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이기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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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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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9-05-18 21:50: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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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의 “누구나 친절한 교회오빠 강민호”(문학동네, 2018년)를 읽고 책 말미에 문학평론가 김형중의 글이 이렇게 적시되어 있다.
“독자를 전혀 불편하게 하지 않는 소설은 훌륭한 소설이 아니라는 신념이 내게 있다.”(p,280)
이기호의 글을 읽으면 항상 느끼게 되는 감정이라는 사족까지 친절히 곁들이면서. 진보적 여성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수전 손택이 시몬느 베이유를 갈음하는 글에서 시몬의 상징을 대단히 의미 있게 단문으로 설정했던 글을 읽으며 무릎을 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렇게.
“시몬느 베이유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이유는 불온함과 온당함과 설득력 때문이다.”(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도서출판 이후 간, 2013년,p,85)
이유야 어떻든 금년 들어 소설로는 네 번째인 이기호의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오빠 강민호”를 경북 영양에 거주하는 권사님가정을 심방하러 가는 긴 여정 중에 손에 들었다. 책을 덮고는 두 가지의 감회가 스멀댔다. 첫째, 불편함 둘째, 불편함 뒤에 오는 설득력이었다. 김영하의 ‘오직 두 사람’과 만났을 때 들었던 비슷한 감정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독서 후의 감회였다.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글에 파묻히면서 흔들리는 차 안에서의 독서는 그렇게 난시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안 좋다는 데 무리를 한다고 바가지를 긁는 아내의 소리도 허공을 날려 보내리만큼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최미진은 어디로’
중고 사이트 관리자인 ‘제임스 셔터 내려‘에 의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소설가로 작가를 만나면서 왠지 모를 동변상련의 동질감을 느꼈다면 어떨까? 너무 심한 비약일까? 문학 작품을 자본주의적인 잣대로 서열을 매기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탄생되어지는 1류, 2류, 3류의 점수 매김은 목사로 살아온 나에게 성공한(?) 목사와 실패한 목사로 가늠 질하는 시류에 요동하는 천박한 잣대 들이대기를 보는 것 같아 찝찝해졌다. 상업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와 문학적 가치를 위해 배를 주려가며 글을 쓰는 작가가 같이 평가되는 아픔, 그래도 이 정도는 백 번 천 번 양보하여 침묵한다고 하더라도 후자를 인생의 실패자, 무능력한 패배자로 몰아가서야 도대체 미래가 보일까에 깊은 우울함이 깃들인다.
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뒤처지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앞서 나가는 것일까? 베이비부버인 필자는 고등학교 학창시절 별 보고 학교에 등교했다가 별 보고 학교에서 집으로 하교했다. ‘내가 졸고 있는 시간에 내 경쟁자의 책 페이지는 넘어간다.’ ‘사당오락’ 이라는 투쟁 문구를 공부하는 책상 앞에 붙여 놓고 오는 졸음을 물리쳤다. 그렇게 공부하는 것 말고는 딱히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확신하던 그 시절, 왠지 나보다 공부를 못하는 친구들을 보면 속으로 쾌재를 불렀고, 적어도 난 너희들이 땡볕에서 땀을 삐질 흘려가며 막노동을 할 때, 시원한 냉방 장치가 되어 있는 사무실에서 士 자가 붙어 있는 직함으로 너희들을 부리면서 살 것이라는 지금 생각하면 정신병자의 수준으로 기고만장했던 시절이 있었다. 누가 잘 사는 것일까? 필자는 나정만을 만나면서 거칠게 살았지만, 교양이 없어 보이는 난폭함은 있었지만, 때에 따라 거짓을 수단으로 삼았지만 그래도 법(LAW)이라는 있는 자들을 위한 괴물 앞에서 너무 약해빠진 법(law)으로 대항하려다 좌절을 맛본 뒤에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는 나정만이 도리어 잘 사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온한 생각을 해 보게 되었다. 