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30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50) 본문: 히브리서 12:4-11 제목: 매를 맞더라도 서론) 고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이었기에 교사들이 사랑의 매라는 명목으로 폭력을 다반사로 휘두르던 것이 허용되는 시기였습니다. 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것이 너무 당연했던 시절이었기에 불합리한 매질이라도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예비고사가 있었던 시절에 과목으로 선택해야 하는 실과 수업이 있었는데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선택한 과목이 공업이었기에 공고에서 가르치던 선생님이 부임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당시 그 선생님의 연령은 30대 중반으로 기억합니다. 공업 수업이 1교시에 있었기에 이른 아침에 등교한 어느 날이었습니다. 담당 선생님이 그날 부부 싸움을 하고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떠드는 친구 한 명이 걸렸습니다. 50분 수업 시간 동안, 그 날 선생님은 40분 동안 친구에게 매 타작을 했습니다. 마포자루로 엉덩이 타작을 시작한 매질은 몽둥이로 머리를 치기까지도 했습니다. 그날 교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악마는 폭력 그 자체를 합법적으로 휘둘렀습니다. 그날 교단에 선 자는 스승이 아니라 폭력배였고, 깡패였고, 악마였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적인 감정을 담아서 교사들이 폭력을 가하던 행태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물리적인 도구와 기구를 동원하여 때리는 것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에 저 역시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말처럼 분명히 매질이라는 나쁜 행위에도 예외 조항이 있다는 생각을 목사인 저는 감히 해봅니다. 잠언 기자의 메시지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잠언 13:24절입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히브리어 ‘쉐베트’는 ‘막대기’, ‘곤봉’, ‘지팡이’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여 개역개정판에는 ‘매질’이라는 단어로 ‘쉐베트’라는 단어를 해석함으로 그 의미를 강화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언어로 된 여러 번역 중에서 공동번역은 대단히 적극적으로 잠언 13:24절을 번역한 것 같아 의미를 새기기 위해 교우들에게 소개합니다. 공동번역 잠언 13:24절입니다. “자식이 미우면 매를 들지 않고 자식이 귀여우면 채찍을 찾는다.” 저는 이 구절이 매를 부채질하는 구절이라고 결코 여기지 않습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명언을 전제로 하여 매질 즉 회초리를 때리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외 조항이 있음을 지지하는 것이 잠언 13:24절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 예외 조항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 매질입니다. 본론) 히브리서 저자가 수신자들을 향하여 간곡히 선포한 내용이 본문입니다. 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저자는 주후 60년대에 살고 있는 유대적인 성향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향해 1:1-12:3절까지 계속하여 선언하고 지지한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토대로 하여 영적 싸움에 대해 미지근한 그들의 태도를 에둘러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저자는 수신자들이 죄와 싸우지 않았다고 질책합니다. 조재천 교수는 여기에 기록한 ‘죄’에 대한 정체를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이 죄에 대한 정체는 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버리도록 압박하는 사회의 폭력적 힘을 가리킬 것이다.”(조재천,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히브리서”, 홍성사, 200) 히브리서 수신자들 중에 상당수는 유대 율법으로의 회귀하는 후퇴자도 있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로마라는 당시 최고의 악이자 폭력에 굴복하고, 어쩔 수 없이 그 권력의 힘에 무너지고 있는 자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세속적 권력에 무기력하게 타협하며 동화되어 가는 분모들이었습니다. 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았다고 경고하며 표현한 것입니다. 경고로 머물지 않은 저자는 배교라는 마지노선을 흔들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조금 더 심한 어조로 징계에 대한 메시지의 의미를 남깁니다. 5-8절을 보겠습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징계는 아들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셈입니다. 매라도 때리는 이유는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5-6절은 잠언 3:11-12절을 인용한 메시지입니다. 일찍이 잠언 기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히브리서 저자와 잠언 기자의 메시지에서 볼 수 있는 매질의 예외 조항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들에게 행하는 매질, 징계라는 것이었습니다. 아, 노파심으로 말씀을 드리는 데, 여기에서 언급한 매질은 결코 학대가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매질은 애비가 아들에게 행하는 매질 즉 목적이 있는 매질입니다. 