게 하는 방식을 명하셨습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수는 어림잡아 약 200만 명입니다. 이들 공동체에서 제비뽑기를 한다는 것은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제비를 뽑아 아간을 색출하였습니다. 이재철 목사가 쓴 ‘사명자반’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말씀으로 범죄자 아간을 간단하게 밝히시지 않으시고 많은 시간과 번거로움을 필요로 하는 제비뽑기를 동원하셨는가? 그것은 패역한 범죄자 아간에게 베푸신 마지막 회개의 기회였다. 제비뽑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지목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아간이 스스로 회개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이재철, “사명자반” 홍성사, p,241) 인간은 누구나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문제는 넘어지고 쓰러진 이유를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돌이키는 자가 되느냐 그렇지 않은 자가 되느냐? 입니다. 리처드 보컴과 트레버 하트가 공동으로 쓴 ‘십자가에서’를 보면 의미 있는 글이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는 실패를 겪고 나서야 제자로서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오직 넘어지고 나서야 베드로는 일어설 수 있었다. 베드로의 실패는 하나님의 성공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방법이 내포하는 역설이다.” (리처드 보컴, 트레버 하트공저, “십자가에서”,터치북스, p,72.) 제가 이 글을 읽다가 부연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동의하는 말이지만 한 가지가 같이 붙었어야 한다는 아쉬움입니다. 누구에게나 베드로와 같은 일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말입니다. 한 가지가 반드시 전제된다는 점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베드로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가복은 22:62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대전제입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은 찾아와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선물을 받습니까? 주님이 찾아왔을 때 나의 연약함과 죗성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깨달아 돌이키는 자들입니다. 모쪼록 저와 여러분은 가인 같은 존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인과 아벨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 조명 받는 은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