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12:12-13
제목: 길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
서론)
“그가 기적도 행하지 못하고 메시아도 아니란 걸 알게 되자 갈릴리 민중들은 실망하며 그한테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혁명당 패거리도 아무 쓸모가 없는 목수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갈릴리 랍비와 바리새인들은 이 사나이가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다며 비난의 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그는 이 나라 백성이 엄격하게 지키는 안식일을 무시하는 듯 일을 하면 안 되는 그날도 병자와 노인들을 찾아 다녔다. 그 결과 회당에서 쫓겨났고, 나사렛 가족들한테서도 정신병자라는 의심을 받았으며, 한때는 삼사십 명에 이르던 제자들도 거의 떠나버린 형편이었다.”(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바오로딸, 161-162.)
일본이 낳은 걸출한 가톨릭 소설가인 엔도 슈사쿠의 한 소설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엔도가 ‘사해 부근에서’ 나타내고자 했던 예수는 기적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시무시한 권능을 행하는 능력자가 아니었습니다.
엔도가 그리고자 했던 예수는 너무 무기력한 예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엔도는 이단아일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엔도가 ‘사해 부근에서’에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예수는 ‘신앙적 그리스도’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 예수’였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역사적 예수’만을 이야기하는 진보주의적인 교회의 치우침에 대해 반대합니다.
오히려 제 정체성은 신앙적 그리스도에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예수를 진술하면서 진보적인 교회가 말하고 강조하는 ‘예수의 삶’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배격하거나 반대하지 않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접근할 때, 저는 예수의 삶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바로 소개한 이런 대목입니다.
갈릴리에 거주하면서 로마 권력과 헤롯 권력에 압제를 당하며 이중 고통에 허덕이던 민초들과 함께 하며, 그들 옆에서 위로자가 되어주고, 길벗이 되어주려고 했던 예수님의 삶 말입니다.
그런 삶을 사셨던 분이 저와 여러분의 그리스도이시자 주군이십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자신을 위한 길이 아닌, 하나님 백성들을 위한 길을 내신 분입니다.
직접 그 길을 닦고 만들어내신 분입니다.
그러한 삶을 사셨기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담대히 선언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길이다.” (요 14:6)
그렇다면 주님이 걸으신 길은 어떤 길일까요?
나는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천명한 한 단어로 그 답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곧은길(straight way)’이었습니다.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곧은길을 걸으신 분이 아니라 곧은길을 만들어내 걸으신 분이라는 점입니다.
본론)
본문을 곱씹으며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브리서 저자가 이렇게 독자들에게 전한 본문 정황을 먼저 살펴보십시다.
본문은 히브리서 저자의 독창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12절의 出典은 이사야 35:3절이고, 13절은 잠언 4:26절이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구약 성경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사야 35:3절입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잠언 4:26절입니다.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이 구약성경을 인용한 히브리서 저자는 12:1절에서 표현한 그대로 성도는 믿음의 경주를 하는 자들인데, 그 경주하는 자가 꾸불꾸불한 길을 뛰어서야 좋은 성적을 거두겠느냐는 부가의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그런 경주를 하는 선수는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본문에서 강하게 역설한 셈입니다.
천로역정의 길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올바르게 펴서 뛰고 걸어야 하며, 만에 하나 다리를 저는 일이 있으면 그 다리도 고치고, 더불어 뛰기 좋은 곧은길을 반드시 만들어 뛰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경주하는 자가 승리하기 위해 전제로 해야 하는 곧은길이 무엇인지는 다음 주일에 교우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주일에 교우들과 심도 있게 나누려고 하는 것은 길을 만들기 위한 당위(當爲)입니다.
※ 곧은길을 만들려면 편안한 길 만들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6:45-46절을 귀담아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이 구절은 예수께서 벳세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이후, 제자들에게 내리신 후속 담화입니다.
두 단어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재촉하사’와 ‘작별하신’이라는 단어입니다.
전자는 제자들에게 내리신 추상같은 명령이었고, 후자는 본인에게 던진 채찍입니다.
오병이어의 축제가 끝이 나자 주님을 제외한 모든 벳세다 빈들에 있었던 사람들은 사뭇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 흥분은 주님의 제자들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벳세다의 분위기는 정치적인 일변도로 흘러가는 추세였습니다.
어떤 정치적인 면이었을까요?
이 대목을 요한복음 6:15절에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 축제의 병행구절이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벳세다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엄청난 영향력을 제시하신 예수님의 행보는 이제 결과론적으로 유대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되는 막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벳세다의 빈들에 모여든 사람들의 상당수는 예수께서 주변 지역에서 행하셨던 수많은 기적의 모습을 눈으로 본 사람들과 또 그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은 주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정치적인 메시아일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던 바 오병이어의 기적을 눈으로 보면서 그들은 확신하기에 이릅니다.
