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가인과 아벨 이야기(1)2024-03-08 17:06
작성자 Level 10

2021년 4월 28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스물세 번째 강해)

 

본문창세기 4:1-8

제목가인과 아벨 이야기(1)

 

교우들과 소그룹모임을 할 때 항상 곤혹스러운 것은 난해 구절을 이해하도록 하는 작업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텍스트가 오늘 주어진 본문입니다.

3-5절을 읽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을까?

이로 인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깊이 생각해 보면 살인 사건의 동기 부여를 하신 분이 하나님인 것처럼 여겨지는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목회자로 사는 저뿐만 아니라모든 목회자들의 공통적인 난처함일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우리들에게 익숙해 있는 이 구절을 해석하는 전통적인 해석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헤르만 궁켈의 입장입니다.

이 해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농업보다 유목민의 삶을 더 선호했다는 해석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농산물로 드리는 제사를 거절하시고양을 바쳐 드리는 제사를 흡향하셨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선뜻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추방시키신 뒤에 명령하셨던 것이 땅을 경작하라는 것이었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명령에 순종하는 방법은 당시의 삶의 환경에서 두 가지로 나누어 진 것입니다.

하나는 농업이고또 다른 하나는 목축업입니다.

두 가지의 생활 방식은 인간의 생존 방법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선호하신 분야가 목축업이라는 고정된 해석은 억지 춘향입니다.

하나님이 농업에 종사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목축업자였던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이유가 하나님의 직업의 선호도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전혀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② J, Skinner(스키너) & E Jacob(야곱)의 입장입니다.아벨이 가인에 비해 구약의 제사법에 훨씬 더 적합한 제사를 드렸다는 이론입니다.

하나님은 곡식 제사보다는 동물의 희생 제사를 더 선호하시는 분이셨고피 있는 제사가 피 없는 제사보다 더 우월한 영적 제사이기에 아벨의 제사는 열납 되고가인의 제사는 그렇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해석도 전혀 성서 신학적이지 않습니다.

본문 4,5절에 기록된 제물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민하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의미하는 것이 소제’ 즉 피 없는 제사인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아벨이 드린 제사도 민하입니다.

하나님께서 피 흘리는 제물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짜 맞추기식이라는 냄새가 납니다.

③ Von Rad (폰 라드)의 주장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것을 받지 않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며하나님의 자유성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제사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기에 두 사람의 제사를 받고 받지 않으시고는 인간이 논할 바가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예정론적인 차원의 해석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예정론에 대하여 대단히 강하게 반대하는 목사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경우를 인정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다는 것을 수용하라는 것처럼 들리기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 주장에 대하여 학자들마다 그들의 신학적 입장에 따라 가인과 아벨 제사를 논한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제게는 마음에 확 와 닿는 논증들이 아니기에 불편합니다.

해서 제가 나름 지지하는 마지막 해석을 교우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아마도 네 번째의 본문 해석이 될 것 같습니다.

 

④ 제물을 드린 자의 제물을 인격적인 삶과 연결시켜 보는 해석입니다.

 

본문 4-5절을 다시 음미하겠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이 구절을 조금만 더 세부적으로 분석하겠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아주 의도적으로 본문을 기록한 느낌이 농후 합니다.

통상 하나님의 주목하심은 제물일 것이라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합니다.

저도 옛날에는 그리 했습니다.

그런데 이희학 교수의 글을 읽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그 대목을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본문이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자를 분리시키지 않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중략하나님은 단순히 제물만을 받으시고거절하신 것이 아니다제물에 선행하는 것은 제물을 드린 자의 이름이다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을 동시에 거절하신 것이고,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동시에 받으신 것이다제물보다 중요한 것은 제물을 드린 자의 인격적 생활이었다.”

(이희학, “인간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대한기독교서회,p,154.)

가인과 아벨의 인격적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텍스트가 6-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제물이 열납 되지 않자 보인 태도는 분함과 안색의 변함이었다고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인의 삶을 농축적으로 알려주는 대목이 7절 전반절입니다.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이미 가인의 성품이 거칠고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8절을 봅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개역개정판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70인역(페쉬타)와 라틴어 역본인 벌게이트 번역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우리 들판으로 나가자.”

무슨 말입니까?

가인의 살인은 매우 고의적으로 계획된 계획 살인이었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뒷받침해 줍니까?

