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대니얼 I.블록 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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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새물결플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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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9-10-12 21:3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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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부제: 구약 설교의 이론과 실제)” 읽고 (차준희역. 새물결플러스, 2019년) 역자가 사역하는 한국구약학 연구소에 이사로 있다는 이유로 친구는 책이 나오면 한 권씩 필자에게 보낸다. 너무 고마운 일이다. 그러면서 사족을 하나씩 단다. “서평 써서 보내” 몇 년 전에 역자가 저작한 ‘열두 예언자의 영성’(새물결 플러스)이라는 작품에 대하여 왠지 모를 부담감에 나름 정성스럽게 서평을 작성해서 보냈는데 그 서평의 용도가 어땠는지에 대한 후 반응이 없어서 괜한 짓 했다는 생각에 이후 역자가 저술한 책은 읽는 즐거움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허나 역자가 워낙 깐깐해서 책을 받으면 그때부터 머리가 특별히 가려운 것을 많이 느끼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필자를 향한 저주가 드센 것이 분명해 보여 이번에는 다시 한 번 친구가 역자이지만 그의 정성이 갸륵해서 졸필이지만 다루어 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번역서에 대한 서평을 쓰노라니 먼저 번역에 관한 웃픈 추억이 떠오른다. 신학교 학부 4학년 때 은사 교수님이 필자가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것을 아시고 원서를 하나 내미시고 번역 아르바이트를 시키셨다. 당시 교육전도사 사례로 필자가 받던 사례비가 110,000원이었는데 선생님이 아르바이트 이후에 제게 주셨던 물질은 4학년 2학기 등록금이었으니 약 4배 정도가 되는 큰 물질이었다. 당시 사례비 말고는 특별한 소득이 없었던 내게는 마지막 학기 등록금을 걱정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게 해 준 단비 같은 도움이었다. 나름 최선을 다해 번역한 교수님의 책은 역자 아무개 교수라는 인쇄로 출간되어 구약을 전공하는 구약학도들에게 교과서 같은 책으로 이후 읽혀졌다. 조금의 섭섭함은 프롤로그에 필자의 이름 석 자는 그래도 교정을 보았다든지 등등의 간접적인 방법으로도 거론해 주실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아 그게 당시에는 왜 그리 섭섭하든지 조금은 유감스러웠다. 철없던 시절의 객담이다. 이에 반해 친구는 이 책의 탄생을 알리는 보고 속에서 초벌 번역과 이후 완성본에 이르기까지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후배 교수와 대학원생들의 노고를 치하한 것을 보면 내 친구다워 보여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필자는 아주 가끔 SNS나 전화를 통해 사역의 필드는 다르지만 서로 격려하곤 한다. 동시에 격려와 더불어 때로는 비평적 충고도 아끼지 않는다. 역자는 필자에게 구약 신학적인 성찰과 본문 텍스트에 철저한 이해를 압박한다. 그럴 때, 아주 가끔 자존심이 상할 때가 있기는 있지만 친구보다 성서신학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죗값을 달갑게 받는 편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사역의 현장에서 천박하지 않은 구약 설교의 지평을 여는 행운을 친구를 통해 받는다. 예컨대 필자는 섬기는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접근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본문인 12 소 예언서 강해를 마쳤다. 특히 일주일 동안 특새를 할 때면 힘들고 벅찬 일이기는 하지만 집요하게 성서 텍스트외 씨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도무지 내 힘으로 주석이 힘든 부분이 나오면(원어적인 주석이 필요한데 SECONDARY SOURCE로도 해석이 안 될 때) 친구에게 쪽팔리지만(?) 도움을 요청한다. 그 때마다 정신이 번쩍 나게 만든 장본인이 역자다. 