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9년 1월 13일 주간 셀 사역지2024-04-23 16:55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어떤 경우에 내가 가지고 자존심이 상합니까?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463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
●  복음성가: 항상 진실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주존심이 있는 성도
● 본문 : 사도행전 11:25-26
1) 주존심이 있는 교회에서 주존심이 있는 성도로 살아가는 방법을 담임목사는 설교에 무엇이라 전했습니까?
설교 테마를 중심으로 나누어 보십시다.  

2) 하나님이 바나바와 바울을 13년 간 하나님의 사람으로 조각하셨던 방법은 무엇입니까?
⓵ 바나바 -

⓶ 바울 -  

3) 적용하기
⓵ 주존심이 있는 성도로 내가 2019년에 달려갈 마음가짐을 나누어 보십시다.
⓶ 하나님께서 정말로 나를 조각하고 계십니까? 
  머리 굴리기, 헌신하기의 치외적인 사람으로 나를 에두르기, 안주하기에서 벗어나십시오.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세인 공동체의 지체들이 주존감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2) 새 신자들이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3) 환우들을 위한 중보
4) 사업체 심방이 은혜롭게 진행되도록
5) 적절한 일군을 보내 주소서, 

● 셀 사역하기

1) 셀 원들의 기도 제목 나누기
2) 맡겨진 피선교지 잘 섬기기
3) 2019년 전도할 대상자 선정해서 매주 셀 리더가
기도하기
4) 셀 리더와 인턴들이 사역 잘 감당하도록 중보해 주기
5) 사업체 심방 승리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제목: 주존심(主存心)이 있는 성도
본문: 사도행전 11:25-26

