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임홍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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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웨일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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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9-08-19 20:3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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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홍택의 “90년생이 온다.”를 읽고 아들이 90년생이다. 그러니까 한국 나이로 30세가 되는 나이다. 사석에서 아들이 이런다. “아버지, 이제 저도 서른이에요.” 난 서른이란 단어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말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아들이 복기해 준다. 아들의 말이 듣기에 따라 어감이 다르지만 난 두 가지 감회가 있다. 핏덩이로 신생아실에서 아들을 처음 보았을 때가 엊그제인데 정말 그랬다. 아들이 서른이 되었다는 것, 또 하나는 서른이 된 아들을 낳은 나는 그만큼 황혼의 나이로 접어들고 있다는 숨길 수 없는 세월의 흔적. 이번 달에 83쇄를 찍은 임홍택의 ‘90년생이 온다.’를 손에 들은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직원들에게 선물한 책이라는 분명한 나비 효과 덕도 있지만 아들과 조금은 더 진솔하게 소통하기 위함이 더 큰 목적이었다. 오늘 책을 덮고 난 소회는 2년 전에 ‘82년생 김지영’을 읽었을 때보다 조금 더 버겁다는 씁쓸함이 있다. 왜? 분명한 것 하나는 90년생을 너무 몰랐다는 자괴감은 아니라는 점이다. ‘82년생 김지영’을 만났을 때,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문제는 90년생들을 응원할 수 있을까?에 차원으로 서평을 쓰자니 필자의 양심상 쿨하게 김지영처럼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임홍택의 너무나 적확한 90년생들에 대한 통찰과 이해에 박수를 보낸다. 어떻게 이런 예리한 분석과 해석을 할 수 있었을까를 자문하면서 너무 통속적이지만 역시 카이스트맨은 카이스트맨이네! 라는 수긍을 하게 하는 그의 지성적인 결과 보고에 독자로서 만족했다. 그런데도 왜 고개를 끄덕일 수만 없다는 소회가 필자에게 밀려왔을까? 그런 분명 목사로서의 직업의식 때문이다. 작가의 언어와 90년생들의 고유명사적인 대표 언어로 대입한다면 꼰대적인 발상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 페친이 공유한 정보 중에 성남에 위치해 있는 모 교회를 담임하는 여성목사의 설교를 보았다. “반일감정 내세우자 말라”, “일본의 보상금으로 잘 살게 된 것에 감사를 잊지 말자.” 뭐 이런 류의 발언을 내 뱉은 공유의 글을 읽다가 그 글에 댓글을 단 또 다른 한 명의 목회자의 소회를 보았는데 이랬다. “보수주의의 탈을 쓴 한국형 패쇄적 근본주의 기독교 정말 지겹고 역겹습니다. 일베를 제외한 젊은이와 지성인들이 기독교를 외면하고 개독교로 회화화시키는 것이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니 현 추세라면 다음 세대는 다음에 없습니다.” 불현 듯 나에게 스친 불길함이 이것이었다. “그러니 현 추세라면 다음 세대는 다음에 없습니다.”의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도 90년생들이 주축일 텐데. 불길함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1990년생인 필자의 아들이 만나야 하는 세대가 바로 이들 다음 세대이기 때문이다. 1990년생 예비 목회자 아들을 둔 에비는 이래저래 곤혹스럽다. 책을 읽으면서 90년생들의 심리적 정서에 따른 사고, 철학, 취향,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이데올로기까지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겠다는 다짐으로 읽었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90년생들과 참 많이 가까워진 듯 한 착시현상이 나에게 스며든 것이. 임홍택의 말 중에서 틀린 분석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 90년생과 함께 가려면 임홍택의 말에 경건한 마음으로 아멘 해야 한다. 헌데 아멘이 인 된다. 도리어 꼰대 기질이 앞선다. 어떻게? 그러면 교회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작가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본 서에서 다루지 않았기에 그런 표현은 없지만 충분히 추측 가능한 결론을 이렇게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곱 살의 엘리스가 경험한 이상한 나라! 90년생들이 교회를 엘리스가 경험한 이상한 나라로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여러 차원의 몸부림들이 보인다. 아마도 그 스타트의 전형적인 효시가 혹 seeker service 는 아니었는지. 혹 emerging church는 아니었는지, 혹 positive thinking은 아니었는지, 혹 prosperity theology는 아니었는지. 기성세대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90년대 생들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이다. 더군다나 교회의 꼰대인 나는 더 더욱. 그래서 독서 후기는 우울하다. 평을 마치면서 작가가 에필로그에 남긴 한 문장이 그나마 꺼져 가는 숨을 쉬게 하는 산소호흡기 같은 소리로 들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소개해 본다. “기성세대가 되면서 느끼는 진리는 이 세상 속에서 나의 힘 하나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p,331) 필자도 이렇게 자위하기로 했다. “지난 목회 30여 성상 동안 나의 힘으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다. 90년생들을 향한 교회의 역할 역시 당신의 힘으로 하시겠지.” 그래도 이 말은 하나, 교회가 고객에 맞추는 마케팅 교회가 되느니 차라리 교회 문을 닫자.
ps: 아들이 90년생 선두니까 90년대 생들을 위한 목회는 그가 하겠지 뭐. 난 뒷방 늙은이로 물러가 중보로 힘을 보태기로 마음먹는다. 독서 후기가 씁쓸한데 그래도 책은 잘 읽은 걸까?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