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3일 수요 기도회 설교 (고린도후서 스물네 번째 강해) 제목: 지는 삶 본문: 고린도후서 6:11-13 서론) 얼마 전에 서울신학대학교 이용호 교수가 쓴 요나 연구서인 ‘하나님의 자유’를 손에 들고 읽었습니다. 읽다가 구약 신학자인 친구를 통해 새롭게 배운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먼저 제가 새롭게 배운 그 성서적 출처를 소개하겠습니다. 요나 1:11-12절입니다.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흔히 이 구절을 해석할 때, 저를 비롯한 많은 목회자들이 대단히 은혜롭게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요나를 경고하시기 위해 이 배에 풍랑을 만나게 하셨고, 급기야 모든 사람이 죽을 위기를 만나게 되자 배 안에 있던 자들이 자기가 믿던 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헛수고였고, 결국 풍랑의 원인을 찾아보니 이 배에 승선한 요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제비뽑기를 통해 알게 되어 요나에게 그 원인 규명을 요구하는 장면인데, 요나가 아주 흔쾌히 이 모든 재앙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기를 바다에 던지면 이 풍랑이 멎을 것이라고 아주 당당하게 말하는 장면이라고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 요나의 고백을 대체적으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한 탓에 이 모든 위험이 임했기에 아주 솔직히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자기 탓으로 돌렸다는 은혜로운 메시지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이런 전통적인 해석을 수용하지 않고 학자가 갖고 있는 지성적 해석을 내놓습니다. “이 구절은 나를 죽이고 남을 살리겠다는 자기희생적인 사고의 발로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멀리 피해 도망가려고 배를 탔는데 이곳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기에 죽음을 불사하더라도 다시 도망가겠다는 저항의 발로로 보는 것이 더 본문에 가까운 해석이다. ‘던지라’(툴)는 동사는 하나님의 방식에 저항하려는 요나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용호, ‘하나님의 자유’,토비야, pp,88-89.) 이렇게 요나의 행위를 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나를 핍박하고, 위협해도 결코 하나님께 지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 표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지 않겠다던 요나의 이 발언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끝까지 항변했던 요나의 끝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바다에 던져졌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물고기가 그를 삼켜 삼일 만에 육지에 토해내 목숨을 건지게 되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십시다. 요나의 항의에 요나가 졌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지셨습니까? 대체로 많은 사람은 요나가 결국 패배했다고 해석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반대로 하나님이 져주셨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에 하나, 하나님이 져주신 것이 아니고 요나가 진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할 리 만무이고, 그를 삼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게 하셨을 때, 그 물고기의 위안에서도 위액에 의하여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를 살려놓으신 것이고, 공기를 마실 수 없는 환경에서도 요나가 삼일 동안 살 수 있게 하셨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정황으로 볼 때, 결국은 요나에게 하나님이 져 주신 것이라고 해석해도 그리 큰 오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져 주시는 하나님이심에 틀림이 없다는 은혜가 제게는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상투적으로 알고 있는 은혜, 야곱에게 져주셨던 하나님을 위시하여, 모세에게 져주셨고, 예언자들에게 져주셨고, 오늘은 또 길이 참으사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져주시는 하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이 땅에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지는 삶을 때를 따라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론) 오늘 본문을 보면 본 편지의 저자인 바울이 대의(大義)를 위해 고린도교회의 반대자 혹은 적대자들에게 영적인 포용력을 갖고 다가서는 전도자의 애틋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본문 11절을 읽어 보십시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사실 이 토로는 결코 쉽지 않은 발설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을 향한 고린도교회 적대자들의 공격은 바울에 대한 약점을 노린 공격이었고, 그가 갖고 있는 육체의 나약함까지 시비를 걸었고, 심지어 그가 주의 일을 감당하는 최고의 지지대였던 사도권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반 인격적이고 사탄적인 흉계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류들에게 바울이 본문 11절을 전한 것은 대단한 물러섬이고 양보가 전제되지 않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적시한 ‘마음’은 ‘심장’의 뜻을 갖고 있는 헬라어 ‘칼디아’의 번역입니다. 더불어 ‘넓어졌다’는 표현도 ‘사랑의 마음으로 껴안다’는 뜻을 갖고 있는 ‘페플랴튠타이’의 번역입니다. 적용해 보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고린도교회의 반대자들에게 이렇게 선포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형제들이여! 내가 뜨거운 심장으로 너희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껴안으려고 한다.” 이렇게 적용하다보니 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우들에게 전했던 말씀이 고스란히 떠오릅니다. 빌립보서 1:8절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먼저 마음을 연 바울은 이윽고 내가 이렇게 마음을 열었으니 너희들도 우리들을 향해 마음을 열어주기를 기대한다는 간절한 감정적인 호소를 하는 장면이 이어지는 12-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런 생각이 스며들었습니다. 오늘 본문 11-13절의 순서가 정말로 중요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만에 하나 12-13절이 단락에 앞에 있고, 11절이 그 다음에 기록되었다면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과 결코 화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될 터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감사하게 본문은 11-13절의 순서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 교훈이 다가옵니다. 