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십자가를 참으신2024-03-07 16:57
작성자 Level 10

2022 10월 23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49)

 

본문히브리서 12:1-3

제목십자가를 참으신

 

서론)

 

이재철 목사께서 2004년부터 누나인 고은아 권사 (본명 이경희 권사)가 경영하는 서울극장에서 사랑의 초대’ 라는 제하로 매년 일반인 초청 집회를 열었는데 2005년에 진행했던 두 번째 집회에서 행했던 설교 원고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제 마음을 움직였던 한 대목을 교우들에게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느 아내가 있었습니다그녀는 남편과는 요즈음 말로 하면 전혀 코드가 맞지 않는 부부관계를 맺고 있는 아내였습니다남편과 일치되는 부분이 그 어느 것 하나 없어서 참으로 많은 가슴앓이를 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그 분은 다시 태어나면 절대로 지금의 남편과는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의 남편과는 절대로 이혼하지 않을 것이며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지금의 남편과 다시 결혼할 것입니다.”

그냥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이유가 있었습니다.

⓵ 만약에 다시 태어나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고 해도 지금의 남편보다 절대로 나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⓶ 사랑하는 아이들 때문이다지금의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고 그 아이들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⓷ 현재의 경제적 수준에 만족하기 때문이다나하고는 코드가 맞는 것이 없는 남편이기는 하지만 성실함으로 지금의 경제력을 갖게 해 준 남편을 존경하기 때문이다. (이재철, “사랑의 초대”, 129-130)

이 목사께서 이 부부를 설교에 등장시킨 이유 중 하나는 그 아내가 지혜로운 아내임을 부각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을 읽다가 또 다른 측면에서 갖게 된 소회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부부의 사랑도 ‘in spite of’ 가 아니라 ‘because of’ 로 맺어진 사랑이라는 한계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점입니다.

인간관계 속에 이루어진 사랑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조건적 사랑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C,S 루이스에 의하면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 스톨게(storge)입니다루이스는 이 사랑을 애정이라고 번역했습니다.

ⓑ 필리아(philia)입니다이 사랑은 우정이라고 부릅니다.

ⓒ 에로스(eros)입니다이 사랑은 성애라고 정의하기도 하지만 특이하게 루이스는 사랑에 빠진 사랑이라고 정의합니다.

ⓓ 아가페(agape)입니다이 사랑은 자비라고 정의했는데 결국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의미이기에 이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일반적으로 앞에 소개한 세 가지 사랑을 조건적인 사랑이라고 기독교에서는 정의합니다.

이 사랑은 인간관계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네 번째로 소개한 사랑만은 조건을 붙이지 않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내리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이 내리 사랑 즉 자비라고 통칭되는 아가페 사랑에 대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그의 책에 남깁니다.

하나님은 일부러 기생물들을 창조하셔서기생물인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이용해 먹을 수 있게’ 하시는 숙주이십니다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이는 모든 사랑의 발명자이시자 사랑 자체이신 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C,S 루이스, “네 가지 사랑”, 홍성사, p,216)

오늘 저는 이 러브스토리를 교우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본론)

 

우리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소위 사랑이라고 말하는 고린도전서 13:4-7절을 교우들에게 소개하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울은 단 네 절에서 무려 사랑의 정의를 15가지로 정의합니다.

이 구절에서 눈에 띄는 가장 많이 반복되는 유사 단어들이 보입니다.

4절에 오래 참고’(마크로뒤메이), 7절에 모든 것을 참으며’(스테게이), 또 7절에 기록된 견디느니라’(휘포메네이)입니다.

이렇게 이 세 단어는 우리나라 성경에는 아주 비슷한 단어로 번역되었지만 헬라어 원어성경에 보면 공히 각기 다른 단어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마크로뒤메이는 화내기를 더디 하는 것을 의미하고, ‘스테게이는 감추어 준다.’는 뜻으로 허물 덮어주기이고, ‘휘포메네이는 밑에 머물러주는 것’ 즉 이해하며 참는 것을 내포한 단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단어에는 공통적인 의미가 보입니다.

