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욕망의 페르소나2024-06-11 09:42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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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김기석
ㆍ출판사 예책
ㆍ작성일 2019-10-26 21:46:36

 

김기석의 ‘욕망의 페르소나’(예책, 2019년)를 읽고


김훈은 ‘연필로 쓰기’를 열면서 이렇게 말했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지독한 글쟁이의 멋이다. 하지만 이 멋을 멋으로 멋 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투쟁이 있었는지는 글쟁이가 아닌 사람은 모른다. 나는 그래서 김훈을 존경한다. 적어도 글쟁이의 선배로서.
시인 이성복은 대학원에서 시 창작 수업시간에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내용을 아포리즘 형식으로 구성한 ‘무한화서’에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남겨 놓았다.
“삶과 글은 일치해요. 바르게 써야 바르게 살 수 있어요.”(p,167)
이 글을 처음 만났을 때, 쿵했다. 왜?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사전적 지식은 ‘바르게 살아야 바르게 쓸 수 있다.’에 매몰되어 있었기에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복은 글쟁이의 자존감이 어떤 정도의 위상인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참 오랜만에 김기석의 글을 들었다. 졸저 ‘김기석 글 톺아보기’ 출간 이후, 꾀가 났던 것이 오랜만에 그의 글을 들은 이유 중에 하나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따라잡아야 할 독서의 무게감, 그리고 이성복의 말대로 바르게 살아내야 할 부담이 천근만근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무조건 읽어야 했다. 졸저 ‘시골 목사의 목양심서’를 김 목사께 보내자 답물 형식으로 보낸 준 책이기에 왠지 모를 책임감이 압도했다. 해서 그의 글을 읽었다. 읽으면서 또 한 번 옛 생각이 스멀댔다. 내 것이 있는가? 에 대한 강력한 도전을. 저자는 남의 이야기를 인용하며 그의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다. 저자는 철저히 자기의 말로 해석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내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내 것’은 독서의 내공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역량(capability)이다.
저자는 15개의 장에서 익히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성경 텍스트를 발췌하여 콘텍스트에 적용하여 해석한 자기의 글을 이 책에 실었다. 필자는 두 졸저(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 2016년 동연, 시골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 2018년, 동연)를 통해 김 목사의 글 16권을 북 리뷰 했다. 조금 비평적인 논평을 내놓자면 그의 후반기 작품들이 전반기 작품에 비해 체력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연이은 책 출간은 어떤 의미에서 고갈을 재촉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이것을 느꼈던 필자이기에 또 오랜만에 손에 잡은 그의 책에 대한 염려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지만 필자의 감각이 떨어졌으면 떨어졌지 이번 책에서 다시 저자의 기개 넘치는 필력을 확인했고, 동시에 그의 내공을 영적으로 공유하게 되어 무한 기뻤다. 몇 가지만 필하자. 몇 가지만 필하는 이유는 나중에 밝히려고 한다.
마태복음 20장에 수록된 포도원 농부의 텍스트에서 그는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진 이유를 산술적인 공평함이 아닌 생명 중심의 사고 능력 저하’라고 저자는 진단했다. 正打를 날린 셈이었다.
창세기 19장의 무대인 소돔과 고모라 텍스트에서 롯의 처를 근거하여 신앙을 정의했다. 이렇게.
“신앙이란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가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라는 말입니다.”(p,36)
그래서 나는 신앙을 현대인인 즐기는 레저 활동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오늘의 크리스천들의 천박함에 비수를 날렸다는 데에 동의하여 지난 주일예배의 설교 원고에 이 글을 삽입하기도 했다.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자비의 집)에서 벌어졌던 생존 경쟁의 살벌함을 빗대 오늘의 베데스다와 한국교회가 너무나 닮았다는 저자의 一波를 일으키는 공격적인 도발에 항변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당함에 몹시 괴로웠다. 왜? 내가 섬기는 교회가 혹시 베데스다가 아니라 경쟁이 지배하는 승자독식의 세상이 아닐까!(P,217) 해서 말이다. 만에 하나 그렇다면 몸서리 처지는 악몽이다. ‘타인은 내게 있어 지옥’이라는 샤르트르의 독설이 전혀 발붙이지 못하는 공동체가 세인이기를 바라며 두 손을 모은다.
저자는 거침이 없이 교회가 교회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타인에 대하여 품고 관심을 가질 것을 강력하게 권고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함께 나란히 있음’(MIT-EINANDER-SEIN)으로 설명했다. ‘너’를 부정하는 순간 ‘나’도 부정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타자는 지옥이 아니라, 나의 존재 조건이다.”(p.218)
이 글을 접하면서 부버의 일침이 떠올랐다.
“사람은 ‘너’에게 접함으로 ‘나가 된다.”(마틴 부버, “나와 너”,p,47,2017.)
예수께서 승자독식의 무시무시한 경쟁의 장이었던 베데스다 연못에 38년 동안 누워 있어야 했던 타인에게 말하셨다.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이 자리 판을 들고 일어서 가라고 선포하는 주님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리타이어(retire)하여 또 다른 삶을 신선한 구도자적인 자세로 살고 있는 신학교 선배를 몇 주 전에 만났다. 평생을 조직신학자로 살았던 존경하는 선배는 만남의 자리에서 이렇게 당부하셨다.
“이 목사, 책을 읽으면 치매도 안 온단다. 계속해서 더 좋은 독서의 흔적을 남겨 주는 후배가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나는 물론 내 사랑하는 교회가 영적 치매에 걸리지 않도록 ‘너’에게 접하는 ‘나’를 조각해 나아가는 데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려고 한다. 김기석 목사의 글들은 이런 점에서 치매 예방 주사다.

사족 하나)

나에게는 아주 못된 친구 한 명과 아들 한 명이 있다. 항상 글을 쓸 때마다 그들이 어른거린다. 이렇게 소리를 치는 것 같아서.
글 좀 길게 쓰지 마!
김기석 목사의 “욕망의 페르소나” 에 대한 글감의 1/10도 여기에 적시하지 못했다. 저들 때문에. 맛보기를 전했으니 조금 더 그의 글에 천착하기를 원하는 독자는 다음의 글을 주목하여 주기를 바란다.
김기석저, “욕망의 페르소나”, 도서출판 예책, 2019년) 

사족 둘)
 

내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원고는 A⁴ 용지 6장이다. 교우들이 너무 좋아할 것 같다. (9장이 기본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