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욥기 42:10-17
제목 : 욥기를 나가며
서론)
먼저 우리 세인 교회 교우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들의 로망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로마서를 정복하는 것이고, 구약성경은 욥기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욥기는 목사들에게 거대한 담과 같은 책이기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많은 목회자들이 기피하는 성서중에 하나입니다.
지난 약 2년 동안 교우들과 수요 예배 시간에 욥기를 공부했습니다.
강해하는 중에 친구 목사 한명이 이렇게 접근 불가의 성서를 치열하게 공부했는데 그걸 주일 낮 설교 시간에 써먹어야지 하필이면 성도들이 별로 나오지 않는 수요 예배 시간에 사용하느냐고 농을 던지기도 했지만 기실, 욥기는 초신자, 기신자가 다 있는 주일 예배 설교 시간에 선포하기에는 상당한 부담이 따르는 성서 챕터이기에 오히려 이미 신앙의 연륜이 있는 교우들이 참석하는 수요일이 설교자에게는 덜 부담이 되겠다 싶어 잔꾀(?)를 부린 것이 사실입니다.
여하튼 그렇게 달려온 욥기 강해를 오늘 설교 통해 마감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여러 감회가 밀려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감사의 감회는 가뜩이나 어려운 본문인 욥기를 더 어렵게 강해한다는 이유로 설교한 담임목사의 설교를 포기든, 집중이든 들어준 성도들이었기에 감사하고, 그러기에 수요 설교를 통해 욥기 여행을 함께 한 여러분들은 성자입니다.
이제 저는 본문을 해석함으로 욥기 강해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고 합니다.
본론)
이렇게 시작합니다.
본문에 제시된 에필로그의 내용을 보면서 설교자로서 충만한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께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힘들었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왜?
본문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대단히 은혜롭게 해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욥이 드디어 심각한 고난을 당했지만 아주 은혜롭게 그 고난을 믿음으로 이겼기에 하나님께서 갑절의 복을 주셨다고 해석합니다.
이렇게 해석을 해야 교회라는 현장에 무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마지막 강해 시간이니까 속에 있는 말을 조금 토로하겠습니다.
본문 11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이 구절이 주는 정보가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욥의 사회적 관계의 회복을 저자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병들고, 재산도 거덜 난 욥을 보고 떠났던 이웃들과 지인들이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욥이 갖고 있었던 육체적 질병에서의 치유함을 전제하는 것이며, 동시에 케쉬타 즉 당시 상거래를 할 때 계수되던 은 한 개와 금 고리 하나를 주었으니 다시 경제적인 부도 회복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동시에 욥의 집에서 같이 음식을 먹었다는 보고는 그가 지니고 있었던 사회적인 입지의 회복도 분명히 저자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욥기 저자는 본문 10, 12절에서 이렇게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0절)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12절)
저는 10-12절은 큰마음을 먹고 저자의 의도에 동의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도무지 욥기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이 대목은 아무리 은혜롭게 해석을 하고 싶어도 동의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이 부분입니다.
본문 13-15절입니다.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상당수 많은 신자들이 이 구절에 아무 생각 없이 아멘을 남발하는데 너무 무책임한 처사이고, 또 그렇게 아멘을 요구하는 설교자가 있으면 저는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13-15절을 주석하겠습니다.
7남 3녀를 다시 욥이 얻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아마도 잃어버린 7남 3녀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욥기의 편집자나 저자가 이렇게 기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면 저는 적어도 이 부분에서 대단히 유감스럽고, 분노스럽다는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그만 더 나아가 보십시다.
욥의 딸들의 이름을 분석하겠습니다.
여미마는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긋시아(카시아)는 향수의 일종입니다.
게렌합북은 눈 화장에 쓰이는 검은 파우더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종합해 보면 이 이름들은 여성의 성적 매력을 극대화하는 데 사용되던 도구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만에 하나 이런 차원으로의 접근 때문에 욥의 딸들의 이름을 부각시켰다면 편집자 혹은 저자의 결정적인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욥기가 정경 안으로 들어와 있기에 편집자나 저자를 함부로 폄훼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가의 축복을 강조하기 위해 욥이 다시 얻은 딸의 이름들을 이렇게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면 편집자나 저자는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에서 저는 물러서고 싶지 않습니다.
