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9년 1월 20일 주간사역2024-04-23 16:5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우리 교회가 2019년, 조금 더 돌보아 한다고 생각되는 사회적 대상들이 있다면?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460장: 뜻 없이 무릎 꿇는 
●  복음성가: 이 땅위에 오신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강할 때는 강해야 합니다.
● 본문 : 갈라디아서 1;18-24
1)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베드로를 만난 것과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 않았음을 본문에서 밝힌 의도는?
본문 18-19절을 복기하고 설교의 주제와 연관하여 설명해 보자. 
(사도직에 대한 설교 해석 참고)  

2) 교회가 강하게 맞서야 하는 오늘날의 영적인 대상들은?


⓶   

3) 적용하기
⓵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나만의 세속적인 괴물은? 
⓶ 교회 밖에서 만나는 두 종류의 가나안 신자들을 분별하여 지혜롭게 교제하고 복음을 전하자. 
⓷ 우리 세인교회가 영적인 반 복음적인 대항마들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합심하여 중보하자.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세인 공동체의 지체들이 주존감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2) 새 신자들이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3) 환우들을 위한 중보
4) 사업체 심방이 은혜롭게 진행되도록
5) 적절한 일군을 보내 주소서, 
6) 지역 셀이 승리하도록 
7) 출산을 앞둔 자매들을 위해

● 셀 사역하기

1) 지역 셀에 2019년에 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태신자 선정하고 모일 때마다 기도하기.
2) 섬기는 피선교지를 위해 중보하기
3) 리더와 인턴들을 위해 중보하기
4) 지역에 있는 약한 자를 돌보고 중보하기
5) 교역자들을 위해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문: 갈라디아서 1:18-24
제목: 강할 때는 강해야 합니다.