참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참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오늘 본문에서 저자는 두 번에 걸쳐서 믿음의 주이시자 우리들을 온전하게 해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의 사역을 행하시던 동안 우리에게 남겨준 내용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소개합니다.

본문 2절을 읽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눈에 또렷하게 보이는 구절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참으사

이어지는 3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본문 2-3절에서 두 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기록된 참다라는 단어는 앞에서 언급한 사랑 장 13:7절에서 세 번째로 소개한 휘포메노의 번역입니다.

휘포메노가 원어적으로 무슨 뜻이라고 했습니까?

밑으로 들어가 머물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존재의 밑으로 들어가 그에게 머물러 주는 것은 인내 즉 참음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불가능한 일을 주님이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1) 십자가를 참으심으로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다는 것은 두 가지를 참으셨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 육체적인 고통을 참으신 것입니다.

 

주후 1세기경에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던 일체의 속주 국가에서는 중범죄자들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사형제도가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잔인하게 고통을 주는 사형법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헤롯 사후 므나헴 벤 유다는 갈릴리 세포리스에서헤롯의 종 시몬이 베레아에서목자 출신의 아스롱은 유대에서 추종자를 만들어 모아 반로마 투쟁을 결의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선포하였다시리아 주제 로마의 총독 바투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 지역 곳곳에서 이들에게 동조한 약 2,000명 정도를 십자가 처형을 했다. (중략기원 후 70년에는 티투스가 로마 항쟁에 참여한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매일 500혹은 그 이상 되는 유대인을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허호익, “예수 그리스도 ”, p,192)

위의 인용 글을 전제할 때 결국 로마 제국에서 처형의 방법으로 사용한 십자가형은 체제 전복이나정치범들을 죽이는 잔인한 사형법의 일환으로 극형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정치적 사범으로 누명을 쓰고 십자가형으로 죽음을 당하신 셈입니다.

이 형법의 잔인함은 인간의 육체 안에 있는 모든 수분이 빠져 나갈 때까지 고통을 느끼게 하다가 결국은 호흡 정지로 죽게 만드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법이었습니다.

동시에 숨이 멎은 십자가 위의 육체들은 까마귀들의 먹잇감이 되어 각종 육체들이 훼손되는 치욕도 당하게 하는 고통의 형벌이었기에 십자가를 참으셨다는 말의 의미는 극한 육체적 고통을 참으셨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심한 육체적인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해석하고 이해한다면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 십자가의 참으심에 대한 50%만 이해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라는 형을 당하셨을 때 참으셔야 했던 極强의 고통은 또 다른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 영적인 고통을 참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5:34절을 읽겠습니다.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우리가 잘 아는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신 소위 가상칠언 중에 제 4언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아람어의 문장은 시편 22:1절의 인용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렇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제 외침의 뜻은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

많은 이단 종파들은 이 외침이야말로 예수께서 실패하신 전형의 외침이라고 딴지를 겁니다.

하지만 주님의 이 외침은 실패의 외침이 아니라 도리어 엄청난 신학적 함의가 담겨 있는 승리의 구절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예수님의 이 외침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진다는 영적 고뇌다시 말하면 그 죄 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견뎌야 하는 영적 고통이었다.”(존 스토트, “기독교의 기본진리”, 생명의 말씀사, p,95.)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인류가 지은 모든 죄를 짊어지신 죄인의 총체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도 그 순간만큼은 등을 돌리셔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지셔야 하는 고통은 최강의 고통이었고 그 무게와 중압감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면에서 존 스토트의 갈파에 저 또한 동의합니다.

