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일 수요 예배 설교 (욥기 91번째 강해) 본문 : 욥기 42:7-9 제목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론)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설교자에 정말 중요한 기본적 자세는 신학적인 확신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 전통적인 욥에게서 느끼는 향수는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 견디기 어려운 시험을 당했지만 믿음으로 잘 이겨낸 신앙의 사람, 의인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성경의 대표적인 실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했지만 그 고난의 끝자락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믿음을 지켜 배가의 복을 얻은 모델링 등등입니다. 물론 이런 전통적인 욥에 대한 인상이 전부다 틀렸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욥을 통해 분명히 평범한 우리들과 같은 신앙관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함이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부인할 수 없는 위대한 점이 있는 신앙의 선배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90번에 걸친 강해 설교를 통해 욥에게도 분명한 허점이 있었고, 우리들이 우상화할 만큼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음도 살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참지 않고 토로한 자였고, 자신에게 공격하는 세 친구에 대하여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자기를 방어한 자였으며, 하나님께서 현현하셔서 욥이 변론한 것에 대하여 그가 어떤 부분에서 허점이 있었던 자였는지를 조명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들었던 당돌한 부분이 있었던 자였음을 저는 우리 교우들에게 전해왔습니다. 동시에 이런 욥에 대하여 설교자인 저는 욥이 그러했기에 불경건한 자라고 낙인을 찍으려하지 않고 도리어 욥 역시 우리와 별반 다름이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조명하는데 노력했습니다. 전통적인 측면에서 욥은 죄가 없는 완벽한 존재였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는 쪽으로 흐르지만, 저는 욥이 갖고 있었던 나약성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들추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욥은 우상이 될 만큼 존경스럽고 완벽한 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말입니다. 반면, 언제나 죄인처럼 공격 받고, 무슨 말을 해도 공격을 위한 공격이고, 반대를 위한 반대자들이었다고 이미 우리들의 뇌에 학습되어 있었던 그의 세 친구들과 젊은 변사 엘리후에 대하여 나누면서 오히려 이 네 명의 주변 인물들에게 주홍글씨처럼 레테르가 붙어 있는 나쁜 사람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기존의 해석에 대해서도 일견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설교자인 저는 노력해왔습니다. 오히려 세 친구의 변론과 엘리후의 이야기 중에는 상당히 욥보다 더 뛰어난 안목을 갖고 그에게 권했던 내용들도 부분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물론 이들 역시 허점이 많은 연약한 존재들임을 간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만 무조건적으로 매도되던 그들을 방어하려고 노력했다는 점도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달려온 것이 지난 90번까지의 욥기 여행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은 이렇게 치열하게 달려온 욥기의 최종적인 결론 부분인데 그 결론을 내린 존재가 욥과 세 친구, 그리고 엘리후에게 내린 결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린 결론이라는 점에서 오늘 설교의 주요한 포인트를 갖고 싶습니다. 본론) 하나님께서 욥에게 내리신 최종적인 지론을 38-41장까지에서 보았습니다. 조금 장구한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시면서 욥이 갖고 있었던 허접했던 그의 신학과 신앙에 대한 변론에 대하여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조금의 빈틈이 없이 38-39장에서는 창조주로서의 권위를 동원하셔서 욥의 생각의 허접함을 바로 잡으셨습니다. 동시에 40-41장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욥이 도무지 대항하여 이길 수 없는 전설적인 동물(베레못과 리워야단)들의 강함을 예로 드시면서 욥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심으로 그가 세 친구들과 엘리후의 공격에 반론했던 4-37장까지의 치열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으셨음을 살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욥이 하나님의 이런 최종적인 결론 맺으심의 텍스트였던 38-41장의 조명하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는 수요일에 보았던 42:1-6절에서 욥이 부분적인 동의를 했지 완벽하게 아멘하지 않은 비진정성을 보시고 행하셨던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한 본문입니다. 제일 먼저 만나볼 내용은 본문 7절입니다. 초점을 욥에게 두시지 않고 세 친구들을 향하신 하나님을 주목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욥과의 대화를 마친 뒤에 그의 세 친구 중 가장 연장자였던 엘리바스에게 아주 단호하게 당신의 뜻을 전하신 내용입니다. 내용은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몰아세웠던 내용에 대하여 분노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센 친구에게 분노하셨는지도 본문이 아주 친절하게 안내해 줍니다. 세 친구들의 변론이 틀렸기 때문임을 그 이유로 대셨습니다. 그 동안의 치열한 논쟁을 정리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대목입니다. 호서대학교의 안근조 박사는 세 명의 친구들이 걸어왔던 잘못된 방향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는데 깔끔했습니다. “엘리바스는 권위로 욥을 짓눌렀고, 빌닷은 죽은 욥의 자녀들은 죄 때문에 죽었다고 몰아세우며 노골적으로 정죄했으며, 소발은 악인이 멸망할 때 받을 모든 분깃을 욥에게 돌렸다.” (안근조, “그 말씀 2007, 6월호”,p,92.) 다시 정리하자면 욥의 세 친구들의 신학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 본문에서 하나님은 엘리바스를 불러서 너희들이 주장했던 내용에 대하여 내가 화가 난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설교자인 저 역시 세 명의 친구들이 역설했던 욥에 대한 반론을 연구할 때, 세 친구들이 말하는 인과응보의 신학에 대하여 논설하면서 분명히 한 것이 있었습니다. 