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12:1-3
제목: 바라봄과 생각함
서론)
작가 김훈은 1948년생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나이로 75세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작금에 출간 된 그의 작품들을 보면 이런 글귀들에 제법 보입니다.
“나에게 남아 있는 여생을 생각했다.”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태어난 지 2년 만에 한국전쟁을 경험했던 그였기에 전쟁의 상흔들이 얼마나 처절했는지를 보여주는 속 쓰린 장면들이 그의 작품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전쟁의 시대, 피난민들의 실례를 그가 발표한 하나의 단편 소설의 감정이입을 통해 소개합니다.
피난해서 내려온 남쪽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피폐하고 궁핍했는지를 보여주는 문장이 ‘강산무진’이라는 옴니버스 단편 소설 중에 수록된 ‘고향의 그림자’에 담겨 있습니다.
“피난 내려와 일군 피난민들의 숙소는 보란 듯한 집이 아니었습니다. 미군들이 쓰다가 버린 레이션 박스를 모아 만든 가건물이었습니다. 레이션 박스를 모아 압정으로 눌러 지었기에 집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처참한 판잣집이 삶의 처소였던 그 시절,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레이션으로 엮은 판잣집이니 오죽 불에 약하겠습니까? 삽시간에 화마가 마을 전체를 삼켰습니다. 단 한 가지의 가재도구를 남기지 않고 모조리 쓸어간 화재가 진압된 뒤에 망연자실한 마음으로 어머니가 형제들과 집에 돌아왔습니다. 아이들과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집터에 돌아와 울부짖는 아들딸들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동네를 보지 말고 저 달을 쳐다 보거라.’라고” (김훈, “강산무진”, 190.)
어머니가 저 달을 쳐다보라고 했던 그 ‘쳐다봄’의 의미를 작가는 어린 나이였을 때는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덧 인생의 황혼에 접어든 나이가 되고 보니 어머니가 보라고 하셨던 그 ‘봄’의 의미가 결코 가벼운 입놀림으로 묘사한 표현이 아님을 절절하게 느꼈음을 김훈은 작품에 삽입한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물려줄 미래만큼은 불행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어머니들은 딴 짓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보지 말고, 그래도 희망을 보자고 역설했던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당신의 허리띠를 조여 매었기에 대한민국의 지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본론)
하루를 사는 동안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보는 수없이 많은 현상들이 존재합니다.
그렇게 많은 봄의 현상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의미가 전혀 없는 봄(seeing)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의미 있는 봄(watching)일 것입니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전자는 생각 없이 보는 경우이고, 후자는 생각하고 보는 차이입니다.
엄청난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성을 방문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나인은 가버나움에서 약 40km 떨어져 있던 곳입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도 소외된 지역이었는데, 하물며 그 갈릴리에서 조금 더 떨어져 있었던 나인성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관심이외 지역이 나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지역의 열악함은 더 심각할 정도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지역에 살고 있었던 여인은 소외된 계층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과부였습니다.
이것을 전제할 때 이 과부에게 유일한 혈육이었던 외아들이 있었다면 그가 얼마나 소중한 아들이었을까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 가능합니다.
그런데 기막힌 불행의 연속이라고나 할까요.
과부의 그 외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아들의 죽음은 여인에게는 재기 불능의 절망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께서 나인성 입구에 들어선 것입니다.
동시에 바로 그때 그 시간은 무리들이 장례를 위해 과부의 외아들의 관을 메고 나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극적인 시간에 이루어진 사건 하나를 누가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누가복음 7:13절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이 구절에서 ‘보시고’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이돈’의 시제가 과거완료시제입니다.
예수님은 슬픔에 잠긴 과부를 순간적으로 한 번 보고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지켜보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적용하자면 의미를 갖고 보셨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과부를 보신 주님의 심정을 누가는 또 하나의 단어로 표현합니다.
‘불쌍히 여겼다.’
‘불쌍히 여기다.’는 의미로 번역된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의 문자적인 의미는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했습니다.
이 절절한 정서적 공감은 어느 경우에 일어납니까?
의미를 갖고 볼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아픔을 의미를 갖고 보셨습니다.
동시에 생각하셨습니다.
생각하신 끝에 주님이 반응하신 내용을 누가는 이어지는 누가복음 7:14-15절에서 이렇게 보고합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아들을 살리신 이 기적의 이유를 추적해 보면 과부를 주님이 ‘스플랑크니조마이’의 마음으로 보셨고 생각하셨기에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12:1절은 인과관계 접속사인 ‘토이가룬’으로 즉 ‘이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이 접속사를 풀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켰고 살아왔는지에 대해 살폈습니다.