그 목적은 아들에게 임할 유익이라는 목적입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에서 가장 감동으로 다가오는 구절을 제게 취사선택하라고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8절을 뽑겠습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교우들도 다 아시는 것처럼 제게는 외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저도 아들이 하나라서 그런지 심정적으로 많이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이제 내년이면 가정을 가질 결혼 계획도 있고, 목사 안수도 직면해 있고, 또 대학원을 졸업하는 해이기에 지금까지 행해왔던 파트 사역이 아니라 부교역자의 훈련이라고 할 수 있는 전담 사역자로 나가야 하는 시기도 도래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세밀하게 아들 내외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 30년이라는 세월 동안 목사라는 직으로 살면서 목회자가 어떤 모습을 견지해야 되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하며 사역 현장에서 부대껴 왔기에 아들과 앞으로 며느리가 될 애까지 애비가 생각하는 像의 목회자 부부가 되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바람을 피력하면 그것이 마치 꼰대의 잔소리처럼 들려 자제할 때가 많지만 애비의 심정이라 그런지 잘 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아들을 키우면서 때로는 엄격하게 키웠지만, 때론 줄 수 있는 사랑을 부족함이 없이 주며 최선을 다해 키웠던 것 같습니다. 아들이 자라온 시기들을 뒤돌아보면 나는 아들에게 매를 든 적이 있는가를 설교 준비하며 다시 회상해 보았습니다. 저 역시 평범한 대한민국의 아빠라서 그런지 아들에게 매를 댄 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거짓말을 한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호되게 매를 댔던 것 같습니다. 조금 성장을 해서 사춘기 시절에 공부보다 노는 것에 빠져 있을 때 매질을 하려면 나보다도 힘이 더 센 아들에게 힘이 달려서 이단 옆차기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돌아보면서 감정을 갖고 아들을 때렸던 적이 있었는가를 곱씹어 보았습니다. 아무리 곱씹어도 그런 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아들이 제게 자신의 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고. 아버지도 감정을 담아 때렸다고 방어논리를 펼 것입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면 아마도 제가 아들에게 질 것입니다. 내가 보지 못한 시각을 매를 맞던 아들은 더 정확하게 기억할 테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들에게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이 하나 있습니다. 만에 하나, 이요한이라는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라면 절대로 매질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들이 하나라서 젊은 시절, 아내에게 심각하게 입양을 생각해 보자고 건의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이런 이야기를 제게 들을 때마다 아내가 제게 동일하게 했던 말이 있었습니다. “친아들보다 더 잘 키울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오늘 8절에서 했던 말이 절절한 이유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물론, 친부모보다 더 절절하고 깊은 사랑을 전제하여 입양한 자녀들을 키우는 양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저는 압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드리는 핵심적인 요체는 아들에게 매를 대는 경우의 관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니면 매를 댈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매를 대고, 회초리를 댄 자녀들의 궁극적 결과를 이어지는 본문 9-11절에서 저자는 이렇게 갈무리합니다.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저자는 왜 육신의 부모가 육신의 자녀를 향하여 매를 들어야 했을까를 진단한 구절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단순히 자녀 양육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본문을 적시했던 것이 아닙니다. 더 한층 높은 은혜를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 즉 하나님의 회초리는 육신의 부모가 들었던 회초리보다 더 심오한 뜻이 있음을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때리시는 목적은 거룩한 일에 참여하고 성도의 궁극적인 승리인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본문 정황에 대한 해석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공교롭게 오늘이 505주년 종교개혁주일임을 감안하여 본문 해석을 적용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몇 마디를 더 전하고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교우들은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매 맞고 있는 한국교회” 결코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닙니다. 몇 몇 근본주의자들은 저를 향하여 당신, 목사가 맞느냐고 삿대질까지 할 태세임을 압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공격을 받아도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매 맞고 있는 중이다.” 왜 한국교회가 매를 맞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방향성으로 엇나갔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원하지 않는 것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20-24절을 모두 읽어 보겠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제가 이 구절에 천착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22절과 24절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인사 청탁을 한 어머니를 뒷배경으로 삼은 두 아들의 한심하기 그지없는 영적 상태는 참담하기까지 합니다. 이 정도의 참담한 수준이었으니 치맛바람에 휘둘리는 아들들이었겠다 싶지만, 그들의 고백은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망발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청탁의 장본인이었던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야보고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마실 수 있겠는가?” 그치들이 자랑스럽게 답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좌우편에 앉고 싶어 하는 욕망덩어리들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함께 경험하겠다니 이게 어디 말이 될 법한 일입니까? 24절은 도진개진입니다. 