본문 25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우리는 이 간단한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 9장부터의 줄거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울이라 이름 하는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약 240km정도가 떨어진 다메섹으로 예수를 믿는 신흥 분파주의자들을 척결하는 사명을 갖고 원정을 떠납니다. 그 길을 떠난 바울은 다메섹 근거리에 이르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바로 그곳에서 극적인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바울은 이제는 예수 핍박주의자가 아닌 예수의 증인으로 변화되었음을 사도행전 9:19절 전반절-22절이 증언합니다. 이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자 다메섹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변심한 바울을 살해하기로 공모하자 이제는 아이러니하게 다메섹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보호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냅니다. 드라마틱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바울은 불타는 열정으로 예수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증거 합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여 척결하라고 칙령까지 만들어준 산헤드린 공회가 있는 유대종교의 본거지였던 예루살렘에서 돌아와 그가 경험했던 회심의 사건들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바울의 모습은 두 부류가 충격을 받습니다. 한 부류는 말할 것도 없이 유대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부류는 바울이 예상하지 못한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공동체의 지체들이었습니다. 왜요? 바울의 회심을 진정성 있게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난처함을 당하고 있었던 바울을 도왔던 사역자가 나타나는 그가 바로 바나바입니다. 사도행전 9:26-30절에서 누가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의 선한 성격을 갖고 있었던 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을 인정하지 않던 예루살렘 교회의 형제들에게 바울의 회심이 진정성이 있는 회심이며, 그는 이방의 형제들을 위해 부름을 받은 종임을 대변하며 바울을 지원했던 동역자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살해위협과 교회공동체의 형제들마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울을 대하자 바나바는 어쩔 수 없이 후일을 도모하며 바울 형제를 그의 고향 다소로 내려가도록 도와주었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또 한 측면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충성하던 종이었던 바나바는 스데반 박해로 인해 흩어졌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수리아 안디옥에 가서 복음을 전해 이방교회의 전진 기지였던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세워졌고 폭발적인 부흥을 이루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부에 의해 초대 목회자로 파송되었고 바나바는 아름다운 교회였던 안디옥교회를 맡아 최선을 다해 사역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부흥되는 안디옥교회를 혼자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알았던 바나바는 그가 13년 전에 후일을 도모하며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새우실 것을 굳게 믿고 아쉬운 마음으로 다소로 내려 보냈던 바울을 생각해 냈고, 무려 175km 나 떨어져 있는 그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바울을 데리러 다소로 찾으러 간 것을 보고한 것이 본문 25절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찾으러 다소까지 갔다는 본문 25절의 보고를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리적으로 175km는 주후 1세기 상황으로 비추어볼 때 너무나 먼 거리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또 하나 이 거리의 동선이 주는 극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목숨을 걸어야 갈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리아 안디옥에서 다소로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아마누스 산맥을 넘어야 합니다. 해발 3,000미터에 달하는 아마누스 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산맥의 곳곳에는 산적득과 강도들이 출몰하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나바는 바울을 찾으러 목을 건 다소 행을 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위험한 여행을 바나바가 굳이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나바는 바울이 다소에 칩거하도록 보낸 장본인이었습니다. 그가 바울을 다소로 보낼 때의 마음은 대단히 아팠을 것입니다. 그의 능력, 그의 회심에 대한 진정성을 바나바는 알고 믿었던 동역자였습니다. 다만 조직이, 구조가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바울 형제를 고향으로 내려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바울 형제를 내려 보낸 지 1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바나바는 적어도 13년이라는 세월을 생각하면서 그가 확신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울이 드디어 하나님의 사역을 할 때가 되었다는 확신이었습니다. 바울이 다소에서 칩거하던 13년이라는 세월동안 그가 가지고 있었던 유대 종교적인 율법의 덕지덕지한 껍질, 아주 매력적인 유대적인 종교적 포플리즘의 묵은 흔적들을 벗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고 바나바는 확신했습니다. 이제 바울의 입장으로 환언해 보십시다. 바울은 13년 동안 고향 다소에서 거하는 동안 무리지음의 동선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항상 인기를 추구하며 유대 율법적인 수장으로 자라날 수 있는 야망의 늪에서 그는 벗어날 수 있는 충분한 사유의 시간이요, 주님과 함께 동행 하던 은혜의 시간이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고백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홀로되어 있었던 13년의 시간 안에서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절호의 기간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간을 거친 바울은 드디어 하나님의 사람 바나바를 통하여 다시 자기를 구속사의 정 중앙 무대로 이끄시는 선명한 조명하심을 체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소에서 13년 만에 만난 이 두 사람은 다시 목숨을 걸고 아마누수 산맥을 넘어 수리아 안디옥에 돌아와 공동목회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선한 사역을 시작한 이 두 사람의 사역 보고를 누가는 본문 26절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오늘 본문은 단지 두 구절입니다. 헌데 이 두 구절에 담겨 있는 엄청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셨습니까? 얼마나 철저히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을 조각하셨고, 만드셨으며, 동시에 때를 기다리셨는지를 목도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 과정을 준비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수리아 안디옥이라는 지역 교회를 통해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의 도구로 이 두 사람을 사용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이방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한 사람은 안디옥에서, 또 한 사람은 다소에서 만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되어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구속사라는 역사의 무대 위에 올리셨고 이들로 인해 오늘 이강덕은 구원받을 수 있었고, 여기에 모여 있는 여러분도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2019년을 시작하는 두 번째 주일을 통해 정말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주존심을 있는 성도가 누구입니까? 적어도 주님의 주님 되심을 100% 인정하고 달려가는 주존심이 있는 성도는 과연 어떤 사람들입니까?
※ 하나님이 오늘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가고 있음을 믿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간다는 말을 바꾸면 이렇게 대치할 수 있습니다. 주존심으로 무장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조각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떻게? 세속적 신자의 삶이 아닌 철저한 하나님의 삶을 살아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도록 오늘도 조각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고향 다소로 낙향하여 13년이라는 세월을 보내야 했던 바울의 시간들은 세속적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쓰디쓴 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젊고 젊은 나이에 조그마한 성읍인 다소에서 태어난 촌뜨기 바울이 당시 유대율법의 총본산인 예루살렘으로 유학의 길을 떠날 때 다소 고향 사람들은 심심한 박수를 치며 그를 배웅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기대를 걸었던 젊은 바울이 이제 과년한 나이가 되어 다소에 돌아왔을 때 그의 신분은 이상한 신흥 종교에 빠져 살해의 위협을 당하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완전히 실패한 실패자의 신세가 되었음을 알고 고향 사람들의 냉소와 박대가 얼마나 심했을는지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이런 냉소 속에 13년을 죽지 못해 살아야 했던 바울은 그렇게 그가 가지고 있었던 야망의 두께를 하나님에 의해 벗겨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철저한 외로움을 경험하면서 주님이 걸으셔야 했던 길을 걷도록 자기도 모르게 철저히 훈련받는 기간이 13년이었고, 조각된 시감이 13년이었던 것입니다. 바나바 역시 예루살렘이라는 대도시에 만들어진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로 서게 되면 여러 모양새로 품새가 나아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별로 가까이하기조차 꺼려하던 이방인들의 땅인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목회자로 파송되기에 이릅니다. 말이 좋아서 파송이지 서울에서 지방으로 좌천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안디옥에 파송되자마자 그는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부족함을 느꼈고 그 와중에 그가 마음에 품었던 바울 형제를 복기하게 되었고 드디어 바나바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절정을 다소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이 두 사람은 철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으며 안디옥에서 사역을 감당하여 수많은 공동체의 지체들을 크리스티아노스로 만드는 사역의 열매를 거둔 뒤, 드디어 그곳에서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이 조각하신 두 번째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공동 담임목회자의 직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이방 선교의 물꼬를 트는 제 1차 선교여행의 선교사로 파송되는 도구들이 되었음을 우리는 이어지는 사도행전 13장을 통해 보고받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당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 가시기 위해 당신을 조각하며 만들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