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히브리서 11:24-29
제목: 모세의 믿음 서론) 고전적인 해설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부흥사인 D.L, 무디(Moody)가 말한 발언입니다. 모세의 120년 인생을 무디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첫 번째 40년: 스스로를 대단했던 존재로 생각했던 시기 두 번째 40년: 스스로를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며 인생을 체념했던 시기 세 번째 40년: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아닌 자를 쓰신다는 것을 깨달은 시기 부흥사였던 무디의 이 해석은 모세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적지 않은 통찰을 주었습니다. 애굽의 왕실에서 바로의 조카로 살던 40년 인생은 자기 스스로가 최고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동족을 죽인 애굽인을 살해하여 추방된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목축을 하며 살았던 40년은 졸지에 신분이 급전직하 하여 미래가 없이 살아야 했던 시기였기에 자기 스스로를 폄하하여 인생을 체념했던 시기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셋째 시기는 80세 이후입니다. 인생 80년이라면 삶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시편 90:10절을 읽어 보십시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편 90편의 히브리어 제목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시편 90편은 150편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모세와 관련이 있는 시라는 말입니다. 모세가 직접 이 시를 썼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시를 토라라고 지칭하는 것은 아마도 모세가 가르쳤던 전승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여기기에 모세의 기도라고 제목을 붙인 것 같습니다. 모세의 전승이라고 할 때 모세가 생각 중에 인간의 최대 수명이 70-80이라고 정의했다면 모세의 세 번째 시기는 분명히 덤으로 사는 인생의 시기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 시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미션을 받았으니 무디의 지론대로 이렇게 갈파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아닌 자를 쓰신다는 것을 깨달은 시기” 본론) 오늘 본문에서 모세보다 약 1500년 정도 후대 인물이었던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의 일대기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24-25절 본문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대단히 짧지만 모세의 일대기를 이렇게 정리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구절은 출애굽기 2:11-12절이 원전이 될 것입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모세는 바로의 딸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왕족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그가 히브리 백성이 애굽 사람에 의해 고된 노동을 강요당하며 린치를 당하는 모습을 보자 분노하여 그를 죽여 모래 속에 매장했음을 보고합니다. 모세의 이런 행위는 동포애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갖게 된 동포애는 과연 어디에서 기인되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유모의 자격으로 모세에게 젖을 먹이며 양육한 친모 요게벳이 가르친 히브리 민족 사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 사상이라는 표현은 통상적인 표현이지만 우리들의 신앙적 언어로 바꾸면 야웨 하나님 신앙일 것입니다. 이 신앙 교육을 친모에게 받으며 자라난 모세는 당연히 민족애, 동포애 즉 야웨 하나님 신앙이 발현했을 것이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야웨 하나님 신앙의 역사로 볼 때 한참 후배였던 히브리서 저자는 이 신앙의 행동을 이렇게 본문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24-25절 본문을 다시 복기하십시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이 정도로 모세의 신앙적 삶을 마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어지는 26절은 모세의 믿음을 히브리서 시대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압권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 모세 시대의 정황에서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대입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억지 같아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 사후 약 1500년 뒤에나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저자는 왜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굳이 끄집어냈을까요? 어느 정도 성서개론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는 교우들은 히브리서 저자가 모세의 삶을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연관하여 설명하려는 것이 억지춘향이자 과유불급의 인용이라고 비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진 피터슨의 해석을 참고하면 그 의미가 확 들어옵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에 기록된 히브리서 11:26절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메시야 진영에서 겪는 고난을 이집트에서 누리는 부귀보다 훨씬 값지게 여겼습니다.” 정말로 기가 막힌 번역입니다. 그렇습니다. 애굽인들은 고센 땅을 경멸했습니다. 고센은 히브리백성이라는 노예 집단이 거주하는 게토 지역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애굽 백성들은 고센 지역을 금기시하고 불온시하여 접근하면 안 되는 버려진 땅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믿음은 이것을 완전히 뒤바꾸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유진 피터슨이 해석한 것입니다. 모세는 히브리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고센 지역이 자기가 태어났던 원 고향임을 인식한 것은 물론, 또 한 가지 위대한 엄청난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유진 피터슨이 갈파했습니다. ‘메시아 진영’입니다. 출애굽기는 포로기에 만들어진 모세 전승의 편집 작품입니다, 그러기에 출애굽기에 기록을 참고한다면 어머니 요게벳을 통해 모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바로 윗 선조였던 요셉과 에브라임의 하나님이 너와 나 그리고 우리 히브리 민족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배웠을 것은 자명합니다. 동시에 어머니를 통해 바로 조상의 하나님이자 우리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 그대로 우리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마침내 우리 계보를 통해 인류를 구속할 메시아가 탄생할 것임을 교육 받았을 것도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받은 교육대로 자기가 태어난 그 땅이 지금은 고난의 길을 가고 있지만, 그 고난의 길을 가고 있는 히브리 민족의 땅을 더 사모하며 그들과 함께 같은 고난당함을 기뻐하였다고 히브리서 저자는 갈파한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모세는 40세에 애굽에서 내쫓김을 당했어도, 80세가 되어 하나님의 미션을 받은 지도자가 되어 27-28절을 경험하며 뚝심 있게 지도자로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27-29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그렇습니다. 