이렇게 망발을 내 뱉은 두 제자들의 일을 듣고 나머지 10명의 제자가 분히 여겼다고 말합니다. ‘분히 여겼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가낙테오’의 원뜻은 ‘기분 잡치다’의 뜻입니다. 10명의 제자들이 기분이 잡친 이유는 요한과 야보고의 요구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요구를 한 것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관망만 하다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해서 오는 불안감 때문에 나타난 분노입니다. 말 그대로 그놈이 그놈이고 오십보백보요 도진개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편없었던 제자들에게 주께서 행하신 매질은 의미심장합니다. 마태복음 20:26-28절을 나누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단도직입적으로 선포합니다. 죽는 자만이 내 제자가 될 수 있다. 무시무시한 예수님의 매질이었습니다. 제가 주께서 제자들에게 내리치신 이 매질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이유는 오늘, 한국교회의 자화상이 마치 요한과 야고보 같기 때문입니다. 한 술 더 떠서 나머지 10명의 영적 상태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러니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신 주군의 말씀, 종이 되라고 하신 서슬이 시퍼런 예수 그리스도의 레마가 주후 1세기 제자는 물론, 오늘 21세기를 살고 있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내리치시는 죽비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 오금이 저려 옵니다. 나를 향하여 내리치시는 매질이기 때문에 더 진한 아픔으로 매를 맞고 있습니다. 더 기가 막힌 일은 이에 편승하여 한국교회 평신도들은 매를 맞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무감각의 늪에서 빠져 나올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즐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민하지 않고 엔조이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예레미야 예언자의 통곡처럼 저도 통곡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0:9절의 통곡 말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지난 목요일에 DPA 1-4기 포럼을 우리 교회에서 섬겼습니다. 강의 중에 세인 교회 목회 철학을 기수별 후배들에게 강의를 하는 시간이 있어서 10가지의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후배들이 메모하며 열심히 경청해 주어 감사했는데 10가지 중에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어 정말로 최선을 다해 전했습니다. 10가지 중에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목회 철학 중에 가장 먼저 일순위로 소개한 내용은 이것이었습니다. ※ 어떤 경우에도 ‘Lordship(主尊心)’에서 흔들리지 않는 목회. 수없이 세인 교우들에게 제시했고, 반복했던 메시지 중에 ‘로드십’ 즉 ‘주존심’에서 흔들리지 않는 목회의 성경적 좌표로 삼은 구절은 사도행전 26:29절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이 구절은 폼 잡으라고 주어진 구절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교양 취미로 기독교신앙을 선택하라고 선물로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각오나 영적 선언함이 없는 자는 주존심을 갖고 살아갈 수 없는 절체절명의 의식 때문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교회에서의 사역이 끝나 배론 성지로 포럼 교제의 장소가 옮겨졌고 그 곳에서 목회에 몸부림치는 후배들과 둘레 길을 걸었습니다. 걷는데 후배 목사 한 명이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오늘 강의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주존감이 흔들리지 않는 목회’ 즉 ‘로드십을 사수하는 목회’라는 강의였습니다. 헌데 목사님은 목회 여정 중에 정말로 주존감에서 단 한 번도 흔들리신 적이 없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을 받고 잠시 동안 침묵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하루에도 수백 번 흔들렸지요. 그리고 지금도 흔들리고 있고요. 그래서 목회 30년이 넘어섰는데도 목회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하나님께 떼 쓸 때가 참 많았지요. 그런데도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주존심이 흔들릴 때마다 붙들었던 것이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본질이었습니다. 이 본질은 제게는 하나님이 직격하시는 레마였습니다. 레마가 저를 살렸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10-11절이 제게 주어진 레마입니다.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매를 때리셔도 그 매가 레마라면 그 매는 맞는 것이 마땅합니다. 나는 한국교회가 매를 맞더라고 레마를 통해서 일어설 수 만 있다면 매를 맞는 일이 다반사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생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론 나에게 회초리를 드십니다. 제가 한국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에 매를 대고 있다는 감격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사생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한국교회와 나를 때리고 계심에 대해 원망하지 마십시다.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들과 딸인 우리에게 거시는 하나님의 기대감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505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걸린 95개 조항의 종교개혁 신조들이 매를 맞고 있는 한국교회에 다시 걸리기를 소망해 봅니다. 신 종교개혁문이 교회 정문마다 써 붙여지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사도행전 26:29)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 있네 한라에서 백두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