동시에 저는 이 점이 욥이 고난을 통과했기에 받은 복이라는 관점의 해석에 정반대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임도 밝히고 싶습니다.
본문 15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전반절에 있는 기록은 앞에서 설명한 이유 때문에 제게 은혜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은혜를 깎아먹는 구절이 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반면 후반절은 의미가 있어 보이는 구절로 동의합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보편적인 법은 우리나라 조선조 시대처럼 여성에게는 상속권이 없는 철저한 가부장적이자, 장자 우선적 체계였습니다.
그럼으로 차자에게 재산이 유산으로 물려지거나 하는 일은 야곱의 케이스와 같이 불법적이지 않은 이상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견고한 체계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룻을 아내로 받아들이려고 했던 보아스 역시 룻을 사랑한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자기 아내로 들인 것이 아니라 기업 무를 선임자에게 먼저 의향을 물을 만큼 철저한 위계 공동체였습니다.
해서 딸에게 기업이 이어지는 경우는 성경에 단 한 번 민수기 26장에 나오는 므낫세의 후손 중에 헤벨이 아들이 없이 딸만 남겨두고 자연사를 했기에 기업을 이어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 때 슬로브핫의 딸들이 모세에게 불평등을 직고했고, 하나님께서 슬로브핫의 딸들의 손을 들어주신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성에게 기업을 잇게 한 적이 없을 만큼 철저했던 것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사회적 구조였던 것을 비추어 볼 때 본문에서 욥의 딸들에게 기업을 아들처럼 주었다는 기록은 긍정적 파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마지막 16-17절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여러분은 이 구절을 만나셨는데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엄지 척을 위쪽으로 쳐드는 분들은 아마도 이런 이유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이 그동안 당신이 허락하신 시험을 잘 이기고, 고난을 승화시킨 그 공로를 인정하여 욥에게 장수의 복을 주셨으며, 자손만대에 복을 보게 하셨고, 자연사를 하게 하심으로 그를 위로하셨다는 전통적인 해석에 아멘 한 결과일 것입니다.
뭐, 그렇게 은혜로 접근하면 또 그럴 수도 있겠다고 넓은 마음으로 저 역시 보듬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르쳐온 목사나 신학자들로 인한 것이니 여러분을 탓할 수 없기에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16-17절을 아무리 읽어도 엄지 척을 위쪽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강덕 목사의 신앙적, 신학적 양심고백입니다.
도리어 엄지 아래 척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담임목사의 반골기질 때문입니까?
그건 너무 나간 것이고요, 저는 성경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양보해 읽어도 이 구절을 은혜로 읽을 수가 없고, 도리어 아픔을 읽게 됩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아주 오래전, 거의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손아래 처남이 갑작스런 심정지로 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7살 아들과 8살 먹은 딸이 아빠의 죽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그 어리고 어린 나이에 아무 것도 모르고 장례식장에서 상주 복으로 갈아입을 때, 장모님은 실신하셨고 아내 역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이제 막 30대가 된 생떼 같은 아들과 동생을 먼저 보내야 하는 그 무너지는 아픔과 기가 막힘을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아내도 기일이 올 때마다, 또 어느 추억이 되살아날 때마다 남동생의 그리움을 피맺힌 아쉬움으로 담는 것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남동생과 1촌이라서 그런지 또 잊을 때는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장모님이 3년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들을 먼저 잃으신 장모님은 하나님이 부르신 그 날까지 단 하루도 막내아들을 가슴에서 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단 하루도. 왜요? 의도적인 붙듦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건 의도적인 붙듦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적 붙듦이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시쳇말로 우리기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남기는 불효 중에 불효는 부모보다 먼저 떠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별은 너무 힘든 과정임을 학자들이 주장합니다.
신학교 학부 시절, 목회학을 공부할 때 교재가 웨인 오츠가 쓴 ‘기독교 목회학’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책에서 밝힙니다.
“사별은 충격의 단계를 지나, 모든 감정을 무디게 하고, 마침내 사랑하는 자의 죽음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일어났던 사건을 생각하면서 거의 이식을 잃은 성태에서 공상하기 시작하고 슬픔의 홍수처럼 폭발하다가 새로운 정신적인 병으로 번진다.”(웨인 오츠, “기독교 목회학”, 생명의 말씀사, 1982,p,21.)
