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진의(眞意)
본문: 고린도후서 7:2-4
서론)
오늘 설교 제목을 풀면 ‘진짜 의도’ 혹은 ‘진짜 의미’라는 뜻일 것입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려면 그 사람의 진정성이 느껴져야 가능합니다.
아무에게나 마음을 주거나, 속에 있는 말을 내놓지 않습니다.
목사인 저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하고는 대화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장을 읽다보면 너무 진한 마음의 대화를 나눈 감동적인 두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습니다.
마침 한 백부장이 보낸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백부장이 살고 있는데 그 사람의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전갈이었습니다.
헌데 유대인의 장로들이 이 팩트를 예수께 전하면서 요청한 내용이 주목할 만합니다.
그 사람의 종을 구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 백부장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가버나움에 회당을 짓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유대 민족을 사랑하는 자라고 그 나름의 타당성을 알려줍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그 백부장이 살고 있는 집으로 심방을 하십니다.
누가복음 7:6-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생뚱맞은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백부장에 집에 도착한 예수님을 맞이한 자는 백부장이 아니라 그의 벗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벗들이 전한 말은 내 친구는 감히 주님을 집으로 모시지 못하겠다는 전갈이었습니다.
문전 박대가 아니었습니다.
직접 당사자인 백부장은 감히 예수님의 얼굴을 면전에서 뵙지 못할 정도로 주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벌어진 진정성이 느껴지는 해프닝이었습니다.
이것도 충격적인 고백인데 더 심대한 고백은 바로 이 고백이었습니다.
‘말씀만 하셔서 내 하인을 고쳐 주옵소서!’
그 근거는 이것이었습니다.
나도 내 밑에 있는 부하들에게 뭔가를 하명할 때, 말로 하는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토로하며 하물며 주님께서야 재론의 여지가 있겠느냐는 고백이었습니다.
단지 말로만 하더라도 내 하인의 질병 정도야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고쳐지는 사역이지 않겠느냐는 주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의 고백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단지 능력을 지닌 예언자 같은 존재로서 예수님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주군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을 고백한 대단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이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감동 받으셨습니다.
곧바로 주님은 일하셨습니다.
그 일하심의 내용을 누가복음 7:9-10절은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나아 있었더라”
무엇이 보입니까?
극찬과 기도의 응답입니다.
설교의 서두에 이 성경의 기사를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眞意라는 단어를 설명하기에 참 좋은 성경의 내증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수없이 많은 언어로 무언가를 표현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아주 현란한 문체로 독자들에게 무언가의 교훈을 남기려고 한 메시지도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지만 백부장과 주님은 서로간의 마음과 마음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 즉 진의의 대화를 보여주는데 이것을 교우들에게 알려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서 또 다른 진의를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해 전하려고 노력하는 주인공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2절을 읽겠습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거하고 있었던 반대자들을 향하여 세 가지를 변론하고 있습니다.
① 불의를 행하지 아니했다.
② 해롭게 하지 않았다.
③ 속여 빼앗지 않았다.
이 세 가지의 내용을 바울이 말한 것을 이해하려면 주석적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8-9장에서 살피겠지만,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당하고 있었던 경제적인 어려움을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방 교회 형제들에게 호소하고 그 예루살렘의 형제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바울이 이 요청을 한 것은 개인 모금 활동이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0절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회의의 요청이었기에 바울의 연보 독려는 공적인 사역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연보 사역에 마케도냐 지역에 있는 교회(데살로니가, 베레아, 갈라디아 교회)들은 최선을 다해 구제 연보에 동참을 했는데, 이 교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형교회였던 고린도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미온적이었고, 이 연보 과정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약 1년 6개월 정도에 걸쳐 마무리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주후 55년 경 봄에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이방 형제 교회의 구제연보를 전달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연보 과정에 대하여 고린도교회의 반대자들이 바울에게 보내는 불신의 정서를 아주 적극적으로 변론하고 있는 내용이 본문 텍스트 2절입니다.
아마도 구제 헌금을 모금한 바울이 그 헌금을 적기에 예루살렘 교회에 전하지 않은 것을 두고 공금 횡령이라는 차원으로 바울을 몰고 간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세 가지의 단어로 적극적 방어를 표현합니다.
“불의를 행하지 아니했다. 해롭게 하지 않았다. 속여 빼앗지 않았다.”