교과서적인 삶을 강요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목사인 필자는 살짝 아래로 굽어 있는 삶의 군상들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던 나쁜 목사였다. 진정성은 교과서에 있지 않고, 언제나 현장에 있다는 것임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괜찮은 목사가 되었을 텐데.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700만 원의 이야기가 조금은 슬프다. 이중으로 송금한 채무의 빚을 돌려달라고 시위하는 한 남성, 소설을 다 읽기 전에는 표면적으로 그의 억울함을 이해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는 도리어 글을 읽은 내가 억울해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진정성이 있는 들어줌과 진의를 왜곡하는 보편적 주류들의 생각이 폭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권순찬을 불쌍히 여겨 700만원을 모금한 지역 주민들은 이 소설의 화자인 대학교수에게 그 돈을 전달하지만 막상 당사자는 돈 받기를 거절한다. 권순찬의 시위의 이유는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원한 것은 이중의 돈을 착복하고도 전혀 죄책 없이 나타나지 않는 무감각과 결판내는 싸움을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있는 자는 없는 자의 형편을 돈의 가치로 평가하여 없는 자의 인권을 유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없는 자의 진정한 원함은 존중받음인데도. 가끔은 니체의 말을 끄집어낸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호의’
가능한 이론인가? 착한 사람이 누구인가? 나보다 못한 자를 생각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면 착한 자인가? 존중받는 호의는 무시한 채로.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 그리고 오래 전 김숙희
필자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 혐오주의자는 더 더욱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사랑하는 한 여인을 만나서 그녀를 사랑하며 30년 세월을 살아온 지극히 평범한 남성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박창수와 김숙희는 필자에게 대단히 불편한 주인공들임에 틀림이 없다. 두 사람의 만남 자체에 대한 불편함은 백번을 양보하더라도 부부로서의 삶 자체에 대한 질곡이 몹시도 필자를 불편하게 했다. 아내 김숙희는 남편 박창수의 성실함이라는 흔치 않은 여성으로서의 혜택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 혜택이 불편했다. 이로 인해 만난 정재민과의 불륜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급기야 최소한의 윤리적인 책임감에 초기에 괴로워하던 김숙희는 남편에게 자신의 비윤리적인 행위를 실토했다. 문제는 그 이후다. 박창수는 아내의 불륜 사실을 고백 받았지만 반응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전 그대로 남편으로서의 책무를 다한다. 아마도 이것이 김숙희를 더욱 숨 막히게 한 이유였다면 이유다. 결국 김숙희는 남편을 고의 살해하고 사고사로 둔갑시켜 십 수 년을 산다. 물론 정재민과의 관계도 정리하고. 정재민의 내레이션 형식으로 진행된 이후 사건을 기록한 ‘오래 전 김숙희’는 공소시효 만료 전 김숙희가 양심고백을 한 것을 토대로 진행되는 스토리다. 아무렇지 않았던 과거의 일로 묻힐 번한 박창수 살해 사건의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는 정재민은 살해의 공범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전혀 관계없는 자도 아닌 경계선에서 김숙희와의 과거의 일을 무덤덤하게 진술하는 과정을 만나면서 소름이 돋았다. 왜? 그의 진술은 그냥 있었던 일,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몸 소리 쳐지는 글을 만나면서 생뚱맞은 생각을 해 본다. ‘페미니즘’ 혹은 ‘여성혐오주의’가 도리어 인간적인 것을 아닐까! 라는 도발 말이다. 왜? 그건 그래도 뭔가 부정적이라도 감정이 있는 것이니까. 물론 정답은 아니다. 말도 안되는 궤변이라는 것도 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더불어 전혀 무감각한 상태로 전개된 박창수, 김숙희, 정재민의 이야기가 생각할수록 기분 나빴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평론가 김형중은 본서에 대한 평론 중에 이런 단어를 도입한다.