100번, 1,000번 동의합니다.
욥이 졸지에 7남 3녀를 잃었습니다.
그것도 한 날에.
자식들의 기일은 한 날이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욥은 잃어버린 7남 3녀에 해당하는 자녀들을 다시 얻었다고 했습니다.
보너스로 후에 얻은 딸들은 미스 우스에 해당할 정도로 미녀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보상됩니까?
이미 잃어버려 앞서 떠나보낸 7남 3녀들은 말끔히 잊어집니까?
만에 하나 욥이 그랬다면 그는 인간이 아닙니다.
짐승만도 못한 괴물이지.
어떻게 졸지에 죽은 자녀를 잊습니까?
욥이 몇 년을 살았다고 했습니까?
140년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140년 동안 매일 어느 같은 날 죽은 자녀들을 위해 추도 예배를 드렸을 욥, 장수가 복입니까?
적어도 욥이 살았던 140년은 어쩌면 지옥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 멀리 가지 않고 설교자인 제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만에 하나, 제가 욥이라면 저는 지옥을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본문 16-17절을 제게 레마로 적용하겠습니다.
저는 16-17절이 이렇게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주신 복이 아니라, 욥은 자기의 생명을 거두시지 않고 140년을 살게 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접근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살았다고.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교수로 있는 권지성 박사는 욥기의 에필로그인 본문을 아주 애써 보편적인 해석을 남기려고 노력한 모습으로 갈무리했습니다.
“욥은 악인과 의인이 공평한 처분을 받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정의의 원리는 실제로 작동 불능 상태였다. 욥의 질문은 더 나은 삶을 위한 도덕적 질서의 개선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세계 질서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세게 질서에 대한 설계도 속에서 모든 것이 완전하고 조화롭게 작동되고 있다고 대답하셨다. (중략) 에필로그는 창조와 연계된 거대 담화에서 한 개인의 친구, 가족, 자녀와 후손, 그리고 노년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이제 욥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현재라는 삶의 선물을 누리는 것일지 모른다. 욥은 가끔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던 처참한 과거를 떠올릴 것이며, 자녀들의 죽음을 겪은 부모로서의 상처와 자신의 몸에 남아 있는 질병의 흔적에 눈물지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여호와의 정의에 대한 질문을 묻어두고 일상에서 얻는 삶의 기쁨에 대해 묵상할지 모른다.” (권지성, “특강 욥기”, IVP, pp,348-349)
권 박사의 글을 읽고 난 뒤에 곧바로 차준희 교수에게 전화를 넣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욥기가 정경 안에 들어와 있는데 권 박사의 논리로 결론을 맺으려니까 너무 진보적이고, 냉소적인 비판으로 욥기 강해를 마감하는 것 같아 그래도 중도적인 은혜를 추구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친구의 생각이 듣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친구 역시, 욥기 결론이 매우 유감스럽다는 느낌을 전해 주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앞서 있는 욥기가 운문체로 기록된 것에 반해 산문체로 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이 부분은 분명히 4-37장까지의 욥기 저자 혹은 및 편집자가 기록했던 그 동안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또 다른 제 삼의 편집자가 이 대목을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얼토당토하지 않은 생뚱맞은 결어를 첨가했을 것이라고 부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친구는 중도적인 신학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가 최근에 보았던 욥기를 결론 맺기에 나름 적합한 해석 하나를 제게 소개해 주었는데 저 역시 마음이 동해 인용하면서 욥기 강해의 대단원의 막을 내려고 합니다.
“욥이 원래대로 되돌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호소하여 주님의 자비로운 현존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내리는 의의 축복의 표지다.” (암브로지오 스쁘레아피꼬, “욥기의 희망 수업”, 생활성서 간,p,253)
이렇게 갈파한 저자는 오늘 우리가 본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조금 더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욥의 재산이 다시 회복된다고 이야기하는 맺음말도 실제로는 책 전체에서 욥이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에게 충실한 사람을 재물로도 축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논리적 결론이다.”(위의 책,p,12)
이 정도면 욥기 해석에 대한 결론 부분의 중도적 해석의 의견 일치를 친구는 동의한 것 같습니다,
욥기 해석을 한쪽으로 몰고 가지 않으려는 균형적인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부분적인 동의를 표하면서 이제 결론적으로 설교자인 이강덕 목사의 욥기 해석의 총 결론을 남겨보려고 합니다.