출애굽기 32장에 등장하는 금송아지 사건에 실마리가 되는 ‘송아지’로 번역한 ‘에겔’에 얽힌 시대적인 해석이나, ‘뛰놀더라’의 번역인 ‘짜헤크’의 히브리적인 해석의 도움이 그랬다. 예레미야 20:7절에 대한 친구의 도움은 충격이었다. ‘파타하’(남의 여자 후리기) 와 ‘하자크’(강간하다.)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하나님께 대들던 예레미야의 메시지 전언도 필자에게는 적지 않은 신선함과 도전을 준 친구의 대표적 도움이다. 이렇듯 이 책의 역자인 친구는 필자에게 좋은 구약 선생님임에 틀림이 없다. 반면, 이제부터 말하려는 설교에 대한 필드가 되면 주눅이 든 필자는 조금은 어깨를 핀다. 아주 가끔 친구가 설교에 대한 평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러면 필자는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편이다. 이미 웬만한 지인들이 주지하다시피 친구는 한국에서 부흥회에 제일 많이 불러나가는 유명 강사다. 그만큼 대중 설교를 잘한다는 의미를 전제한다. 그럼에도 그의 설교에 대하여 평을 할 때 칭찬보다는 예리하게 지적을 더 하는 이유는 콘텍스트의 관한 민감함 때문이다. 구약학자이기에 성서 텍스트에 대한 주석적인 접근, 그리고 통찰에 대한 신학적 근거에 대하여 논할 때 필자가 그것에 대해 가타부타 운운할 수는 없다. 그의 지적인 능력에 비해 필자는 턱없이 부족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자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 이유는 신학자가 객관 하는 설교를 들어야 할 대상자들에 대한 프락시스적인 통찰은 아무리 설명을 해도 현장 목회자가 아닌 역자가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목회 현장의 다양성에는 신학교의 현장과는 비교될 수 없는 희로애락이 있다. 메신저의 문제가 아니라 메시지가 유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이 정도의 견해 차이로 역자의 설교 해석을 정리하고 더 이상 논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쩔 수 없는 신학과 목회 현장과의 긴장선이기에 말이다. 이제 책으로 들어가자 역자가 번역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본서를 읽으면서 이런 소회가 임했다. “틀린 말이 없는데 왜 심장이 안 뛰지!” 자문하고 나서 자답한 것은 아마도 지금까지 앞에서 논한 필자와 역자와의 긴장 관계 바로 그것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13개의 장(章)에서 각 분야의 내 놓으라는 구약 성서의 전문가들이 분석한 구약 성서 설교하기를 들춰보다가 이런 짙은 소회가 임했다. 목회자로 살아온 나, 더불어 앞으로 목회자가 되기 위해 수고하는 신학도, 그리고 모든 설교자들이 구약을 그 동안 얼마나 엉터리로 전했는가를 반성하는 좋은 길라잡이로 삼아야 하는 수작이라고 말해도 정말로 괜찮은 번역서가 탄생했다고. 해서 이 책을 통하여 구약 성서 텍스트를 그동안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얼렁뚱땅 악용했던 일체의 일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선용의 도구로 사용해야 하겠다는 긍정의 평을 남기고 싶다. 예컨대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말대로 율법 설교에 즈음하여 “구약 성서와 신약성서의 차이점에 대해 말하면서 구약성서의 구원은 율법준수에 의한 것인 반면에 신약성서에서의 구원은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서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P,93)라는 직설은 오늘 필자와 같은 목사들이 신구약의 구원에 관한 메시지를 말도 안 되는 이분법적인 양비론으로 굳히고 있다는 점에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벼락으로 다가왔다. 페데리코 빌라누에바의 선명한 지적도 아로새겼다. 일반적으로 성서에 등장하는 탄원시를 만났을 때, 독자인 우리는 단순히 경험에 대하여 시인이 말하고 있는 정도로 이해했지만 적어도 탄원시를 나의 탄원의 삶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상상으로 그 탄원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P,146)는 그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왜? 목회 현장은 특히 공동체의 지체들과 지인들이 겪고 있는 수없이 많은 삶의 이야기들에 함께 참여해야하는 무궁무진한 스토리 필드이기 때문이다. 