져야 이깁니다. 반대로 우리들의 삶 속에서 분명히 이긴 것 같은 데 진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자이어야지 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시다. 만에 하나, 하나님이 나에게 이기셨다면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에 대한 성찰 말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여전히 존재합니다. 내가 존재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을 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까? 천부당만부당입니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에게 여전히 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3:3절을 읽어 보십시다.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이 구절은 이스라엘이 자행한 시내산 난장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의 핵심적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가나안으로 올라가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최후통첩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올라가지 않겠다고 선포하신 하나님의 이유입니다. ‘너희들을 진멸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이 아무리 화가 나도 당신의 공동체를 생각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당신과 나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당신과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언제나 져주시기 때문입니다.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을 때,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해서 목을 걸고 하나님의 동행을 재요청하는 중보를 드립니다. 이런 간절한 모세의 요청에 대하여 하나님의 최종 결심을 출애굽기 기자는 33:14절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의 져주심이 보이십니까? 요즈음 언론과 방송사가 내보내는 일체의 보도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요? 지는 사람은 바보고, 이기는 것만이 가장 극대화된 효용임을 부추기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를 보면 현직 법무부장관 아들 군 불법 사건에 대하여 물 만난 제비처럼 신바람을 내며 보도하고 있습니다. 사생결단의 모습입니다. 반면, 한겨례, 경향신문을 보면 현직 검찰총장의 장모 사건에 대하여 역시 보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똑같이 사생결단의 자세입니다. 해서 근래에 저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보도되는 정치 이야기에는 아예 눈을 돌리는 실정입니다. 문제는 교회마저도 이런 편 가르기에 편승하고 있는 것 같아 아프기 그지없습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김기석 목사의 글에 이런 갈파가 눈에 띄었습니다. “종교는 나누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선을 없앰으로써 궁극적인 ‘하나’에 도달하도록 하는데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김기석,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청림,p,210.)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겨서는 안 됩니다. 져야 합니다. 아니 이길 수 있는 대상에게 져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로 연합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적대자들을 향하여 좁아진 너희 마음을 열어라 그리하면 나도 열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반대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마음을 먼저 넓히라고 독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교회 형제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다. 내가 너희들을 뜨거운 심장을 갖고 사랑하며 품기를 원한다고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바울이 져주었습니다. 그런 뒤에 그들을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품은 심장으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을 안았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ccm 보컬 팀이 불렀던 복음성가 중에 이런 곡이 있었습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 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길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 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옹졸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 줄 순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순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 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 할 수 없는 이맘을 주님께 맡긴 체로 이 찬양의 가사가 오래된 찬양의 가사이지만 다시 한 번 우리 세인 지체들이 돌이키는 우리들의 진정한 신앙의 고백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들이 곱씹어야 하는 가사와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프랑스 폴발레리 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피에르쌍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바로 너를 위해 그처럼 핏방울을 흘리셨다고 한 파스칼의 말을 사랑한다. 이 경우에 그리스도는 바로 나, 나 하나만을 위해 그토록 가슴 아파하셨다는 것이고 바로 나만을 위해서라고 들리기 때문이다.”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현대신서,p,59.)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주님은 나에게 지셨습니다. 주님은 나 하나만 이 땅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셔서 나에게 져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지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일체의 이기는 삶의 전제가 지는 삶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믿는 목사입니다. 바울이 오늘 고린도교회의 지체들에게 져주었던 것처럼 우리도 지는 삶을 훈련하고 연습하십시다. 왜? 그래야 진짜 이기기 때문입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