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11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43) 본문: 히브리서 11:8-22 제목: ‘지금 여기’와 ‘아직’을 살아내자 서론) 산문 하나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시골 어느 공원묘지에 묻혔다/ 이듬해 나는 방학을 이용해서/ 그 근처 친척집엘 갔다/ 우리가 탄 차가 할머니가 잠들어 계시는/ 묘지 입구를 지나갈 때였다/ 할아버지와 나는 뒷좌석에 함께 앉아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우리가 안 보는 줄 아셨는지/ 창문에 얼굴을 대시고/ 우리들 눈에 띄지 않게 가만히 손을 흔드셨다/ 그때 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처음 깨달았다” (이정일, “나는 문학의 숲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예책, 57-58) 이정일 목사가 소개한 이정하 시인의 너무 아름다운 산문인데 제게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삽니다. 사랑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과거와 현재를 산다는 것은 곧 미래도 산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를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은 물론 실패한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곧 현재와 미래에도 적용되는 공식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과거에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이 걸었던 그 길을 내가 현재에 읽고 있기에 나는 그 삶의 흔적들을 거울삼아 오늘과 내일의 반면교사 혹은 진면교사를 삼는 너무 중요한 여행을 하는 셈입니다. 공교롭게 우리는 수요 예배 설교 시간에 지금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강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지칭되는 아브라함의 강을 건너면서 때론 그를 통해 감동을 받고, 또 때론 그 때문에 분노하기도 하는 양가감정에 휩싸이곤 합니다.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분명 신앙의 선배 중에 긍정이든 부정이든 거인의 반열에 있는 선진이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만나야 하는 본문은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에 대한 믿음의 후손인 히브리서 저자의 평가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앞에서 살폈던 아벨, 에녹, 노아에 비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지면을 많이 할애한 것만 보더라도 아브라함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믿음의 선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신약의 인물인 히브리서 저자의 관점에서 본 약 3,000여 년 전의 인물이었던 아브라함에 대한 평가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나누는 아브라함에 대한 후손의 평가는 앞으로 저와 여러분의 후손들이 평가할 내용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주의 깊게 본문 여행을 떠나 보십시다. 본론) 먼저 8-11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창세기 강해를 통해 접근한다면 말할 것도 없이 본문에 적시된 아브라함이 바라본 성은 가나안일 것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의 본문으로 접근한다면 이 성은 이 땅에 존재하는 성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지를 조금 더 세밀하게 해석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어디인지를 모르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도착해 보니 그곳이 가나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창 12:7) 이 말은 다시 말씀드린다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도착했던 땅인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땅, 그리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읍이라는 인지를 1도 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거류하는 거류민으로 살았지, 그곳이 그가 거할 영원한 땅이라는 마음을 갖고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예로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경험한 기근이 닥쳤을 때 미련을 갖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이고, 이후에 또 다시 마므레 근처에서 기거할 때도 기근으로 인해 가축들에게 먹일 목초들이 떨어진 것을 알고 지체 없이 그랄로 장막을 옮긴 것입니다. 그가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왜 이렇게 해석을 해도 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가계도를 통해 생각해 볼 때 가나안이라는 땅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이라는 확신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손자인 야곱의 계대에 와서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었음을 창세기 35:12절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 10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고 표현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조재천 교수의 해석에 동의합니다. “놀랍게도 그곳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한 채로 아브라함은 떠났다. 떠나기 위해 아브라함이 알아야 했던 것은 땅의 위치가 아니라 그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선하심이었다.” (조재천, “히브리서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185-186)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이 주목한 것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나안을 향해 길을 떠난 것이며, 그가 도착한 땅이 어디였든지 상관없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을 믿었기에 가나안이라는 낯선 땅에서 살 수 있었던 것임을 히브리서 저자가 역설한 것입니다. 놀라운 통찰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중에 아브라함이 가졌던 10절의 믿음은 그의 계대를 이어 이삭도, 야곱도 함께 갖고 있었던 믿음이었고, 동시에 그의 아내였던 사라도 동참한 믿음이었다고 11-12절에서 저자는 말합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성경을 토대로 풀이해 보자면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인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하여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창 25:26) 더불어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향유한 나이가 175년이라고 했으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3대가 같이 산 햇수는 적어도 15년은 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저자가 9절에서 언급한 말씀은 충분한 설명이 됩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그렇다면 히브리서 저자는 왜 아브라함의 가족을 동원하면서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했던 것일까요? 이어지는 본문 13-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도, 사라도, 이삭도, 야곱의 계대까지도 그들은 이 땅이 영원히 거할 하나님이 약속하신 본향이라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강조한 셈입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나그네의 모습으로 낯선 곳에서 살다가 열조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낯선 땅이라는 괴로움 때문에 자기들이 거주하던 가나안을 버리고 그들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로 돌아갔다면 히브리서 저자는 절대로 오늘 같은 메시지를 히브리서에 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의 계대가 낯선 가나안에서 살았습니까? 하나님이 가나안이라는 땅을 약속하신 땅이라고 확신시켜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히브리서 저자의 신학적 성찰에 의하면 그들은 더 나은 땅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것입니다. 조금은 진부한 것 같지만 거의 다 왔으니 마지막 단락을 살피겠습니다. 17-22절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약하면 이런 메시지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믿음의 내용을 갖고 있었던 아브라함 가족들의 후담을 낱낱이 공개합니다. 17-20절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믿음으로 드리려고 했던 사건의 회상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려고 했던 엄청난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이 이삭을 책임지실 것이라는 완벽에 가까운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믿음을 전수 받은 이삭도 결코 믿음의 행위에 있어서 뒤로 후퇴하지 않았음을 강조합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남긴 믿음의 유산을 그의 아들들에게 남겼다고 증언합니다. 