지금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수요예배 시간을 통하여 욥기 강해를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 그랬는지 르렘퍼 롱맨 3세의 지혜 설교하기 중 욥기 설교 하기는 나에겐 더욱 더 큰 흥미의 대상이었다. 어느 정도 기대는 했지만 한 문장에서 수구적인 욥기 해석자들은 쌍수를 들고 공격할 내용이겠지만 필자에게는 61번째의 강해를 마친 욥기 강해가 틀리지 않았다고 무릎을 치게 만들어 주어 박수를 칠 수 있었던 글을 보았다. “욥은 자신의 불평을 하나님께(to God)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에 관해(about God) 불평한다.”(p,211) 이 문장은 칼의 앙면과도 같은 해석이다. 왜? 욥이 완벽하다고 말하고 있는 기존 해석을 전도(顚倒)시키는 명 해석이라는 점에서 필자를 움직였고, 또 하나는 깊은 통찰자만이 가질 수 있는 해제 즉 욥의 목적은 세 친구와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었다는 본내를 들킨 셈이라는 점에서 신선했다. 이렇게 말하면 르렘퍼 롱멘 3세나 필자가 대단히 믿음 없는 자라고 치부할 사람들이 있기에 노파심으로 미리 말한다. 필자는 이 점에 대하여 결코 부정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어떻게? 하나님께 대드는 것은 믿음이 없는 행위가 아니라 도리어 믿음대로 사는 자의 역동이라고 나는 언제나 해석한다. 그러기에 르렘퍼 롱맨 3세의 갈파는 대단히 통쾌한 역설이다. 이제 섬기는 교회에서 진행하는 욥기 강해가 반환점을 돌아 욥의 최후 변론인 29장에 들어선다. 끝까지 난 하나님과 씨름하는 불온한 욥을 그리려고 한다. 야단을 맞아도 욥이 세 친구들보다 옳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의 선택은 치열함 속에서 결정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결론을 맺고 싶기 때문이다. 역자가 밉다. 누가 이렇게 두껍고 재미없는 책을 읽겠나 싶어 말이다. 필자의 또 다른 친구가 있다. 역자하고는 둘도 없는 친구다. 그가 필자의 두 번째 저서인 ‘김기석 목사 글 톺아보기’를 출간했을 때 이렇게 놀렸다. “야, 톺아보기라는 단어부터가 어려운데 이 책을 누가 읽겠냐?” 내가 보기에는 450페이지가 되는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둘 중에 하나다. 필자처럼 서평을 써서 보내주지 않으면 꿈에 나타나 저자가 괴롭히는 것이 두려운 자이든지, 아니면 그의 제자들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한 마디는 서평에 담아야 하겠다. 읽은 게 억울해서라도. 이 책의 절정은 그래도 모벌리의 CHAPTER 13장이다. 그의 글 제목은 ‘구약으로부터 그리스도 설교하기’다. 압권은 제 2 이사야의 49:16절의 적용이었다.(P,444)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모벌리는 이 구절을 도마와 관련한 예수님의 사건으로 적용했다.(P,445) 설교자가 추적해야 하는 관점은 처음 오신 예수와 약속대로 오신 예수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이어야 한다. 이것이 배제된 설교는 그 텍스트가 구약이든 신약이든 설교일 수 없다. 필자는 설교를 준비할 때 항상 원고 작성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원고가 탈고될 때 용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혈이 떨어지게 하옵소서. 이 선혈이 배어 있는 설교만 탈고되게 하옵소서.” 폼 잡는 것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절규다. 서평을 마감하면서 총평을 내고 싶다. 다시 말한다. “틀린 말이 없는데 왜 심장이 안 뛰지!” 혹평하는 말이 아니다. 이 글의 독자층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전제한다면 당연하다. 목사로 사는 나에게 구약을 설교해야 하는 나에게 친구는 좋은 책을 번역해 주었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는 지성적 성찰에 최선을 다하려는 성도들이 꽤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책을 읽어야 하는 독서 대상이 아니다. 그러기에 심장이 뛸 리 만무다. 그러나 에두르고 싶다. 심장은 안 뛰어도 구약 성서를 잘못 전하지는 말자. 그건 범죄행위이다. 적어도 설교자에겐. 이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친구가 번역한 이 책을 손에 들기 바란다. 준희야! 재미없는 책 번역하느라 수고했다. 박수를 보낸다.
PS: 주일 설교 원고 암송하고 쉬어야 하는데 글을 쓴 강덕이를 축복하는 화살기도 한 번 쏴라. 친구의 승리와 건강을 중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