가인의 인격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점에 동의합니다.

전혀 신앙적 인격이 전제되지 않은 삶을 산 가인의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실 리 만무라는 교훈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 첫 번째 설교를 통해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됩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신앙의 인격이 담보된 삶의 예배라는 교훈입니다.

 

삶의 내용이 담보되지 않은 예배를 하나님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민감하게 주목해야 합니다.

창세기가 편집 된 이후 아주 오랜 뒤에 기록된 요한일서 3:12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저는 요한의 이 후 보고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서 주저하지 않습니다.

가인의 행위는 악하고는 삶의 뒤따르지 않는 것이고,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는 보고는 아벨은 그의 삶이 언제나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이었다고 해석하는 것 말입니다.

여로보암 2세 치하는 누차 말씀을 드렸지만 북 왕국 이스라엘의 최고의 전성기였습니다.

국력군사력경제력에 있어서 전혀 부러울 것이 없는 최고의 시기였습니다.

전쟁의 소식도 멈추고영토는 확장되고상업이 활발하여 먹고 살기에 아주 최적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도덕적으로윤리적으로 가장 타락했던 시기를 북 왕국 이스라엘의 치세 중에 뽑으라면 바로 이 때였습니다.

하나님을 바산의 암소들로 탈바꿈시켜 제 2계명을 어기고제사장소 단일화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여 단과 벧엘에 성소를 만들어 그곳에서 마음껏 자기 방법의 종교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시기가 바로 이 때였습니다.

성직자들은 뇌물과 물질에 노예가 이미 성직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고길 예언자들이 판을 쳤습니다.

오죽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선지자가 없으면 남 왕국 유다의 농부 출신의 아모스를 하나님께서 들으셨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가진 자들은 각양의 방법으로 없는 자를 유린하였습니다.

불의의 재판을 자행했습니다.

판결은 항상 있는 자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재판장들은 물질로 매수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리대금업으로 가난 한 자를 더 착취하고 빼앗은 악행들이 서슴없이 자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소위를 나쁘게 보셨습니다.

악하게 보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악행 중에서 오늘 본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아주 중대한 범죄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종교적인 타락이었습니다.

아모스 5:21-23절을 주목합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이 오늘 본문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너무도 기막히게 적용되는 본문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신앙적 인격이 무시되는 상황 말입니다.

로마서 12:1-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11장을 통해 바울은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기막힌 신학적 통찰로 알려줍니다.

그런 뒤에 바울은 로마서 12-15장까지 구원 받은 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또한 아주 명쾌한 언어로 알려줍니다.

주목할 것은 12:1절의 접속사입니다.

그러므로입니다.

원인을 알고 나면 결과를 보게 됩니다.

삶의 이치요 법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로마서 1:1-11:36절의 은혜의 비밀을 알려주었으니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제부터 그 은혜의 비밀을 맡은 자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렇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오늘 우리 한국교회 안에 가인 신자들이 우글거립니다.

그들의 판입니다.

통곡하고 또 통곡할 일입니다.

팀 켈러가 이렇게 비수를 던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헬스클럽에 등록하는 것도 아니고당신의 성공과 잠재력 실현을 돕는 웰빙 프로그램도 아니다기독교는 영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또 하나의 자판기가 아니며당신은 무난한 비용으로 그런 서비스를 이용하여 필요를 채우는 곳도 아니다기독교 신앙은 흥정이 아니라 순복이다.” (템 켈러, “예수예수두란노, p,148.)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신자들 중에 목사가 보수적인 이야기를 말하면 수구적인 냄새가 나는 대화가 안 되는 골통분자라고 폄훼합니다.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신자들 중에 목사가 진보적인 말을 하고일을 행하면 목사가 빨갱이와 같은 불온한 사상을 갖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예수를 말하면이 두 편에 갈라져 있는 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불편하니까 예수 설교 하지 말고 우리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설교를 하라고 싸잡아 공격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삶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사상이 담보되어 있는 예배를 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삶이 담보되어 있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셨던 대로 행동하고 사는 순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되라는 말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축도 이후가 아름다운 삶을 살되 축도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 예배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월요일부터 더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주일에 공급되는 말씀에 생명을 걸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실천적 삶을 살아내기 위해 성서적 앎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는 진정한 삶의 예배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