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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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복 있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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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9-12-03 17:16: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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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람 조슈아 헤셀의 ‘안식’(아브라함 조슈아 헤셀, “안식”,김순현역, 복 있는 사람, 2019년)을 읽고 월터 브루그만이 남긴 여운은 아직도 잔잔하다. “안식일이 없는 실존은 우리 뜻대로 살아 나갈 궁리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상품이 쌓여 있고, 우리는 그 상품들 앞에서 엎드려 절한다. (중략) 안식일이 없으면, 하나님 자신이 쉬신 것에 뿌리를 두고 우리와 함께 쉬어야 할 우리의 이웃에게까지 확장된 쉼을 깨닫게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쉼을 알 때까지, 우리의 상처와 두려움과 탈진 상태를 붙들고 쉼이 없는 채로 버려진 자들이 될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 “안식일은 저항이다.”, 복 있는 사람, P,171) 이렇게 브루그만에게서 주목할 수 있었던 것은 안식일을 타인과의 관계성으로 풀어 나갔다는 점이었다. 특히 그가 감동으로 해석한 제 3 이사야의 글은 압권이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3-7) 외국인, 고자, 여성에 대한 차별을 안식일이 무너뜨렸다는 대단한 감동으로 이사야는 선포했는데 브루그만은 제 3 이사야의 이 메시지를 배타주의의 척결과 포용주의 원리 강조라는 안식일 신학으로 재해석해 내는 탁월함을 보여주어 같은 신학의 성찰을 하고 있었던 나는 독서하며 정서적으로 강력한 지지를 보냈던 기억이 있다. 리젠트 칼리지의 미르바 던 이야기를 하나 삽입한다. 던 교수는 안식일을 네 가지의 가지치기로 설명했는데 신선하고 탁월했다. “그침(ceasing), 쉼(resting), 받아들임(embracing), 향연(feasting)”이다. 나는 던 교수가 재해석한 안식일의 신학적 통찰 중에 특히 ‘받아들임’에 천착했다. 그녀는 안식일이 행해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 중에 하나를 이렇게 갈파했다. “안식일 지키기는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 일은 우리를-칠일마다 자신의 개인적인 ‘종교’ 영역으로 물러나는 별난 사람들로서-세상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를 세상과 그 필요 속으로 더 깊이 밀어 넣는다. 왜냐하면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를 하나님의 가슴과 목적으로 더 깊이 이끌기 때문이다. 즉 쉼을 통하여 온전함, 질서, 새롭게 된 마음, 되살아난 영, 힘을 얻은 정서, 건강한 몸, 진정한 관계, 성숙한 자의식으로 이끌어 세상의 여백들을 이해하고 끌어 안아주는 견인차의 역할을 해 주기 때문이다.”(미르바 던, “안식”,IVP,p,173) 대단한 파격이다. 주일성수라는 말을 젊은 시절, 너무 많이 들었다. 주일에 음식을 사지 않도록 무섭게 경책했던 고향 교회 담임목사님의 포효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그런 줄 알고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을 온전히 지키며 산다는 자들이 너무 막 사는 것을 보고 자랐던 나는 그들의 이율배반적인 삶의 행태로 한 때, 신앙 자체를 흔들렸던 적이 있게 만든 대표적인 웃픈 추억이다. 적어도 앞서 언급한 월터 브루그만의 안식일의 신학적 정체성과 미르바 던의 해석을 알지 못했기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였다. 안식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을 한 브루그만과 던은 참 귀한 일을 했다. 이렇게 귀한 일을 한 두 사람에게 먼저 안식에 대한 개념을 강타한 사람이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이다. 특히 그의 걸작인 ‘안식’은 오늘날 목회자들이 의미 있게 섭렵하여 사역하고 있는 현장에서 평신도들에게 정직하게 가르쳐 주어야 할 모본과도 같은 책이다. 단순히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 거듭난 신자의 종교적 행태라고 윽박지를 것이 아니라 안식이 얼마나 위대한 개념이자 영적인 메타포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작품인지를 정확하게 고지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아브라함 조슈아 헤셀에게 열광한 것은 ‘누가 사람이냐? 를 만나면서였다. 난 그의 도발을 잊을 수가 없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자신이 하나의 문제다. 그러므로 사람이 되는 것은 곧 문제가 되는 것이다.”(아브라함 조슈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 한국기독교 연구소,p,9) 내가 헤셀의 이 도전에 정신이 번쩍 든 이유는 그가 이 글에서 또 다른 맥을 기가 막히게 잡고 있었음을 후에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고발했다. “세계는 하나의 문제이자 하나의 사명이다. 우리는 그 문제가 바로 사명임을 발견함으로서, 그 사명 속에서 우리에게 배당된 부분을 알아내는 기술을 배양하는 데에서, 세계가 하나의 문제이자 하나의 기대임을 발견하는 데서, 의미를 찾는다.”(위의 책, p,133) 이 부분을 읽다가 헤셀이 맨 처음 도발했던 내용의 실마리를 푸는 것 같았다. 해서 여지없이 난 이 세계를 향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가 사람임을 직시했다. 사람과 세계도 같은 문제 공동체이기에 사람만이 그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존재라고 확신했다. 이 선물을 헤셀은 나에게 주었다. 너무 기뻤다. 그가 준 지성적인 혜안 때문에. 헤셀의 ‘안식’ 개념 역시 ‘사람’ 개념 이해처럼 도발적이다. 왜냐하면 그는 안식일을 하나님의 적극적인 영성의 산물이라고 접근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안식일은 하나님을 존재자의 존재로 만나게 해 줌으로서 나의 존재됨의 극치를 이루는 날이라고 해석한다. 그 어떤 해석자도 안식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해석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갈파는 충격이자 신선함이었다. 나는 이 책에서 헤셀의 천재적 소질을 보았다. 두 가지의 접근을 보면서 확신했다. ① 안식일은 시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영이라는 해석이었다. (p,149) 여기에서 나온 개념이 안식일과 영원은 하나이며 안식일과 영원은 본질이 같다는 해석이다. 곱씹어도 은혜다. ② 안식일은 택한 백성과 한 짝이라는 해석 때문이다. 랍비 시므온 벤 요하이가 이렇게 말했다. 창조 작업이 완료되자, 일곱째 날이 탄원했다. ‘우주의 주재시여! 당신께서 지으신 만물마다 짝이 있습니다. 한 주의 모든 평일은 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외톨이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네 짝이 되리라’ (p,116) 안식일은 단순히 날의 개념이 아니다. 안식일은 곧 나와 하나임을 선포하는 극적 개념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안식은은 나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나를 나 되게 만들었고, 만들고, 만들 나의 짝이 안식일이라는 헤셀의 갈파에 나는 꼼짝없이 전율했다. 그러므로 미르바 던이 말했던 것처럼 안식은 곧 나에게는 축제요, 향연이다. 바울이 말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그렇다. 그 은혜가 나에게 쏟아지는 영원의 연속성이 있는 카이로스가 곧 안식일이다. 그러니 랍비 유다의 말은 정말 옳다. “일생에 걸쳐 영원을 얻는 사람이 있고, 짧은 시간을 들여 영원을 얻는 사람도 있다.” (p,177) 어떤 의미에서 나는 전자, 후자 두 개의 은혜를 줄곧 받고 있으니 말이다.
ps: 오늘은 학교 면학기간이다. 다른 날 같으면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치열하게 한국교회를 위한 공부에 전념할 시간인데 서평도 남길 수 있는 여유도 가질 수 있어 행복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