제가 이 구절에 대해 해석한 또 한 명의 신학자의 말을 존중하기에 소개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내어주는 아버지와 버림받은 아들 사이의 사건이다.”(위르겐 몰트만,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Harper Row, p,96.)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께서 온 인류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필연적인 방법이 사랑하는 아들을 버리는 것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이 예수님께 부여된 것은 대단히 철저하게 계획된 하나님의 프로젝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신 아들 예수님은 반드시 이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 사명을 갖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무시무시한 영적인 고통이 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이 고통을 예수께서 참으셨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2) 자기를 거역한 자들을 참으심으로 하셨다는 말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몇 구절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절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9-11절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께서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어둠으로 창궐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군중들은 예수를 희롱하기까지 했습니다.

누가복음 23:35-37절입니다.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토마스 롱 교수는 이 장면을 본인의 주석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정과 비난과 모욕의 눈빛을 받으셨다지나가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욕을 퍼부었고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조롱하며 그의 나약함을 비웃었다함께 달린 죄수들까지 그를 비아냥거렸다아무리 사형수라고 해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켜 주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이를 위해 사형수는 집행인들의 경멸의 눈빛을 피할 수 있도록 머리에 두건을 쓴 채로 죽음을 맞았다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가리개도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공공장소에서 수치를 당하셔야만 했다.” (토마스 롱, “현대성서주석-히브리서”, 한국장로교 출판사, pp, 230-231)

그렇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 의해 배신당하셨습니다.

철저하게 당하셨습니다.

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배신한 자들을 가리켜 자기에게 거역한 자라고 지칭했을까요?

불과 5일 전의 이들의 행보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9:37-38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불과 5일 전에 호산나를 외치던 자들이 예수님의 등에 칼을 꽂은 것입니다.

이들의 배신은 최악의 배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압도하는 감동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렇게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치욕을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회고한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에서 이 치욕을 이겼던 것이 바로 참으심이었다고 선포합니다.

다시 본문 2-3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그렇다면 오늘 주일에 우리 세인 지체들이 공유해야 할 은혜는 무엇일까요?

예수께서 이토록 엄청난 이중적인 고통을 왜 참으셨을까요?

※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배신한 자들의 밑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머물겠다고 결심하시고 참으신 것은 바로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루이스의 말을 다시 도입한다면 자비로 번역된 아가페의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은 ‘~ 때문에’ 십자가에서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무슨 유익을 얻기 위한 조건을 걸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참으신 것은 철저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실천하시기 위해 그들의 밑으로 들어가 머무신 것입니다.

故 박연형 권사님의 장례식을 잘 마쳐서 감사했습니다.

이번 장례 예식이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장례 일정 중에 적지 않은 황당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당황스러웠지만 목사로서 정말 많은 것을 양보하고 참으며 장례식을 집례 했습니다.

홀로 남은 정순예 권사님과 박재흥 집사와 박미숙 성도를 위한 배려가 담보된 장례 일정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사랑도 조건부 사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주님의 사랑은 더 크게 보였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 모두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밑으로 들어와 머물러 주신 그 참으심의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었다는 당위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 말씀이 울컥하게 하며 크게 다가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많은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임재범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그가 불렀던 노래 중에 사랑 그 사랑 때문에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많은 후배 가수들도 리메이크를 할 정도로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노래입니다.

그 가사의 일부에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사랑 그 사랑 때문에/그 사랑 때문에/내가 지금껏 살아서/오늘 오늘이 지나서

그 사람 다시 볼 수 없게 되면/다시 볼 수 없게 되면 어쩌죠.

 

그냥 흔한 통속적인 사랑 노랫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통속적인 사랑 메시지도 사랑의 무게가 이렇게 처절하게 집요하며 간절한데우리가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오늘 나에게 주신 그 사랑의 무게가 가벼워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참으신 그 사랑이 어떤 은혜로 다가오십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지금껏 살았노라고 정말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나는 그 사랑에 사무쳐 그 분의 사랑이 없으면그 분의 얼굴을 보지 못하면 살 수 없다는 간절함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이.

이 사랑에 감격해 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은혜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