※ 성경적인 일체의 교훈들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지 말고, 하나님의 실존적 영역이라는 여백을 존중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교훈으로 욥기의 결론을 맺고 싶습니다.
욥기 연구를 시작하면서 민영진 박사의 충고를 소개했습니다.
복기하겠습니다.
“욥기의 주제를 무고한 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이라고 못 박는 것은 다의적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에 굴레를 씌우는 일입니다.” (김기석, “아, 욥”, 꽃자리 간, p,33.)
민 박사께서 도전하신 이 글의 끝에 너무도 가슴에 와 닿는 또 한 마디를 후배들과 독자들에게 남겼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정답 없는 삶을 살아갈 용기가 있느냐를 묻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의 책 같은 페이지)
기가 막힌 성찰입니다.
저는 목사로 살아오면서 정답이신 하나님, 해답이신 하나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며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하나님께서 제게 언제나 100%의 답을 제시하시면서 저를 위로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고 최정희, 서정수 집사를 데려가실 때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께 삿대질하고, 대들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그 동안 살폈던 욥과 아주 흡사한 저를 수도 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음은 제게는 적어도 지금도 마침표가 아니고 쉼표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답이신 것을 믿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내게 정답으로 오신 것은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왜 저는 여전히 그런 주님이 제게 주군이시라고 고백합니까?
교우들이 이해하실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이해될 수 없는 존재이시기에 제게는 주군이십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이라는 실존적인 주군께서 그 분의 전부를 하나도 예외 없이 제게 계시하셨다면 저는 그 하나님을 믿을 것 같지 않습니다.
신비의 여백이 없는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대책 없는 부흥사들은 쌍팔년도에 지성을 내팽개쳤습니다.
무조건 믿는 믿음이 최고의 믿음이라고 다그쳤습니다.
아마도 오늘의 내 사랑하는 조국교화의 비극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위험한 일은 성경에 기록된 일체의 사건과 담론들을 미화시키는 행위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상식이 아닌 차원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이라는 무소불위의 절대성으로 이해조차 안 되는 것을 이해되는 것으로 몰아붙이는 무리수를 두는 경우들이 허다했습니다.
말라기 3:10절의 십일조 해석에 있어서 ‘온전한’ 이라는 단어를 축자식으로 해석한 것도 그렇고, 빌립보서 4:13절의 해석을 막 사는 자까지 외연을 확대한 것도 그렇고, 요삼 1:3절의 소위 말하는 삼박자 축복의 전혀 신학적이지 않는 무대뽀식의 갖다 붙이기도 그렇습니다.
무조건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도록 유도했고, 유도당한 것이 바로 오늘의 한국교회의 아픔입니다.
성경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억지춘향으로 내게 유리하게 해석하라고 준 말씀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신비의 영역, 그리고 우리들이 갖고 있는 나약함의 영역을 인정하는 여백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욥에게 주어진 본문은 명확한 이해를 위해 주어진 텍스트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주군에 대한 신비의 여백으로 남겨두는 것이 정직하며 솔직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욥기 강해를 마감하려고 합니다.
욥은 욥일 뿐입니다.
욥이 걸었던 길을 자꾸만 나에게 유리하게 해석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자꾸만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내게 말도 안 되는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지 마십시다.
하나님만이 갖고 계시는 일하심의 여백을 존중하십시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여러분들은 성자입니다.
이 어려운 욥기를 더 어렵게 설교하는 담임목사의 설교를 그것도 수요일 저녁이라는 잊혀진 예배 시간에 나오셔서 경청해 주셨으니 말입니다.
다만 한 가지, 욥기를 마치며, 설교자의 주관이라 이해하시고 이렇게 다짐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욥기 여행을 마치며, 그래도 이 책에서만큼은 욥이 몸부림쳤던 그 치열함에 박수를 보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