‘빌어먹을 윤리적 태도“(P,280)
윤리적인 요구가 빌어먹을 짓이라고 비난을 받아도 그 윤리가 살아서 꿈틀대는 인간 군상의 이야기가 있을 때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요 며칠 사이에 한 야당 정치인이 현직 대통령에게 쏟아낸 한센병자 수준이라는 비유가 몰매를 맞고 있다. 아무리 막가는 상황이라고 해도 비유할 걸 비유해야지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이렇게 몰지각한 수준의 인사들이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주름 잡고 있음이 울고 싶을 정도로 아프고 또 아프지만 한센병 환우들이 분노했으면 좋겠다. 그래도 살아서 움직이는 감동과 감각이 육체적인 질병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는 것을 천박한 자들에게 교훈으로 알려주었으면 해서 말이다. 동시에 분연히 분투해 주는 저들의 삶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싶다. 무감각처럼 큰 아픔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 아무리 빌어먹을 윤리라고 윤리와 도덕이 냉대를 받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시대이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윤리가 버젓이 존재하는 세상이 결코 종말을 맞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 글에 대한 리뷰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한 동안 멍했던 한 줄 글이 나에게 그로기펀치를 먹였다.
“강민호의 친절은 우리나라 교회처럼 탐욕스럽다.”
출처를 확실히 알 수 없는 한 블로거의 평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강민호는 윤희에게 심리적 타격을 입힌 완전한 타자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고향 교회 동생인 윤희를 다시 기독교로 회귀하도록 또 다른 교회 친구인 종수에게 요청받은 민호는 윤희를 만나 설득한다.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 때 동정심이나 연민이 아닌 진정성을 담보로 한 마음을 움직이는 접근이 필요한데 민호는 여전히 윤희에게 이유가 있는 호의로 다가선다. 교사로 일하고 있는 윤희가 종교적인 위화감으로 교직을 박탈하게 될 때 채권자인 본인의 가정에 빚을 갚지 못할 것에 대한 염려를 포장한 호의가 숨어 있다. 제 삼자에게 자신의 위치를 긍정적으로 공고히 하기 위해 보여주는 호의가 민호에게 있다. 차라리 호의를 보이지 않는 편이 나은 불편한 호의 말이다. 작가는 왜 강민호 앞에 수식어를 교회오빠로 명명했는지 충분히 수긍한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비쳐지는 기막힌 참극의 결과물을 보는 것 같았기에 현직 목사로 살아가는 필자는 아프고 힘들었다. 호남신대 조직신학 교수인 최유진은 이렇게 갈파했다.
“동정심은 대상에 대한 우월성을 전제한 개념이고, 동감은 자아수준에서 타자를 상상적으로 재구성하여 자아와 타자의 차이를 보지 못하게 하는 개념인 반면, 공감은 결합과 상호의존성을 기반으로 하여 자아와 타자 사이의 건강한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을 갖게 해 주는 것이다.”(혐오와 여성신학, 동연 간, p,182)
적용한다면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는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와 소통을 동정과 동감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긴장할 것은 오늘 내가 섬기는 교회가 그런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가 탐욕스럽다고 비난을 당하는 것에 대해 딱히 방어할 기제를 찾지 못하는 것 또한 유감스럽다. ‘누구에게나’는 고사하고 ‘살려달라고 손 내미는 대상 어떤 이’에게만 이라도 친절한 조국교회 그리고 내 교회이었으면 좋겠다.
한정희와 나
아내의 이복오빠 딸 정희를 당분간 맡아주기로 한 이후 경험했던 화자의 내적인 소회를 작가는 진솔하게 피력했다. 아내가 청소년 시절에 경험했던 비슷한 아픔을 근원적으로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정희와의 한 지붕 동거는 결론적으로 UNHAPPY ENDING 으로 종영했다. 화자는 글에서 이렇게 독백한다.
“내겐 환대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정말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PP,265-266)
읽다가 이런 오기가 들끓었다. 소설 속의 화자가 질문할 내용이 아니라 설교자인 내가 매일 질문할 내용이지 않은가의 오기 말이다. 작가는 마지막 단편에서 독자들에게 위선과 진정성을 묻는다. 답하기가 쉽지는 않은 물음이지만 분명한 독서의 결과물은 이렇다.
“완전한 답을 찾아낼 수는 없지만 묻고는 살아야 한다.”
이것을 포기한 교회, 목사는 차라리 목사 로브를 벗자. 그게 정직한 것이니까. 자꾸만 잊으려고 의도해도 이 말이 나를 타격한다.
“강민호의 친절은 우리나라 교회처럼 탐욕스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