자신의 민족이 메시아가 선택한 민족임을 확신한 모세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바로와 맞섰고, 고센을 제외한 애굽 전역에서 장자가 사망하는 재앙이 임했을 때,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유월절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 믿음이 있었기에 도저히 건널 엄두가 나지 않는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는 기적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상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면서 우리는 모세의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모세의 믿음은 주군에게 눈을 고정하고 그 분을 보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절이라고 할 수 있는 2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조금 전에 언급했듯이 모세는 고센이라는 히브리 백성들이 살고 있었던 게토 지역을 자신이 왕자로 40년 동안 살았던 애굽의 세속적 부귀와 영광의 지역보다 더 위대한 지역이라고 여겼습니다. 비교가 안 되는 두 지역을 전제하면서 모세가 택한 지역은 메시아 지역인 고센이었습니다.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저는 이 구절에 담겨 있는 한 단어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라봄이라’ 이 단어는 헬라어 ‘아페블레펜’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원뜻은 이제까지 자기가 보던 일체의 것들을 버리고 새롭게 집중하려는 한 가지만 보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좋은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 번 나누어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3: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여러 교우들이 너무 잘 아는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후에 일어나 걷게 되는 기적의 장면입니다. 이 5개 구절에서 ‘보다’라는 단어가 무려 세 번에 걸쳐 나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세 단어가 모두 다른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보고’라는 단어 ‘에이도’는 의미 없이 본다는 단어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그냥 보이는 것들을 본다는 단어입니다. 두 번째 ‘보라’는 주목할 단어인 ‘블레포’입니다. 조금 전 히브리서 11:26절에 기록된 모세가 바라본 그 바라봄과 같은 단어인데 이 단어의 원뜻은 의미 있게 보는 봄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저는 매 주 두 권 정도의 독서를 합니다. 지난 주간에 김훈, 이정일, 정용섭의 글을 읽었는데 몇 몇 문장에 멈추어 다시 그 문장을 눈에 넣어 읽었습니다. 이정일 목사의 글말 하나 소개합니다. “자기 확신에 빠진 사람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질문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변화, 배움, 혁신은 없습니다. 묻지 않으니 독창적인 생각이 나오기 어렵고, 남의 걸 베껴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이정일,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156-157) 김훈의 글 하나, “나는 걸을 때 내 종족의 진화의 수억만 년을 삽시간에 돌파해서 아득한 생명의 기원에 당도한다. 그곳은 거칠고 싱싱한 나라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304) 마지막으로 정용섭 목사의 글감 하나, “목회 업적은 목사의 구원을 담보하지 않는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목회의 성공으로 행복한 목사는 없다.” (정용섭, “목사구원”, 75) 이런 글을 어떻게 집중하지 않고 읽을 수 있겠습니까? 멈추어 서서 다시 이 글말들을 ‘블레포’ 즉 다른 관심의 내용들을 다 접고 이 글을 뚫어지게 보며 집중하며 읽고 밑줄 그었습니다. 사람들은 감동이 되는 메시지, 그림, 상황 등등은 곱씹어 보게 됩니다. 세 번째 ‘바라보거늘’은 ‘에페코’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두 번째 설명했던 ‘블레펜’보다 조금 더 강한 표현의 ‘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냥 아무런 의지 없이 베드로와 요한을 멀뚱멀뚱 바라본 앉은뱅이가 의지 있게 바라보라는 두 사람의 강력한 권고에 힘입어 이제는 의지를 갖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았고, 결국 두 사람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는 걷게 되었음을 사도행전 3장이 보고한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아페블레펜’ 즉 집중하여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봄으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봄을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본문에서 표현했습니다. 27절입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그렇습니다. 모세는 주군께 집중하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군이시지만 보는 것 같은 모습으로 주군께 집중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집중해서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이 제일 먼저 보고 있는 것이 여러분의 믿음의 정도이자 수준입니다. 앞으로 12장을 강해할 때 다시 살피겠지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2:1-2절에서 배교의 위험을 갖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이렇데 믿음의 선진들을 속속 소개한 뒤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결론) 이제 설교를 맺겠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이정일 목사의 책에 나오는 글말 하나 소개함으로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조사한 중산층의 기준은 네 가지입니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 약자를 도울 줄 알고, 부정과 불의에 저항하고,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 잡지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프랑스 전 대통령 퐁피두가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은 다섯 가지입니다. 외국어를 하나 이상할 것, 스포츠를 하나 이상 즐길 것, 악기를 하나 이상 다룰 것, 남들과 다른 맛의 요리를 만들 줄 알기,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행하기입니다. 한국의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중산층의 기준은 다섯 가지입니다. 아파트 30평 이상 부채 없이 소유,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2,000 cc 중형급 자동차 소유, 1억 원 이상 예금 잔고 보유, 1년에 1회 이상 해외여행하기 등이었습니다.” (이정일 , 앞의 책, 261-262) 왠지 모르게 1:0 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조사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초라해지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결과 보고서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믿음의 중산층이 누구일까요? 5가지, 6가지, 10가지, 100가지를 소유한 자가 아닙니다. 믿음의 중산층은 단 한 가지, 주님을 보는 자입니다. 그냥 보는 자가 아니라 다른 보는 것에서 완전히 떠나 모세처럼 주군을 집중하여 보는 자가 믿음의 중산층입니다. 잠시 후, 썩을 것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 교우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찬양 할지라 주는 너의 큰 상급 큰 도움이시라 주의 얼굴 구할 때 주의 영을 부으사 크신 사랑 안에서 주를 보게 하소서~ 내 영혼이 확정되고 확정 되었사오니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바라봅니다. 내 영혼이 확정되고 확정 되었사오니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바라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내 사모하는 주님 온 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주님 다시 오실 때 까지 나는 이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