세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같은 마음을 품은 것처럼 욥에게 임한 인과응보적인 책임론이 대상이 욥이 아니었고, 일반적인 사람이 대상이었다면 훨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지만 그 인과응보의 신학을 욥기에서 욥에게 적용한 것을 무리수임을 지적했던 점이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문 7절에서 세 친구의 말보다 욥의 말이 옳았다고 표현하신 하나님의 일갈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세 친구들이 주장했던 담론에 대하여 틀렸음을 분명히 하신 셈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로 이 대목에서 정말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음을 교우들은 간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욥의 한판승인가? 에 대한 해석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이 욥의 편에 서신 이유를 분명히 캐치해야 합니다. 기독 느헤미야 연구원 교수인 권지성 박사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여기에서 ‘욥의 말이 옳다’는 것은 창조 세계의 전체 그림에 대해 여호와께 지적 받은 그의 몰이해가 아니다. 개인의 고통의 문제와 인과응보 원리의 허위에 대한 욥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고, 욥의 세 친구는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했다는 것이다.”(권지성, “특강 욥기”, IVP,p,340.) 잘못하면 우리가 착각할 수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욥이 4-37장에 이르기까지 친구들에게 답변하고, 반론했던 것이 옳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욥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단지 세 친구들이 접근했던 그릇된 논리 주장에 대하여 올바로 세우기 위해 욥의 손을 들어주셨다는 결론이라는 말입니다. 해서 하나님이 어떤 명령을 친구들과 욥에 내리셨습니까? 본문 8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먼저는 친구들에게 내린 하명입니다. 7마리의 수소와 7마리의 숫양을 잡아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대단히 중요한 명령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7마리의 숫양과 수소를 제물로 드렸던 제사 행위는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할 때 행했던 의식(민수기 23:1,29)이나, 여호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과정에 드렸던 과정에서 드려졌던 제물이었고, (역대상 15:26), 히스기야가 성전을 정화할 때 드렸던 제물의 수입니다. (역대하 29:21)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속죄 제물이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욥의 세 친구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신 제사의 성격은 속죄제라는 점에서 그 무게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 하나 본문에서 발견하는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습니다. 세 명에게 번제를 대신 드려줄 제사장의 역할을 욥에게 맡기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세 친구들에게는 대단히 치욕스러운 일이었을 것이지만, 반면 욥에게 이렇게 통쾌한 복수(?)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복수라는 말에 여운을 남긴 이유가 있습니다. 욥은 이 기회를 그동안 친구들에게 당한 수모와 치욕에 대하여 복수하는 마음으로 번제를 대신 드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이 친구들에게 비굴하게 주눅 들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 때문입니다. 도리어 욥은 친구들이 드리는 번제를 하나님께 올리면서 친구들을 위한 진정한 제사장이자 중보자가 되어줌으로 화해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세 친구들에게 알려줍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욥과 세 친구들의 관계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서로를 위한 win-win 정책을 펼치신 것 같다는 뉘앙스를 진하게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명령하시자 친구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본문 9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해피엔딩입니다. 세 친구들의 순종은 말할 것도 없이 욥도 순종한 것이 분명합니다. 왜요? 본문 9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이 욥을 기쁘게 받았다고 묘사하고 있기에 그렇게 확신해도 됩니다. 자, 여기까지가 오늘 설교 텍스트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제 담임목사의 본문 이해를 위한 설명을 들으셨으니 이렇게 오늘 설교의 감동적인 레마로 설정해 보면 어떨까요? ※ 하나님은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편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교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 텍스트는 불과 3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무려 4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하나님께서 욥을 호칭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as my servant’ (나의 종으로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종’ 즉 ‘에베드’라는 단어는 경우에 따라 인권이 말살되는 물건 같은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어진 3절에서 무려 4번이나 등장하는 ‘에베드’는 결코 인권을 무시당하는 자로서의 노예 혹은 종이 아닙니다. 도리어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는 존재로서의 의미가 더 가깝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너무나 아끼고 신뢰했던 종 엘리에셀과 같은 의미입니다. 저는 주님이 호칭하신 이 단어가 4번에 걸쳐 연속해서 나오는 것을 보면 문득 떠올랐던 연상된 구절이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으로 올라가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허락하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사탄이 그의 재산과 자녀들을 몰살시키는 시험을 허락했는데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탄의 일차 시험이 끝나자 하늘의 천상회의가 다시 열렸습니다. 