바울은 이런 강력한 변론을 행하면서 도리어 본문 2절에서 고린도교회의 반대자들을 향해 이렇게 요청합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저는 이 말을 전한 바울의 심정을 십분 이해합니다.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본문 2절 전반절을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어성경에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런데 번역자들이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요?
‘코레오’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이 단어를 직역하면 ‘공간을 남기다.’, 혹은 ‘여백을 남겨두다’의 의미인데 본문 2절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 적확합니다.
‘우리들에게 여백을 허용하라’, ‘우리들이 거주할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말입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바울이 적대자들을 품기 위하여 호소한 셈입니다.
설교자가 호소라는 표현을 쓴 것을 지지하게 해 주는 근거가 본문 3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바울이 분명히 적대자들에게 우리들이 거할 공간 즉 여백을 남겨 달라고 호소한 이유가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밝힌 것과 동시에 동생동사(同生同死)라는 분명한 이유임을 전하고 있는 이 대목에서 울컥하는 동변상련의 감정이 목회자인 제게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2:4절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기록된 ‘마음’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 3절에 기록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르디아’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다른 표현으로 번역하면 ‘심장’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절절한 마음과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절실함이 있었으면 본문에서 동생동사라는 단어까지 도입했을까를 추론해 보면 같은 사역자인 저는 100%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문젯거리가 누구입니까?
바울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심각한 훼방자요 문젯거리는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입니다.
저들이 누구입니까?
고린도교회라는 공동체의 실권을 빼앗기기 싫어 무조건 바울에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세속적 차원으로 바라보면 정말로 다시는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음은 물론 쳐다보기도 싫은 비인격적, 비안간적인 차원의 상대들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저들에게 호소합니다.
우리들을 마음으로 영접해 달라고.
지금 무엇을 강하게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까?
진의(眞意)를 알아달라는 호소입니다.
이제 마지막 구절 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이 구절은 바울이 진의를 또 한 번 증명해 내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상존하고 있었던 반대자들의 그 반대편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고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마케도냐 지역에서 썼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잃어버려 저와 여러분이 읽을 수는 없지만 ‘눈물의 편지’라고도 하는 세 번째 편지 써서 디도에게 보냈는데 디도가 바울이 거주하고 있었던 에베소로 귀환한 것이 아니라 마케도냐 쪽으로 돌아왔다는 급보를 받은 바울이 직접 마케도냐로 가서 디도를 만났기 때문에 바울의 동선은 마케도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디도는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바울에게 보고했는데 너무나도 감사하게 상당수 많은 자들이 다시 바울의 사도권을 존중하며 바울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동역자들로 회복되었음을 보고했다고 이전 강해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회복에 무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동역자들을 향하여 본문 4절을 편지에 담은 것입니다.
헌데 본문 4절을 통해 부가적으로 얻으려는 바울의 지혜가 보입니다.
분명히 4절은 회개한 자들, 바울의 사도권으로 인정하는 자리로 돌아온 자들을 전제하여 언급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수신자를 ‘우나스’ 즉 ‘너희’라고 2인칭 복수로 표현한 것에서 단지 바울은 지지자들뿐만이 아니라, 반대편에 있는 마음이 완악한 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품으려는 목회자적인 공생의 마음을 함께 적시하고 있다는 바울의 진의를 엿보게 해줍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고린도교회 형제(지지자, 반대자 모두를 아우르는 진정성이 있는 외침)들아! 나는 고린도교회의 모든 형제들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다. 그래서 나는 당신들을 자랑한다. 해서 많은 어려움을 당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는 그 가운데에서도 당신들 때문에 위로를 받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지금까지 본문을 해석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하는 영적 교훈을 나누어 보십시다.
※ 바울의 진의는 ‘더불어’였습니다.
다시 본문 3절을 읽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상징적인 의미는 ‘함께’입니다.
제게 잘 보는 영어성경은 NIV성경입니다.
이 성경에 본문 3절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I do not say this to condemn you; I have said before that you have such a place in our hearts that we would live or die with you.”
언제나 정감이 있는 전치사는 ‘with’입니다.
줄곧 ‘함께’라고 번역되는 전치사이지만 종종 이 단어는 ‘더불어’라고도 번역됩니다.
더불어 살고, 더불어 죽는 관계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입니다.