이렇게 믿음의 선진들이 달려온 길을 소개한 저자는 본문 1절에서 곧바로 이렇게 신앙의 연대를 이룹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이렇게 달려온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함을 역설한 것입니다.
1절에서 주목할 것은 인칭대명사입니다.
‘우리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시대부터 지금까지 순교적 사명을 갖고 믿음을 지켜온 그들(믿음의 선진)과 이제 믿음의 후배인 우리는 같은 배를 탄 신앙적 공동체의 지체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같은 신앙으로 무장한 자라는 동질감을 역설한 것입니다.
더불어 바로 이런 우리들에게는 ‘구름 같이 둘러싼 증인’들이 있음을 피력합니다.
과거 구약시대를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 주후 60년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것이 있는데 우리들을 응원해 주는 수많은 증인(말튀스)들이 있음을 고지합니다.
그 증인들의 응원이 있기에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말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강조합니다.
더불어 저자는 ‘우리들’ 즉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하나님 신앙에서 떠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이 해야 할 사명을 이렇게 안내합니다.
1절 하반절과 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저자는 성도의 길을 마치 경주하는 자의 경주와 같다고 비유합니다.
왜 이런 표현을 저자가 했을까요?
그 근거는 이미 살펴본 10:36-39절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복기해 보십시다.
히브리서 10:36-39절입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뒤로 물러서는 자들이 아닙니다.
뒤로 물러서지 않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천명한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인내함으로 믿음의 경주를 잘 달려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 경주를 정말로 잘 달리려면 성도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명령합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단어가 바로 ‘바라보자’입니다.
저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볼 것을 권고합니다.
‘바라보자’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포론테스’는 ‘다른 것에서 눈을 돌려 어떤 것에 고정시킨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to consider with the eyes’ 즉 ‘눈으로 고려하는 것, 생각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생각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딴 생각하지 않는 집중력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히브리서 저자의 권면은 이제껏 갖고 있었던 딴 생각 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라는 역설인 셈입니다.
율법주의로 돌아가려는 배교자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성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제 본문 3절을 이어서 보겠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권고했던 저자는 이제 더 강력한 어조로 또 하나의 명령을 내립니다.
생각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천로역정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입니다.
양용의 교수는 그래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경주자에게 저자는 인내로 경주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경주에서 중요한 것은 경쟁적인 속도가 아니라 목표에 도달하는 인내다.” (양용의, “히브리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345)
저 또한 양 교수의 지론에 동의합니다.
장거리 경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기 마련입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지침과 위기가 올 때 가져야 하는 것은 지구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지구력은 인내함입니다.
어떻게 인내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인내를 하셨음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핍박, 조롱, 멸시, 폭력 당함,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으심까지 예수님은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기셨습니다.
이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성도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오늘의 레마입니다.
※ 나를 위해 먼저 모든 수모와 고통을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우리들이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는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에 대한 긴박했던 메시지를 만납니다.
한 사람이 무화과나무를 심어 경작했는데 삼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을 알고 주인이 분노하며 포도원지기에게 명령했습니다.
땅만 버리는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포도원 지기는 마음이 급해져서 주인에게 이렇게 말미를 구합니다.
누가복음 13:8-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제가 예수님의 이 비유에 집중하는 이유는 한 구절에 천착하기 때문입니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하면 이런 울림이 전해 옵니다.
아마도 지난 3년 동안 이 농부는 무화과나무 경작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추론 말입니다.
그냥 적당히 해도 괜찮은 형극을 유지할 수 있었기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가능성 100%입니다.
하지만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림을 당할 위기에 직면하자 주인에게 일 년의 말미를 요청했습니다.
성경은 그 이후를 기록하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농부는 일 년 동안 딴 짓 하지 않고 무화과나무 주변의 농토를 잘 관리하며,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 1년 뒤에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내기에 전심전력했을 것입니다.
그의 온 생각은 무화과나무 바라보기와 생각하기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한 바라보기와 생각하기였습니다.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무화과나무만 바라보고 생각한 농부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 외에 다른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문하실 교우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목사가 아닌데, 어떻게 24시간을 온통 주님을 생각합니까? 목사님, 될 법한 말을 하십시오.”
그렇게 질문하는 당신께 묻겠습니다.
당신은 24시간은 고사하고 하루를 살면서 단 한 시간이라도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루를 살면서 단 한 시간이라도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살고 있습니까?
만에 하나,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은 지금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담임목사의 확언입니다.
며칠 전, 교회 홈피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 올린 칼럼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단두대에 선 심정으로
“아버지,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세련된 설교도 아니고, 성서 신학적으로 엄청난 내공을 가진 설교도 아닌데,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 나는 울고 있네요. 나도 내가 담임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울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에요.”