저는 바울은 13개의 본인 쓴 편지 중에 본서인 갈라디아서에서만 유독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강복(降福)과 칭찬의 인사말을 생략하고 곧바로 본론을 시작하며 강하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질타하는 형식을 도입했다고 이전 강해에서 전술했습니다. 이유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배교와 변심이 첫 번째이고, 그 다음은 갈라디아 교회를 거짓 복음으로 유린하여 교회를 무너뜨린 유대 율법 교사들을 향한 강력한 선전포고 성격의 편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1:1-17절까지의 이전 강해에서 할례를 주장하는 거짓율법 교사들이 전한 거짓복음에 놀아난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 대한 성토와 어리석음에 대하여 비난하는 바울의 비통함을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17절까지는 거짓 복음에 대한 항변과 복음으로 국한하여 해석하였다면, 오늘 본문 18-24절은 또 하나 바울을 몹시 분노하게 만들었던 사도권에 대한 강력한 변호 메시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본문 18-19절을 읽겠습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본문에서 살펴야 할 중요한 것은 18절 이후에 기록된 예루살렘 방문 내용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만나기 위함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약 두 주일을 그와 함께 보냈음도 밝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이외의 그 어떤 사도와도 접촉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합니다. 20절에서는 베드로는 만났고 다른 사도들과는 접촉하지 않았음을 강도 높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 21-24절 본문을 마저 읽겠습니다.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이 구절에 대하여는 교우들에게 광의(廣意) 즉 넓은 뜻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려고 합니다. 본문 21절에서 베드로와의 만남을 마친 바울은 이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을 방문했다고 보고합니다. 주석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9:30절을 읽습니다.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무슨 말입니까?
회심 이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와서 예수를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변절한 바울을 살해하기로 결의하고 그는 추적합니다. 이것을 알았던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형제들이 바울을 가이사랴로 피신시킨 뒤에 지난 강해에서 말씀 드린 대로 다소에 있는 고향으로 피신하게 합니다. 이로 인해 바울은 낙향하여 13년이라는 세월을 칩거하는 정중동의 시간을 갖게 되엇음을 지난 강해에서 밝혔습니다. 이 과정에 있었던 행보에 대하여 바울이 스스로 아주 짤막하게 보고한 것이 본문 21절이요, 사도행전 9:30절입니다. 길리기아는 다소가 속해 있는 소아시아 동남부 지역을 지칭하는 것이고, 다소로 내려가는 길에 바울은 이후 13년이 지난 뒤에 다시 바나바와 함께 사역할 운명의 장소인 수리아 안디옥을 잠시 들려 그곳에서 예수를 증거 한 뒤에 다소로 내려간 동선을 보고하고 있는 것이 본문 22-24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적시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의 목적과 의도를 부연 설명해야 합니다. 바울이 왜 다소에 내려가 13년이라는 세월을 칩거하기에 앞서 방문한 예루살렘 행을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에게 소상히 설명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본인의 사도권에 대한 강력한 변호를 선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은 거짓 율법 교사들이 부화뇌동하고 있는 바울의 사도권 시비에 말려들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시비에 대하여 강력하게 변호할 내용으로 바울은 예루살렘 방문 사건을 예로 듭니다. 자신은 사도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기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해 달라거나 지지를 유도하지 않았음을 예루살렘 교회 방문 건으로 거짓 교사들과 갈라디아 교히의 어리석은 신자들에게 피력한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만난 베드로와 15일을 함께 유했다고 했습니다. 이 만남의 이유를 본문 18절에서 이렇게 바울은 천명합니다. ‘방문하려고’ - 헬라어 단어 ‘히스테리오’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에 주목하십시다. 존 스토트 목사는 이 단어를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하여 목적의 방문’(존 스토트, 갈라디아서 강해, p,41, IVP 간)이라고 주석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글도 존 스토트는 소개합니다. “바울이 이 사도에게 간 것은 명령을 받아서 간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간 것이다.” (위의 책)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야고보를 비롯한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보고입니다. 무엇을 에두른 표현입니까?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물리적인 압박을 받아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았고 자신의 방문은 전적으로 사적인 방문이었음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사도권 때문에 중요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수뇌부 즉 사도들에게 통제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과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다는 선언을 지금 갈라디아 교회 지체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내 사도권에 대하여 시비를 걸지 말라는 단호한 선전포고를 한 것입니다. 이런 단호함을 전제할 때 갈라디아서 1:1절의 진중한 선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는 첫 장 첫 구절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물 타기하며 시비를 걸고 있는 거짓교사들과 거기에 넘어간 유약한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 대한 직격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대단히 중요한 교훈과 도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 교회의 교회됨을 무너뜨리는 반 교회적인 것과는 강하게 싸워야 합니다. 
20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시비를 걸며 갈라디아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는 거짓교사들과 그 현란한 말장난과 반교회적인 행태에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의 명함판신자들에게 얼마나 격앙했으면 이런 강력한 표현을 썼을까? 에 대한 감정적인 소회에 대하여 정서적으로 동의합니다. 바울은 상당히 분노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때론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가 매우 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뒤로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목회를 하면서 경험한 저의 실천적인 내용물을 토대로 말씀드린다면 두 가지의 경우입니다.
1) 교회의 세속화에 대하여 강하게 맞서야 합니다.
이 경우는 당연히 목회자와 신자들의 세속화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을 위해 목사들은 세속적인 방법을 동원하였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불편한 장소로 만들지 않겠다는 세속적 편리주의였습니다. 유월절 절기 때 성전에서 드려야 하는 제물들을 이스라엘 각처에서 유대인들이 직접 가지고 올라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해서 이 불편함을 알았던 소위 말하는 헤롯 성전에 기생하는 종교인들은 그 지역의 장사치들과 야합하여 프리미엄을 주고받으며 성전에서 제물들을 사고 팔 수 있는 편리한 제도를 만들어냈습니다. 말 그대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하는 삶은 내팽개쳐 버린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만민이 기도해야 할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변질시키고 전락시킨 것입니다. 세속화라는 괴물은 교회를 붕괴하는 신 바알이요 아세라입니다. 이것과는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2) 교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태생적 가나안 신자들과는 강하게 맞서야 합니다.
태생적으로 교회공동체 대하여 부정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는 강하게 맞서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도전하며 갈라디아 교회를 무너뜨리는 반 복음적인 거짓 율법 교사들에게 자기의 사도적인 정체성을 분명히 함으로 그들의 보이지 않는 영적 폭력에 맞섰습니다. 저 역시 목회의 여정 중에 교회를 무너뜨리는 두 가지의 반 복음적인 폭거와 단호히 맞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 세인 교회도 싸울 것입니다. 교회의 세속화는 현대판 바벨탑입니다. 태생적인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가나안 신자들은 교회 안의 불신자들이며, 교회 밖에 가라지입니다. 교회는 이것들에게 강해야 합니다. 뒤로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말에 농락당한 신자들을 향하여 자신의 사도직을 강력하게 변호하며 항거한 것은 예수께서 피 값을 지불하시고 값비싸게 사신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체의 힘과는 강하게 싸워야 합니다.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머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와 공동체의 지체들이 교회를 유린하는 사탄의 견고한 진을 구축하고 있는 강한 세력들을 향하여 성령이 진두지휘하시는 능력으로 그들보다 비교할 수 있는 몇 배나 강한 성령의 검으로 그들을 초토화시키는 도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고린도후서 10:4절을 새 번역 성경으로 읽고 기도합니다.
“싸움에 쓰는 우리의 무기는, 육체의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요새라도 무너뜨리는 강력한 무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