이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옹립하게 되면 지긋지긋한 정치적인 노예의 굴레에서 해방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차서 주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주님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강제적인 움직임들이 있었음을 요한이 보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다음의 단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억지로 붙들어'
여기에 억지로 '붙들다.'의 의미로 번역된 헬라어 '할파조‘는 그냥 붙드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가지고 붙들다'는 의미입니다.
목적을 갖고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벳세다의 사람들의 의도가 불순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제자들의 태도입니다.
주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기고 강제적으로 왕으로 옹립하려는 벳세다 민초들의 태도에 대하여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소개한 마가복음 6:45절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주님은 제자들을 종용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축제로 인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던 벳세다의 빈들에 거하고 있던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 벳세다로 가라고 명령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명령의 강도는 아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더 솔직한 말로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있으면 예수님이 왕으로 추대될 것이고 왕으로 추대되는 주님으로 인하여 적어도 제자들 역시 내각에 각료 정도로는 임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모를 리가 없습니다.
정치적인 출세의 가도를 달릴 수 있다고 믿으면서 벳세다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그 벳세다를 떠날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단어의 함축적인 단어가 '재촉하사'입니다.
원어 성경에 기록된 '재촉하사'의 번역인 '아낭카조‘는 '강제로 무엇인가를 하도록 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적용하여 해석한다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곳을 억지로 떠나도록 강요하셨다는 말입니다.
벳세다에서 빠르게 떠날 것을 강제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의 단어에 집중해 보십시다.
제자들에게만 벳세다를 떠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더 적극적인 자세로 벳세다와 작별하셨습니다.
‘작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탓소마이’는 어떤 그룹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것’,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영어성경 NLT 번역이 정말로 통쾌합니다.
“After telling everyone good-bye”
“모든 사람들과 ‘good-bye’라고 말씀하신 뒤에”
주님이 결별하신 것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조금의 여지를 남겨두시지 않았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주님은 당신이 걸어야하는 올곧은 길을 만들어내기 위해 편안한 길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편안한 길도 가고 올곧은 길도 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의 길은 포기해야 합니다.
주님이 벳세다를 포기하시고 가신 곳을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산으로 홀로 가셨습니다.
이후 주님은 벳세다 건너편인 게네사렛으로 건너온 제자들과 합류하셔서 그곳에 있는 민초들을 돌보셨습니다.
마가복음 6:53-56절은 독자들인 우리에게 숙연한 감동을 줍니다.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째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주님은 화려했던 벳세다의 길을 포기하셨습니다.
동시에 산으로 올라가셔서 외롭게 홀로 기도하신 뒤에 게네사렛으로 내려오셔서 다시 아픔을 당하고 있는 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치료하시는 사역을 지속하셨습니다.
결국 편안하지 않은 길을 만들어내신 것입니다.
마크 뷰캐넌의 일침이 폐부를 찌릅니다.
“안전한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안전한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안전하지 않은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덩달아 좋아하시지도,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덩달아 싫어하시지도 않는다.”(마크 뷰캐넌, “열렬함”, 84.)
하나님이 이러신데 어찌 그리스도인들이 편안한 길을 사수한단 말입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를 하면서 안전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목회를 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쓴 소리도 해야 하는 경우, 부족하지만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심리학자들의 지론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나름 몸부림치며 사역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 또한 인간인지라 나이가 더 들어가면서 하나님은 안전하지 않으신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편안한 길을 만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이제는 편안하지 않은 것이 불편해 보여 가급적이면 부딪치지 않으려는 상업적인 마인드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낄 때 섬뜩해져 마음을 다잡이하곤 합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마크 부캐넌 목사가 동일한 책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에 최대의 관심을 갖고 계신다. 우리 심령이 집중하는 것, 저 깊은 곳에서 우리를 동요시키는 것, 우리를 절정에 이르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마크 뷰캐넌, “열렬함”, 81.)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을 해야 하는 것이 목사의 사명이라고 믿었기에 그의 글에 밑줄을 긋고 새겨왔습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자 교계는 두 목소리로 갈라져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번 참사를 보수적인 기독교 진영에서는 이태원이라는 장소의 반 기독교적인 영역에서 벌어진 악에 대한 심판의 성격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수적인 교회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합니다.)
반면, 진보적인 기독교 진영에서는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교회에 실망한 젊은이들이 자신의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찾은 곳이 이태원 할로윈 축제와 같은 것이었기에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하지 못해 결국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 몬 꼴이 된 것이므로 이 아픔이 일어나게 한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고 교회가 회개해야 한다고 비판합니다.