이삭의 축복을 받은 아들 야곱은 아들 요셉의 두 아들인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였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요셉은 자기의 죽음 이후 자기 뼈를 애굽에 매장하지 말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묻힌 땅에 묻을 것을 명하기까지 했다고 본문 20-22절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명시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믿음 행전 보고서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보고입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기초로 아브라함의 가계도를 통해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려고 했던 영적인 의도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 건강한 믿음이란 ‘지금 여기’와 ‘아직’의 긴장 관계가 균형 잡인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에 있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불편함과 부담감이 증폭된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버지 데라가 이미 이루어놓은 세속적인 금자탑을 포기해야만 갈대아 우르를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결심하고 아브라함은 익숙한 땅 갈대아 우르에서 낯설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가나안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본인에게 주어진 현재적인 상황(지금 여기에서)에 대해 적절하게 순응했음을 알려줍니다. ‘지금 여기에서’라는 신학적 테제는 나에게 주어진 실현된 하나님 나라를 외면하지 않는 성도들이 살아가야 하는 현장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현재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삶을 핑계를 대며 도외시하거나 경홀히 여긴다면 그것은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를 도외시하는 성도의 직무유기입니다. 반대로 성도가 ‘아직’이라는 의미를 갖고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구원의 감격을 누린 자로서 앞으로 주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가장 완벽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믿음을 잃지 않고 산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의 하나님 나라는 공존하는 나라입니다. 하나가 끝나야 그 다음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 나라입니다. 공존하는 이 두 나라 사이를 긴장감을 갖고 살아내는 성도가 건강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은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라고 볼 수 있는 ‘지금 여기에’라는 가나안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세우실 하나님의 터와 성읍을 믿고 살았던 믿음의 그룹이었습니다. 순간순간 실망시키는 일이 다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믿음의 후배들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성경을 존중하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루어진 구속사의 성취 또한 인정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 결국은 히브리서 저자의 말대로 이루실 하나님의 터와 성을 바라본 삶의 결국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례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과 18장을 비교해서 보면 우리는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한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고, 한 사람은 부자 청년관원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에 붓고 싸매고 주막으로 인도하고 가서 그를 보호해 달라고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부탁을 합니다. 돌아올 때 돈이 더 들었다면 그 비용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말까지 남깁니다. 반면 누가복음 18장을 보면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온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찾아온 그는 예수님께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두 가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라는 것과 가지고 있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자 전자의 일을 실천하며 살던 청년은 기뻐했지만, 후자의 명령에 큰 부담을 느낀 청년은 근심하고 예수님을 떠났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가 비교한 두 사람의 비교는 단순히 두 사람의 차이를 단순히 경제적인 부담을 짊어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단순 비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은 신학적 의도를 선언하기 위함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의 영적 삶에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고 또 그것이 결국 그에게는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겸비한 삶을 살아낸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복음서 기자의 기록이었습니다. 반면 부자 청년은 ‘지금 여기에서’의 신앙적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지 않았고, 그 결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에서 얻을 수 있는 영생의 은혜까지 잃게 되었음을 경종하려는 의도입니다. 오랜 전에 읽었던 인도 선교사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스탠리 존스 선교사의 글이 너무 의미심장하여 밑줄을 그어 놓았던 단락이 있어 소개하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금도 존재하는 분이신 ‘이 예수’를 강조한다. ‘이 예수’는 살아계시고, 지금도 유효하시고, 지금도 활동하고 계시며, 우리 안에서 존재 이유로 살고 계시며,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사용하고 계신다. 그분은 역사 속에 존재하신 ‘저 예수’도 아니고, 장차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실 ‘저 예수’도 아니다. 그분은 ‘이 예수’다.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를 바라보게 하시고, 자신이 지금도 개인과 사회의 구원자이심을 입증하신다. 그분은 지금 구원하시는 분이지만 현재에 갇힌 분이 아니시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저 예수’도 있고, 장차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실 미래의 ‘저 예수’도 있다. 하지만 그분은 주로 ‘이 예수’로 계신다. 그분은 과거, 현재, 미래에 다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미래도 같은 분이시다.” (스탠리 존스, “순례자의 노래”, 203.) 무시무시한 갈파입니다.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여기에서’와 ‘아직’의 긴장관계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기막힌 성찰입니다. 우리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여기에서’와 ‘아직’ 속에 동시에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은 ‘지금 여기에서’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에서도 살았습니다.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런 이유로 히브리서 저자는 실수 많았던 아브라함과 그의 계대가 행한 믿음의 보고를 히브리서 11장이라는 믿음의 장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며 후대에게 전한 것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10월에 교단 목회자 부부 세미나가 열립니다. 세미나 프로그램 중에 하나가 목사 안수를 받아야 하는 인정 전도사들의 의무 교육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단에서 인정 전도사 교육 중에 ‘목회자와 독서’라는 세션을 맡아 강의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수락했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더 열심히 천착하지 못한 것이 독서였기에 후배들에게 강의하는 시간, 목회자가 왜 독서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지를 강의하려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강의안에 김훈 작가가 그의 책에서 설파한 문장 하나를 삽입했습니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김훈, “연필로 쓰기”,11.) 저는 김훈의 글을 읽을 때마다 그가 말한 이 고백이 눈에 보입니다. 글쟁이로서 그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느낀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체취가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나라의 체취를 발하면서 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살아가는 치열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살기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오셔서 반드시 이루실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기대하는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는 대립하지 않습니다. 함께 공존하는 삶입니다. 이 건강한 믿음의 삶이 균형 있게 공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나의 안에 거하라 & 주만 바라볼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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