담임목사의 첫 번째 책인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에서 언젠가 교우들에게 말씀드렸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가장 비인간적인 인종차별 정책을 펴서 수없이 많은 흑인들을 죽이고, 압박하고, 통제했습니다.
그랬던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넬슨 만델라가 집권하는 민주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헌법재판소는 인종차별 시대에 당했던 수없이 많았던 피해 사건들을 해결하는 첨병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일들을 해결하려면 또 다른 보복들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게 된다는 점인데 남아공의 헌법 재판관이었던 알비 삭스가 이 보복의 악순환을 멈추게 하기 위해 내놓았던 것이 바로 우분투(ubutu)였습니다.
이 정신을 표현한 문장이 바로 이 문장입니다.“I AM BECAUSE YOU ARE.”(이강덕,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 동연 간, p,44.)
알비 삭스 역시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의 폭력적인 백인 경찰의 폭탄 테러로 한쪽 눈과 한쪽 팔을 잃은 피해자인데 그는 보복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 우분투를 도입했습니다.
언젠가 제가 우분투 정신을 기초로 하여 어느 기독교 단체에 글을 보냈는데 이렇게 해석해서 우분투를 정리했던 글이 있습니다.
“I AM BECAUSE YOU ARE.” 는 다른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I WOULD BE WITH YOU." (나는 당신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문장을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더불어’의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동시에 이 ‘더불어’의 삶은 오직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야 하는 책임적 반응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보였던 ‘더불어’의 진의를 캐치했습니다.
그런데 이 바울의 행보를 통해 그가 보여주었던 책임적 반응을 구체적으로 한 가지 교우들에게 제시하고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 최선을 다해 예의가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잠시 언급했듯이 바울은 본문에서 세상적인 관점을 바라보면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 적대자들을 향해 최선의 예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단어에서 그것이 보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는 표현입니다.
더 이상 이 보다 더 큰 예의의 표현이 또 있겠습니까?
전혀 예의가 없었던 자들인 바울의 적대자들에게 바울은 가장 의미 있는 예의를 표하며 행동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위대함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 하나를 소개합니다.
로마서 16:2절입니다.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겐그레아라는 조그마한 어촌 출신의 여성 동역자인 뵈뵈에게 대서사시인 로마서를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전달하라는 하명을 내렸습니다.
충격입니다.
얼마나 뵈뵈 자매를 신뢰했으면 로마서를 맡겼을까요?
헌데 바울은 로마서의 에필로그에 이런 글을 남기며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아마도 뵈뵈가 알지 못하는 당부를.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여기에 기록된 헬라어 단어 ‘악시오스’가 바로 ‘합당한 예절’의 원어입니다.
이 단어를 풀면 ‘가치가 있게 대우하라’는 말입니다.
‘귀하게 대하라’는 말입니다.
‘더불어 함께’ 가겠다는 공생의 그리스도인들이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이율배반입니다.
‘더불어 함께’ 가겠다는 의지가 있는 이 땅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책임적 반응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아주 가끔, 목회의 현장에서 절망하는 것은 무례한 신자들을 볼 때입니다.
왜 저들은 기독교 신앙을 택했지? 를 궁금하게 만드는 자들을 볼 때, 가장 절망스럽습니다.
바울은 끝까지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에게 함께 설고 함께 죽고 싶다는 진의를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가져야할 영적 진의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월요일, 안과 검진 차 서울에 소재해 있는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대체적으로 제천에 소재해 있는 병원에 간호사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내가 왜 내 돈을 주고 진료를 받으러 왔는데 이런 무시를 당해야 하지?”
“내가 저 간호사들에게 뭐 책잡히는 일을 했나? 저들이 나에게 이렇게 무례한 이유가 무엇이지?”
그런데 월요일에 다녀온 서울에 소재한 모 안과에서 환자가 아닌 고객으로 대우를 받아 매우 흡족했습니다.
따뜻한 격려, 따뜻한 안내, 따뜻한 언어가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아주 가끔은 목사로 살면서, 교우들에게 무시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저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같이 아파해주었는데 나는 왜 저들에게 이런 무시를 당해야 하지?
본문의 바울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위로는 되지만 여운이 남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여러분은 담임목사의 진의를 아십니까?
여러분은 당신을 위해 중보해 주는 상대방 지체의 진의를 알고 존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본문에서 진심을 토하고 있는 바울의 진의를 아시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