저 역시 현직 목사이다 보니 이 두 목소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지금은 무언가를 말할 때가 아니라 자중하고 침묵하며 유명을 달리한 우리의 아들딸들을 위해 아파하고 우는 자와 함께 하라고 말한 바울의 권면대로 함께 울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소리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닌 것을 자꾸만 인정하라는 작금의 사태에 맞물려 종용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기가 쉽지 않아 목사로서 저항하기로 했던 일이 있어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애도 기간의 어간, 한 젊은 드라마 작가 겸 소설가가 날린 일침이 일간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기사는 침묵해야 하겠다는 목사의 비겁한 양심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 젊은 소설가가 본인의 SNS(인스타그램)에서 이런 쓴 소리를 날렸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젊음을 즐기는 것이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도 꼰대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게 왜 거길 가?'앞뒤 꽉 막힌 소리를 내뱉는다. 2002년 꼰대들 당신의 젊음은 어땠나. 수천 만 명이 거리에 나왔던 시절에 거리에서 시원한 맥주를 즐기며 월드컵을 응원했던 당신들이 꼰대들이지 않나? 거리를 나간 것이 잘못이 아니다. 꼰대들의 주둥이는 훈수랍시고 떠들지 말길 바란다.”
이 글이 세간에 소개된 날이 10월 31일이었고 제가 읽은 날이 11월 1일이었습니다.
끙끙 앓다가 11월 2일 아침 묵상을 마치고 저의 묵상 노트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11월 2일 묵상말씀 아모스 5:16-17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누군가가 이렇게 한탄했다. 전 세계에서 합동 분향소가 제일 많이 차려진 나라가 대한민국이라고. 이 읍소를 듣고 있노라니 딱히 변명하거나 부인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울음을 울었던 나라가 이스라엘(?), 아니면 대한민국(?)이리라. 유대인들이 울어야 했던 울음을 아모스는 자업자득의 개념으로 해석했다. 하나님이 정하셨던 正路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심판이 울음이었기에. 진도 앞바다에서 터진 세월호의 울음이 전국을 강타한지 8년 만에 이번에는 대한민국의 심장부에서 터졌다. 둘 다 총체적인 난국의 기형아로 태어난 울음이다. 8년 전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마치 무정부적 난맥상이 여지없이 드러난 기형의 절정 모드가 보인다는 점에 매우 유감천만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경우에는 사사 시대를 능가하는 신 사사 시대의 랜덤이라 할 수 있는 막 살겠다는 좀비들의 모습까지 오버랩 되어 더 더욱 참담하다. 무언가를 말하면 꼰대들의 주둥이는 입 닥치라는 난장들에게 더 무엇을 기대하랴!
오래 전, 길벗이자 글벗인 동역자 선배 목사의 글에 인용된 송기숙 선생의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에 소개된 다섯 부류를 소개받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네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동네 어른, 늘 말썽만 부리거나 버릇없는 후레자식, 일삼아서 이 집, 저 집으로 말을 물어 나르는 입이 잰 여자, 틈만 있으면 우스갯소리로 사람들을 웃기는 익살꾼, 좀 모자란 半偏이라 몸이 부실한 장애인’ (김기석,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청림출판, 54.)
후레자식은 무슨 말을 해도 용인되어야 하고, 동네에서 존경받은 어른은 존재하지 말아야 함을 강요받는 시대야 말로 진짜 말세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이유 없이 죽어간 이들에 대해 비난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의 총체가 영적 랜덤이라는 집단적 광기라고 해석하는 다름에 대해 입 닥치라고 말하는 후레자식들의 버릇없음에 분노한다. 완전히 자기 신념이 우상화된 자들 때문에 나는 그냥 운다. 목사가 딱히 할 다른 시위(Demonstration)가 없기에 그렇다. 그렇게 아작 난 마비된 인격과 무슨 대화가 필요할까 싶어서다. 이래저래 작금의 대한민국 광장과 거리는 울음바다다. 그런데… 아모스가 말한 이 선언에 오금이 저려온다.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울음바다 한 복판으로 지나가시는 하나님, 그래서 나는 또 운다. 뜨겁고 뜨거운 서늘함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후레질 하는 버릇없는 이들에게 끝까지 훈수질 하는 꼰대로 남기로 결심했습니다.
목사가 인기에 영합하는 목양과 포플리즘에서 허덕이면 차라리 목사의 옷을 벗는 게 낫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전하는 것은 대단히 불편한 길입니다.
반면 훈수질을 그만두면 상당수의 대중들에게 존경받고 박수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주군은 대중적인 인기영합주의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안전한 산헤드린 공회와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편안했던 벳세다에서 올곧은 게네사렛으로 옮기셨습니다.
너무 어렵고 힘든 길을 만들어내신 뒤에 그 길을 가셨기에 주님은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요한복음 14: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말로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이 그 분을 바로 인식하지 못한다니 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인가!”(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누가 사람인가”, 144)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사탄은 올곧은 길을 만드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합니다.
올곧은 길을 만들어 걸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반면 편안한 길을 가려는 자에게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박수를 쳐줍니다.
그 갈에 서 있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에 눈감고 있기에 막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올곧은 길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저는 다리로 천로역정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나 주님과 함께
상한 맘을 드리며 주님 앞에 나가리
나의 의로움이 되신 주 그 이름 예수
나의 길이 되신 이름 예수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