아들이 언젠가 내게 전언해 준 말이다. 아들이 영적 감동을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 설교를 통해 진하게 느끼고 있다는 것에 대해 너무 감사했지만 내색할 수 없어 실없는 소리를 했다.
“이놈아, 애비 설교에는 한 번도 울지 않고, 비평만 하더니 담임목사 설교에 울어! 나쁜 놈이네.”
아들을 그렇게 감동 시킨 후배를 어제 수요일 성회 강사로 세인 교회 강단에 세웠다. 아들을 감동 시키는 설교자를 세웠으니 나 또한 기대 충만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50여 분의 설교가 끝났다. 잠시의 고요함이 예배자들을 덮쳤다. 동시에 왜 아들이 울었는지 알았다. 무시무시한 영성이었다. 강사를 잘 섬기고 집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영성이 무시무시하네요.”
이제껏 보았던 젊은 목사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범접할 수 없는 영성, 천박하거나 인위적으로 가공한 천박한 영성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그렇게 살지 못하면 나올 수 없는 영성, 바로 그것이었다. 성회를 마치고 차 한 잔 나누며 마무리 교제를 하는데 후배가 이렇게 말한다.
“목사님, 세인교회 홈페이지에 들어와 근래 강해하시는 선배님의 히브리서 원고를 읽고 설교 동영상을 시청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설교를 준비하시는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강사가 그냥 갈 수 없어서 주고 가는 립 서비스를 받았다. 그러면서 내게 한 마디를 던진다.
“저는 제 목회를 시작한지 이제 일 년이라 풋내기입니다. 그래서 매 주일, 강단에 설교 준비를 하고 올라갈 때 마치 단두대에 선 심정으로 섭니다.”
후배의 고백을 들으면서 뭔가 한 자리 얻을 수 없을까 하여 종로 5가에 서성거리는 정치하는 목사, 자기 목회 철학이 없이 남의 것들을 베끼며 어떻게 해서 목회의 성공 대열에 진입해 보려는 스킬을 배우는 안타까운 목사들도 수두룩하지만, 성결교단에 이렇게 시원적 복음의 은혜와 원색적 예수 그리스도에게 천착하며 달리는 한 줄기 빛과 같은 후배가 있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단두대에 선 심정으로 강단을 섬기는 목사, 그렇게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목숨 건 목사가 후배라서 행복하고 기쁘다. 한 참 어린 후배지만 강사로 초청한 후에 그와의 교제를 통해 무지하고, 무능한 선배는 엄청 공부하며 도전 받았다. 후암 백합 교회 김선인 목사에게 너무 큰 감사를 전한다.
교우들이여!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심정인 단두대에 올라가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목사님, 지금이 무슨 중세입니까? 단두대 운운하게요.”
아십니까? 지금이 중세보다 더 살벌한 영적 흑암의 시대인 것을.
단두대에 선 마음으로 신앙의 길을 경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 외에 딴 짓을 하지 않습니다.
딴 짓을 하는 이유는 주님을 바라보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2022년 10월 16일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주님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배우 윤정희 님의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씨가 섬마을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고립되어 있는 섬 마을 주민들에게 고전 음악을 즐길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콘서트를 앞두고 맹연습을 하고 있는 백건우 씨를 찾아간 기자가 의아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니, 백 선생님, 피아노의 달인이시고 천재적인 피아니스트가 뭐 이렇게 열심히 땀을 흘리며 농촌 콘서트를 준비하고 계십니까?”
기자의 이 질문을 받은 백건우 씨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연주자라면 당연히 연습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매일 꾸준히 5-6시간을 연습합니다. 그 이유는 수준을 유지하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음악이 새로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김기석, “마태와 함께 예수를 따라”, 두란노, 92.)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한 분야의 최고 실력자는 그냥 탄생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최선의 노력 뒤에 탄생하는 것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서서 믿음의 경주를 잘 달리고 인내함으로 끝까지 천성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두 가지는 사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양보의 대상이 아닙니다.
피 흘리기까지 사수해야 할 필수 요소입니다.
나는 세인 지체들이 진짜 예수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유혹이 강하다고 생각될 때
당신의 힘이 거의 바닥났을 때 바로 그때 힘을 내야해
길이 멀다고 느껴질 때 유혹이 강하다고 생각될 때
당신의 힘이 거의 바닥났을 때 바로 그때 힘을 내야해
인내로써 모든 경주를 달릴찌라
주를 의지하면서 주께 기도하면서
다 같이 걸어갑시다 다 같이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