사탄이 붉으락푸르락 할 때, 하나님이 사탄에게 하셨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욥기 2:3절을 회상해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하나님은 처음 욥에 대하여 이런 신뢰와 확신을 갖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하나님은 욥이 내 종이라는 확신을 버리시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욥기 중간 중간에 대들고 핏대를 세우며 하나님께 항의한 욥이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매일반으로 하나님은 욥에 대한 신뢰를 갖고 계셨다는 점에서 영적 감동이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제게 임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누차 계속해서 세 친구들에게 욥과 하나님과의 관계적 정체성을 4번이나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아, 욥은 내 종이란다.” 이 글을 쓰는데 저는 원고를 타이핑하며 울컥하는 감동이 스며들었습니다. 91번 강해를 하는 동안, 욥은 하나님께 이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태도가 아름답지 못했음을 여러 차례 지적했습니다. 하나님께 삿대질하고, 하나님께 대들고, 하나님에 대하여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던 그의 불완전한 인간의 죗성과 자아를 욥에게서 보았습니다. 세 친구들과 엘리후에 비해 인과응보라는 잘못된 접근을 한 것을 제외한다면 그리 별로 잘한 것이 없어 보인 욥이라고 저는 단언해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욥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이런 편파적인 기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고 이해해야 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궁색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인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의 혜택을 받은 자가 바로 욥이라는 감동 말입니다. 여기에 서서 설교를 하는 이 목사나, 지금 인터넷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교우들이나 공히 부인할 수 없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도 욥이 받은 은혜를 동일하게 받은 자라는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불완전한 것투성이며, 언제나 죗성으로 허물어지는 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랑하는 종이라고 부르시고 인 쳐주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언제나 인과관계로 이해하고 머리 굴리며 접근하지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우리를 당신의 이해타산의 계산대 위에 올려놓으신 적이 없이 대우하신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왜 이리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완전한 자이기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눈물, 콧물 흘리며 드렸던 찬양 가사 중에 이런 곡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찬송가 310장 1절 가사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지지해 줍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날 알 수 없도다” 진짜로 마음으로 아멘하십니까? 내가 은혜를 받은 만 한 자가 아니라는 점을. 도리어 나는 하나님께 쓸데없는 자라는 것을. 그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완벽해서 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가 주님을 위해 분명한 신앙의 정답을 매일 맞히며 살아가는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에 날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나’는 불완전한 나이고, 허접한 것이 전부인 ‘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내 편에서 떠나지 않으시고 나를 응원하신다는 점에서 오늘 나는 욥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욥과 같은 나는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길에서 이탈되지 않게 하시는 참 좋으신 주군이신 하나님을 붙들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20세기 최고의 변증학자 CS. 루이스는 그의 걸작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그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자신을 더 많이 보여 주시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편애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과 됨됨이가 온통 잘못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자신을 보여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007년,p,255.)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욥이 옳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욥은 불완전했습니다. 그런데도 욥의 손을 들어주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하나님의 편애 때문이었습니다. 어디 욥뿐이겠습니까? 도저히 당신을 보여줄 수 없는 그릇됨의 극치인 저와 여러분을 편애하셨기에 우리들 편이 되어 주셨고 또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주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주 수요일에 욥기 강해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 최종적으로 결론을 맺겠지만 욥기의 주인공은 욥이 아닙니다. 욥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명심하십시오. 나도 불완전한 것의 극치였던 욥이었습니다. 욥를 편파적으로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런 나를 편애하시며 사랑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는 우리가 되는 것이 욥기 공부를 치열하게 해 온 세인 지체들의 결과물이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한 번 찬양을 드리며 설교를 맺고 싶습니다. 마음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마음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마음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주님 내게 먼저 오사 내 맘을 만지고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주님 앞에 나아올 수 없을 때 주님 날 먼저 안으시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사랑하시는 내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모든 걸 덮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안아주시는 내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라 부르죠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